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차 프로 떠돌이
인스타에 적었다 너무 사적인 것 같아서 지웠던 글. 그래. 내가 이렇게 용기가 없다.
그래도 혼자보기 아깝다는 마음에 블로그에, 그리고 브런치에도 남겨본다.
이십대 후반,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다닌 직장을 그만두고 나는 호주로 떠났다. 그간 작은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막내디자이너로 모은 얼마 안되는 돈을 털어 나는 지금이 아니면 어쩜 다시 안 올 것 같다는 느낌에만 의지 한 채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엄마, 아빠에겐 테솔자격증을 따오겠노라 말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다. 나는 꿈이 있었다. 호주에서 돈을 모아 독일에서 공부하겠다는 꿈. 지금은 EX가 된 전 남자친구가 말하길 그건 이루기 힘든 원대한 꿈이라고 했다. 그때까지 무언가 제대로 해낸 적이 없었기에 부모님은 물론, 나 또한 나를 믿지 못했었다. 그저 어렵게 간 대학을 가까스로 졸업하고 직장을 군말없이 3년 정도 다니며 남자친구가 생기니 부모님은 그제서야 내가 조금은 남들만큼 '제대로' 하는게 생겼다 말했다. 그러면서 내 인생의 '다음 스텝'으로 남자친구와의 결혼을 추진하셨다.
이제와 여기에 써보자면 내가 직장을 군말없이 3년이나 다닌 것은 독일에서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대학졸업반 때 우연히 피터도위그의 화집을 보고 무작정 그를 만나야겠다, 그에게 그림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며칠 밤을 세워 유학을 위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리고선 엄마에게 말했다. 유학가고 싶다고. 엄마는 단칼에 '네 돈 모아서 가'라며 거절했다. 그 때의 마음은 그런 단호한 거절에 꺽이는 단순한 마음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무언가 강렬하게 원했고 그런 열망은 운명처럼 느껴졌으며 내게 준비된 일이자 내가 해내야만 되는 일처럼 느껴졌다. 엄마를 설득해야겠다는 생각보다 유학에 필요한 최소한의 초기자금인 2000만원을 모을때까지 일을 해야겠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취직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내겐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운 좋게 졸업 전 인턴을 하던 회사에 졸업하자마자 취업해 일 할 수 있게 되었다.
회사에 다니면서는 평일 저녁이나 혹은 주말에 독일어학원에 다닐 수 있는지 알아보았지만 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고 밥먹듯이 야근과 주말근무를 하는 작은 디자인 스튜디오의 막내 디자이너로서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어디를 간다는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달마다 주어지는 150만원이 채 안되는 월급에서 교통비와 식비 그리고 학자금 대출을 빼면 달마다 몇십만원을 저금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와중에 엄마가 50만원씩 부치라고 했지만 몇달 만에 못부치겠다고 선언하여 엄마를 울렸으며 연애를 하면서는 저금을 건너뛰는 달이 더 많았다. 그러다 아빠가 자기에게 빌린 학자금을 갚으라며 달에 50만원씩 내라고 하자 나는 주말 저녁 카페 알바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얼마 못가 나는 깨달았다. 한국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며 작은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면서는 돈을 모을 수 없는 구조라는 것을.
