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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밍 Sep 23. 2024

6개월만의 병동 밖을 나갈 수 있게 됐다면  

보호병동 환자와의 특별한 가을산책



모처럼 해가 뜬 날이었다. 공기마저 따뜻했다. 요 며칠간은 겨울이 온 것처럼 추웠다. 방안까지 냉기가 돌아 겨울양말을 챙겨 신어야했다. 겨울 옷 상자를 열어 코트를 꺼내입고는 종종거리며 출근을 했던 날들이었다. 그녀가 그런 말을 꺼낸건 며칠 전이었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했다. 누군가와 함께라면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병동 내 누구도 그 일엔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반년 정도 된 것 같다. 그녀가 병동 밖을 나갈 수 없게 된 것은. 작년 가을, 응급으로 실려와 입원한 그녀는 올 봄 차도를 보이는 것 같더니 상태가 아주 다시 나빠졌다. 최근에서야 조금씩 호전되어 이제 직원들 대동 하에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는데 병동 내 아무도 관심과 시간을 내주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육개월 만의 첫 외출에서 또다시 그녀가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아무도 그러한 행동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고싶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머리속을 스쳤다. 구지 내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육개월 내내 창문 밖으로 같은 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알고 있었기에 나는 용기를 내었다.

 

"그럼 내가 물어볼께. 나랑 같이 나가도 되는지. 나랑 같이 나가자.”


그녀는 놀란 얼굴을 하면서도 이내 눈을 내리깔고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걸 안다는 얼굴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때 부터 였을까. 매일 하늘을 들여다보게 된 것이. 하늘 위 두텁게 깔린 구름을 보며 ‘오늘은 날씨가 좋지 않아서, 그래서’ 하고 핑계를 댔다. 핑계를 대는 동안 사실은 나도 재보고 있었던 거다. 우리의 외출에서 일어날 최악의 경우의 수들을. 그리고 그것들을 과연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처음엔 그저 가볍게 물어보기로 했다. 그래. 물어보기만 하자. 날씨가 좋아서. 오늘은 모처럼 해가 뜬 날이었으니까. 첫눈엔 험상궂어보이지만 계속 보다 보면 어딘가 정감있는, 그래서 평소에 말걸기가 조금은 편했던 병동 직원에게 물었다. 그녀가 나와 함께 나가도 되는지. 그러자 그는 얼굴에 화색을 띄며 좋은 생각이라고 했다. 모처럼 해가 뜬 이런 날엔 둘이 짧은 산책이라도 다녀 오라며 대뜸 나를 데리고 그녀의 병실로 들어가서는 그녀를 깨웠다. 그녀는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놀라하다가 나가도 된다는 말에 이내 함박 웃음을 지으며 서둘러 신발을 갈아신었다.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걸을 때는 어떤 표정을 할까. 세상 처음 땅을 밟아보는 것 마냥 긴장하면서도 설레고 들뜨고 행복해하는 어린아이가 여기, 내 옆에 있었다. 그녀는 어느새 평범한 열네살이 돼서는 여느 평범한 소녀처럼 웃고 떠들었다. 그녀는 늘 창문으로만 보던 꽃나무와 도토리나무, 그리고 밤나무를 찾았다. 아직 화단에 피어있는 작은 들꽃들과 어느새 여물어 있는 도토리와 밤을 찾아 주웠다. 문득 어린시절 읽었던 어떤 책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사방이 막혀있는 방 안에 산다 해도 사람은 결국 자연의 흐름에 따라 살게 된다고. 있는지도 몰랐던 도토리나무와 밤나무, 아직 피어있는지도 몰랐던 꽃들이 그녀와 함께 걷는동안, 그제서야 내 눈에도 들어왔다. 네잎클로버를 찾고 아직 피어있는 꽃 위를 서성거리는 벌과 나비들도 함께 보았다. 잠시 걸터 앉은 벤치에서는 나무가 만든 그림자를 바라보다 산책 중에 모은 꽃과 풀들을 가지고 나온 책 사이에 껴 넣었다.


누군가의 마음 속 깊은 바다를 헤아릴 수 있는 길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 깊이를 가늠 한다거나 함께 그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치는 일 또한 아마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건 그 사람만의 바다이기 때문에. 차마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하고 바다 속에서 맴 도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누군가에게는 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할 수 없는 말들. 나에게 보여주지 않는 표정과 나에게 하지 않는 말들. 그러나 오늘 같은 날엔 생각한다. 그저 햇살이 쏟아지는 가을의 어느날을 함께 보냈다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네가 보여준 표정, 웃음, 자연을 소중히 하는 마음 같은 것들. 내가 오늘 오후에 너에게서 본 모든 것들. 이런것들이 모여 결국엔 삶을 살아가게 한다는 것을. 나는 네게 감히 너도 그럴거다 말할 수 없지만 나는, 적어도 그런 이유들로 살아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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