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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일기장 Nov 16. 2019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공산주의자.

<모던 타임즈(Modern Times),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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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모던 타임즈>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건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 인문학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혹은 배워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시 말해 우리 모두가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작품이기 때문이다. 찰리 채플린이라는 시대의 아이콘이 견인하는 이 작품은 수많은 분야에 걸쳐 언급되곤 한다. 인류의 역사에 어떤 중요한 특이점으로 자리하고 있는 산업 혁명이라는 사건은 정규 교육을 거친 사람이라면 적어도 그 이름 정도라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다. 지금 세대의 우리가 그 이름을 다시금 언급할 때 <모던 타임즈>의 이름을 꺼내는 것은 상당히 유용한 수단이다. 막연히 산업 혁명이라는 사건에 대해 텍스트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그 시기의 사회상을 움직이는 이미지로 파악할 수 있는 좋은 부교재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당시의 풍경을 그 바로 후대가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는지 나름의 철학까지 담은 이 영화로 산업혁명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풍부한 이야기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 심지어 이미 100년 가까이 지난 영화인데도 보기에 충분히 재밌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해서 접근할 때 주지해야 할 점은, <모던 타임즈>가 영화의 제작 시기에서 100년 즈음 이전에 일어난 산업 혁명과, 그로부터 촉발된 대공황이라는 사건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를 단지 산업 혁명을 소개하는 수단으로 쓰는 데 사용하는 것은 이런 연유로 상당히 부적합하다.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섞여 있는 비판적 작품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장 대공황을 통해 생계에 위협을 느낄 수 밖에 없게 된 이들이 당시의 상황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정치적'인 시선인가 하는 것에는 논의의 여지가 존재하나, 이 영화를 받아들이는 우리가 과도하게 수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지양되어야할 것이다. 우리는 대공황을 겪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역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탐구의 여지가 많은 이 작품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보려하는 지금, 내가 오히려 접근해보고 싶은 관점은 '영화적'인 부분이다. 만약 산업 혁명이나 대공황 따위를 이해하고자 하는 입장으로 교보재삼아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고, 또한 영화를 분석적으로 파악해 영화사적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를 할 정도로 전문적으로 접근할 생각은 딱히 없는 일반 관객이 본다면 이 영화는 어떤 느낌일까. 배경 지식이 없는 상태로 <모던 타임즈>를 으레 다른 영화를 보듯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그런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물론 나머지 부분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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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던 타임즈>의 영화적 성취는 재미있다는 데 있다. 사람을 웃게 해주는 것에 관하여 깊이 사유하고 탐구하던 찰리 채플린은 스스로의 과도하게 잘생긴 얼굴을 우스꽝스러운 콧수염으로 가리는 것을 시작으로 다양한 방법을 거쳐 결국 자신만의 답을 찾아낸 것처럼 보인다. 무엇이 사람을 웃게 하는가? 대체 어떻게 100년 전의 영화가 우리를 웃게 할 수 있는가? 웃음의 본질은 시공간을 넘어 누구에게나 동일하다고 믿었던 그의 생각은 확실히 유효했다. 아직까지도 그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이를테면 김병만 같은 코미디언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위대함을 되새기게 한다.


 과거의 영화를 다시 볼 때 촌스럽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당장 어제 만든 영화도 자칫하면 촌스러워 보이기 쉬운, 빠르게 가치가 변하는 사회에서 수십 수백년을 관통하는 가치를 추구하기는 당연히 어려운 일이다. 특히 우리가 쉽게 촌스럽다고 느끼는 것이 당시에 가장 세련되었다고 여겨지는 것이라는 사실은 상당히 흥미롭다. 시대의 최첨단을 달리고, 조금 더 복잡한 것을 추구하려고 한 모든 시도는 고작 몇 년도 지나지 않아 사장되기 마련이다. 복고라는 이름으로 다시 예전의 가치를 발굴하고자 하는 시도에서나마 유효할 수는 있겠지만, 어느 누구도 나의 세련됨이 후대에게 복고적인 가치로 재발견될 것을 상정하지는 않는다. 때문에 시간이 오래 지나도 같은 가치를 전해줄 수 있는 건 오히려 복잡하고 세련된 것들보다는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것들이다.


 오래 전 영화를 다시 보자. 줄이 달린 전화기가 보편적인 시대에서 안테나를 길게 뽑아 무전기같은 전화를 들고 있는 이들은 스스로가 시대의 선각자라고 여기지만, 우리는 헛웃음이 날 따름이다. 그러나, <원초적 본능>의 불멸의 섹스 심벌 샤론 스톤의 다리가 올라가는 그 순간, 그 때의 관객이나 우리나 눈을 껌뻑이고 침을 꼴깍 삼키게 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히치콕이 아직까지 유효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공포, 흥분, 웃음, 슬픔과 같은 가장 근본적인 감정은 시대를 지나며 그 모습을 조금씩 바꿀지언정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웃음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고자 했던 그는 동시에 뛰어난 감독이자 배우였다. 단지 사람들을 웃기는 것 뿐 아니라 영화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와 애정을 품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가 훌륭한 영화 제작자라는데 많은 자부심을 느꼈다. 우스꽝스러운 그의 영화를 볼 때는 쉽게 상상할 수 없지만 그의 촬영 현장은 굉장히 빡빡한 장소였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재밌게 해줄 수 있을지 끝없이 고민하고, 철저히 계산된 연출로 그것을 표현해냈다. 하지만 철저하게 계산되었다는 말이 치밀하게 설계되었다는 것과 동의어는 아니다. 그는 철저히 계산된 단순함과 허술함을 원했고, 그렇게 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의 작품에서 그의 철저한 촬영 현장이 떠오르지 않는 건 그에게 있어 가장 완벽한 성취일 것이다. 