당시 워킹홀리데이를 가면 제법 큰 돈을 만질 수 있다는 말이 돌았다. 독일워킹홀리데이를 제일 가고 싶었지만 당시 독일 워킹홀리데이는 생긴지 얼마 안됐고 또 독일어와 영어를 못하면 올 생각을 하지 말라는 후기를 보곤 바로 마음을 접었다. 그나마 영어보다 일본어가 낫다는 생각에 그 다음으로 일본워킹홀리데이를 알아보았다. 당시 일본의 알바 시급은 꽤 높았기에 투잡하며 아껴만 산다면 그래도 한국에서 다니던 회사에 다니는 것보다는 돈을 더 모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나는 일본문화를 제법 좋아했다. 그러던 중 회사에서 도쿄로 출장을 보내주었다. 도쿄의 분위기가 마음에 쏙 들어 일본으로 워킹홀리데이를 와야겠다는 마음을 굳혔지만 하필 다음날 동북부 대지진이 일어났다. 지진 다음날, 실장님과 내가 탄 귀국행 비행기는 지진으로 인한 공항 폐쇠가 풀린 직후 처음으로 뜬 비행기였다. 지진이 일어난 후부터 불안에 떨며 잠도 안자고 식음도 전폐하던 실장님은 한국 땅을 밟자마다 가쁜 숨을 내쉬며 TV인터뷰를 했다. 더 나쁜 일은 귀국 후에 일어났다. 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지면서 일본에 있던 워홀러 뿐만 아니라 유학생들과 직장인들 또한 한국으로 돌아오는 추세였다. 최소 향후 몇년간은 일본에 가기 힘들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떠오른 마지막 선택지는 호주였다. 당시 호주워홀에 가면 농장과 공장에서 일하며 주천, 그러니까 주당 천달러를 벌 수 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퍼지던 때였다. 그래, 독일에 가려면 일어보단 영어를 할 수 있는게 도움이 되겠지. 주천을 찍으면 유학자금도 생각보다 더 많이 모을 수 있을거고. 그리하여 나는 그간 모은 얼마 안되는 돈과 퇴직금, 돈이 될만한 물건(카메라나 자전거 등) 등을 죄다 팔아 3개월간의 필리핀 어학연수를 신청했고 남은 백오십만원이 채 안되는 돈으로 호주워홀을 떠났다.
큰 돈을 들여 구지 3개월동안 필리핀 어학연수를 간 건 나는 차라리 제 2외국어였던 일본어가 더 나을 정도로 영포자였기 때문이다. 언젠가 외국에 가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은 했지만 그게 영어권 국가는 아니었나보다. 영미문화에는 영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호주로 떠나면서도 별로면 금방 돌아오겠다며 혹시나 또 제대로 해내지 못할지도 모르는 나를 미리 변호했다. 나 또한 이 낯선 나라에서 어디서 얼마나, 얼마를 벌며, 얼마나 모으며 살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랬던 나는 2년 후 비자 만료 기간을 꽉 채우고 호주를 떠났다. 귀국하는 길에는 바로 한국에 가지 않고 홀로 한달 반 동안 유럽여행도 했다. 유학 갈건대 뭐하러 돈아깝게 유럽여행을 가냐던 친구도 있었지만 나는 그동안 배웠다. 인생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죽기 전에 독일 땅은 밟고 죽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진 모르겠지만 그땐 그랬다. 그동안 책에서만 보던 미술관들에 가고 수 많은 명화들을 실제로 보았다. 그동안 피상적으로 공부했던 것들의 실체를 느낀 순간이었다. 운 좋게 피터 도이그의 전시도 갔다. 중간에 비행기를 놓쳐 예약해둔 일정을 따르려면 덴마크에서 열리던 그의 전시를 보지 않는 게 더 나았지만 그때 돈을 썼다. 이 때를 위해 호주에서 열심히 일하지 않았던가? 피터 도이그는 보지 못했지만 전시가 열렸던 루이지아나 미술관 직원은 너도 언젠가 여기에서 전시하라며 내게 선물같을 말을 해 주었다.
날린 돈을 아끼려 카우치서핑을 시도하다 각국 변태들의 메세지 폭탄을 받기도 했지만 우연히 피터 도이그가 교수로 있던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호스트를 만나 학교 구경도 할 수 있었다 (물론 이때도 피터 도이그는 만날 수 없었지만). 그와 헤어질 땐 처음으로 누군가와 헤어진다는 것이 아쉬워 엉엉 울었다. 그는 나를 기억하고 싶다며 내 그림 파일 하나를 보내달라고 하더니 내가 귀국할 즈음에 그 그림 파일을 프린트해 액자로 만들어 거실 벽에 걸어두고는 그걸 사진으로 찍어 내게 보냈다. 우리 엄마 아빠도 건 적 없는 내 그림이 지구 반대편 누군가의 거실 벽에 걸리다니... 독일에 가야겠다 생각했다. 호주에서처럼 독일에서도, 내가 그 곳에 가서 살 운명이라면 그렇게 되겠지.