 사람을 웃기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마치 A를 줄 것처럼 하다가 뜬금없이 B도 C도, Z도 아닌 ㅎ을 내놓으면 사람들은 어이가 없어서 웃는다. 혹은 어떤 동작을 표현할 때 10의 강도로 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갑자기 1,000,000,000의 강도가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기본적인 원리는 과장과 변칙에 있다. 그러나 이걸 완벽하게 해내기는 정말 어렵다. 사람들과 가볍게 대화를 할 때 센스 있게 웃음을 이끌어내는 것도 이렇게나 어려운데,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변수가 없는 통제된 상황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웃음을 이끌어내는 건 노력으로는 얻을 수 없는 재능에 가깝다. 수많은 재미없는 코미디 영화들을 기억해보자. 채플린은 타고난 천재다.



3


 동시대를 살았던 무성 영화 감독 버스터 키튼과 찰리 채플린을 비교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조금 비약해서 말하자면 두 거장 모두 사람을 웃게 만드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가졌지만, 키튼의 웃음이 본질적인 웃음 그 자체였다면 채플린의 웃음은 사회 비판적인 냄새가 짙게 풍기는 풍자와 해학에 가깝다. 후기 채플린은 공산주의자라고 불릴 정도로 당시의 미국 사회에 비판적이었다. <모던 타임즈>에서도 이런 태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당장 영화 중간에 공산주의자로 몰려 감옥에 가는 장면만 봐도 그렇다.


 공장이 끝없이 돌아가고, 노동자가 마치 하나의 인간이 아닌 공장의 부품 그 자체로 여겨지는 것은 대놓고 미국 사회가 당시의 노동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비판이다. 사회가 노동자를 부품으로 여기는 것에 반발해, 채플린은 스스로 훌륭한 부품이 되어 보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단단히 맞물려 있는 톱니바퀴 사이로 스스로 머리를 들이밀고, 끝없이 반복되는 단순 노동에 동화되어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도 신경쓰지 않고 노동에만 집중하는 모습은 우스꽝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하다. 그러나 이렇게 완벽하게 부품화된 인간으로 거듭나자 오히려 사회는 채플린을 배제하려는 시도를 보인다. 개인을 부품으로 파악하지만 실제로 부품화되는 인간은 배제하고 최소한의 인간성을 지켜야 된다고 강요하는 모순을 드러내는 것 같다.


 채플린의 영화가 정치적으로 한 쪽의 색채를 짙게 띄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를 보는 것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이유는 그가 정치적으로 행동한 이유가 단지 하나의 인간으로써 존재하기 위한 노력에 비롯한다는 데 있다. 끝없이 개인을 핍박하는 사회에 맞서 그는 어떻게든 인간적인 가치를 보전하고자 노력한다. <모던 타임즈>의 줄거리 또한 사회에서 지칠대로 지쳐 미쳐버린 사내가 사랑을 통해 다시금 자신의 인간성을 깨닫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채플린은 영화의 후반에 이르러서는 사랑하는 여인과 둘만의 보금자리를 만들고, 공장에서 나사를 조이는 대신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행복한 웃음을 짓는다. 적어도 한 명의 인간으로써 존재할 수 있도록 우리를 존중해달라는 그의 절박한 외침을 공산주의로 매도하고 정치적인 목소리로 파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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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엔딩을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보자. 사회에서 쫓겨나고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었지만 집이 무너져버리고, 간신히 조그만 식당에 취직해 노래하고 춤추며 다시 살아갈 수 있을 것처럼 보였지만 거기에서도 쫓겨나버린 채플린은, 길가에 버려진다. 앞으로 어디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껄껄 웃으며 그래도 힘을 내서 나아가 봅시다. 태양이 지는 곳으로 한 발짝씩 힘차게 손을 잡고 전진하는 이들의 모습은 으레 해피엔딩으로 해석되곤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의 엔딩이 조금 다른 뜻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채플린은 사회에 편입되고자 하지만 지속적으로 실패하는 낙오자가 아니다. 오히려 사회에 편입되기를 희망하지 않는 방랑자에 가깝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회로 들어가긴 했지만, 쫓겨난다고 할지라도 애초에 추구하던 가치가 아니기 때문에 그에게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이다. 때문에 채플린의 당당한 행진은 다시 사회에 편입되어 훌륭한 역군으로 봉사하고자 하는 노력의 발로가 아닌, 앞으로의 인생을 하루하루 뿌듯히 즐기고자 하는 귀여운 몽상가의 행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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