독일에 간다 선언하니 다들 정말 가는구나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원대한 꿈이라 말하던 일이 이루어 지던 순간이었다. 무언가 하나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던 내가 하나하나 제대로 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호주에서도, 독일에서도 순탄치 만은 않은 삶이었다. 아껴둔 말까지 남김없이 하고나면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야? 하고 놀라기도 한다. 독일에서는 귀국해야지, 정말 이것까지만 해보고 이것마저 안되면 귀국해야지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성취의 기쁨보다 성취하기 위해 애쓰던 나날들이 더 쓰고 아프기도 했다. 호주로, 그리고 독일로 떠날 때의 첫 마음을 떠올리며 가지기 위해 애써 움켜쥐던 것들을 내려 놓으며 그저 다가오는 것들을 맞이하려고 할 때 비로서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기도 했다.
그렇게 8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호주에서 2년, 독일에서 6년. 아직까지 피터 도이그를 만나진 못했다. 그와 같은 공간에 있던 적은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와 만나지는 못했다. 몇년 전 그는 독일 미술학교의 교수직을 그만두었고 나는 그사이 전공을 두번이나 바꾸었으며 졸업을 앞두고 있다. 이제 나는 조금 더 큰 꿈을 꾼다. 더이상 그를 만나고 그에게 그림을 배우는 것은 꿈이 아니게 되었지만 그는 내가 여기까지 잘 올 수 있도록 이끈 이정표였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서론이 길었다. 이제 막 물꼬를 튼 8년간의 이야기, 그리고 그보다 더 긴 삶의 이야기들은 앞으로 이 곳에서 천천히 풀어볼까 한다. 오늘의 주제이자 제목인, 8년간의 떠돌이 생활에서 내가 배웠던 것들은 작년 말에 그간의 타향살이를 돌이켜보며 써본 것이다. 처음엔 인스타에 적었다 너무 사적인 것 같아서 지웠던 글이다. 그래. 내가 이렇게나 용기가 없다. 그래도 혼자보기는 아깝다는 마음에 블로그에, 그리고 브런치에도 남겨본다.
1.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지.
2. 무슨 일이 일어난대 해도 그게 좋은지 나쁜지는 나중이 돼서야 알 수 있는거야.
3. 두려울수록 힘을 빼고 다가오는 것들에 몸을 내맡기자. 때론 연약하기 때문에 부서지지 않을 수 있다.
4. 결국 운명보다 중요한건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어떻게 살아가냐이다.
5. 나는 순간을 믿는다. 그 순간 내주었던 좋은 마음, 따뜻한 말, 함께여서 좋았던 시간들을.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나는 그 순간들을 더 기억해야지. 영원한게 없어서 더 아름답고 소중할 수 있는거야.
6. 감사하다고 생각하면 감사하지 않은 게 없고, 배운다고 마음 먹으면 뭐든지 배울 수 있지.
7. 타인의 생각이나 의견은 결국 그 사람의 것이며 나와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타인이 바라보는 나와 내가 바라보는 내가 같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8. 때론 내가 나에게 가장 잔인하고 혹독한 사람이지. 그러나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도 결국 나이다.
9. 내 인생을 벼랑끝으로 몰고가지 않을거라는 믿음. 오늘의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은 내일의 내가 잘 할거라는 믿음. 이제는 그런 믿음이 생긴 것 같다.
10. 시작할 땐 겁 없이. 끝낼 땐 세심하고 정갈하게.
11.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고 안되는 일엔 힘쓰지 않기. 그건 내 일이 아니겠지.
12. 생각이 많으면 도움이 안된다. 그리고 생각만으로 할 수 있는 건 없지.
12. 미래를 어떻게 다 알겠어. 한치앞도 모르는게 세상인대. 그럴 땐 그냥 모름을 따라가자. 인생을 바꿀만한 것들은 항상 계획 밖에서, 방심했을 때, 가장 약하고 힘이 없을 때, 바닥이라 생각할 때 오더라.
적고나니 다 어디에선가 본 것들 같다. 어디에서 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이런 것들이 남아 나를 키웠겠지. 이 세상 나라고 할만한 것도 없고 내가 아닌 것들 또한 없다던 스님의 말이 생각난다. 항상 생각의 끝은 절에서 배운 것들로 끝나고 그게 내게 얼마나 힘이 되는 것들이었는지 바다건너 산너머까지 와서야 깨닫는다. 올해는 열심히,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할 수 없는 일들에는 애쓰지 않으며 살아야지. 순간순간 더 좋은 마음들을 내고 때때로 좋은 풍경속에 잠겨 뭐든지 너무 심각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