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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살청춘 지혜 Jun 12. 2022

침과 붓과 검은 한가지

내 삶안의 동시성

“침과 붓과 검은 한가지라.”


한의과 대학에 막 입학한 햇병아리 새내기에게 본과 선배님이 침의 원리를 ‘術’의 관점에서 설명하며 화두처럼 던져준 말이다. 선배님의 자세한 설명은 생각나진 않는다. 대신 처음 이 말을 듣고는 당시 개봉해서 큰 인기를 누렸던 무협 영화 <동방불패>에서 임청하가 상대 적들에게 바늘을 날려 꽂으며 싸우는 장면을 눈앞에 그렸다. 침술을 배우게 되면 무림의 고수가 되는 길도 함께 걷게 되는 건가? 설레였던 마음도 떠오른다. 그로부터 침(針)을 손에 쥐고 살아온, 강산이 세 번 바뀌는 세월 동안 선배가 던져주었던 이 말이 잊혀지지 않고 가끔 생각나는 순간이 있다.


결혼해서 남편을 따라간 검도장에서 죽도를 잡고 기압을 넣을 때 선배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침과 검이 하나라더니, 나의 운명인가? 하면서 말이다. 함께 시작한 남편보다 더 크게 기압을 넣고 의욕을 보이며 일본 닌자 흉내를 내곤 했던 나는 첫째 임신을 하면서 아쉽게 검을 내려놓아야 했다. 이후 연속된 출산과 육아로 네 아이의 엄마가 되어 검도 대신 부엌 요리 칼을 잡았다. 아이가 한두 명이었다면 바쁘다는 핑계로 남편이나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요리 칼을 잡을 일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린 삐약이 네 명을 식당에 데리고 가면 한 녀석은 테이블 위를 오르고 한 녀석은 수저통을 뒤집어엎고 한 녀석은 바닥을 등으로 닦고, 엄마가 안 보는 사이 다른 녀석은 음식을 엎었다. 제지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아이들 어릴 때는 외식을 거의 할 수가 없었다. 먹고 살자 하니 어쩔 수 없이 부엌 요리 칼을 잡을 수밖에.... 덕분에 일류 요리사 솜씨까지는 아니지만 어떤 재료를 주든 먹을 만한(?자체 평가임.^^;;) 음식을 만들어 낸다.


막내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할 무렵, 지인으로부터 미술 선생님을 소개받아 집에서 미술 수업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많으니, 미술 학원에 각자 보내는 것보다 집으로 선생님이 오셔서 수업을 받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경제적이었다. 아이들 미술 공부를 위해 시작했던 거라, 처음에 나는 그저 물을 떠다 주거나 필요한 것 챙겨주기만 했다. 그러다가 한자리 꿰차고 앉아 함께 그리기 시작했다. 토요일 저녁이면 거실이 가족 화실이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토요일 저녁 그림 그리는 시간은 8년째 지금도 계속된다. 당시 함께 수업받기엔 너무 어려서 내 주변을 맴돌며 일어서라 안아달라 꽁냥 꽁냥 방해하던 막내가 그새 커서 가장 손이 빠르게 자기 작품을 마무리하는 베테랑 어린 화가다.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일주일간의 온갖 잡념을 모두 잊고 오롯하게 나에게 집중하는 행복한 순간이다. 이제 붓은 창조 활동을 함께하는 내 평생 친구다. 그리고 요즘 또 다른 붓을 추가했다. 감성을 표현하는 예술적 도구도 되지만, 때로는 내 생각을 검처럼 상대에게 펼칠 수 있는 글쓰기라는 붓에게 '너는 침을 다루는 나랑 원래 한가지야. 선배가 그랬거든~' 하며 친해지고 있는 중이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침과 붓과 검이 내 일상을 함께 걷고 있었다. 30년 전 그때 선배는 어떤 의미로 그 말을 화두처럼 던져준 걸까? 병을 치료하는 의술(醫術)의 도구인 침과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예술(藝術)적 도구인 붓과 상대를 제압하고 방어하는 무술(武術)의 도구인 칼이 한가지로 지향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제서야 나만의 의미를 찾고 싶은 호기심이 일어난다. 어렴풋하게 기억하는 선배가 일러준 ‘술(術)’이라는 한자의 의미를 더듬어 자료를 찾아보았다.



“기능(技能), 기예(技藝), 방법(方法), 책략(策略) 등을 갖는 ‘술(術)’을 풀어보면 彳+朮+亍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작은 걸음으로 걸어간다는 의미인 彳(척 chì)과 亍(촉 chù) 두 글자를 합하면 행(行)이 된다.  근면히 행하고 노력해서 연습한다는 뜻이 있고 또 아무런 지장 없이 순조롭게 간다는 뜻도 있다. 또 나무(木) 위에 점(點)이 하나 있는데 태극 원리에서 목(木)은 바로 도를 가리키고 도의 가장 기본적인 표현이자 일 점의 표현이 바로 술(術)이다. -중략-

방법과 책략 등은 심술(心術)이 되고 손과 발을 움직이는 것은 기술(技術)이 된다심술이든 기술이든 모두 도(道)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거나 실천해내는 것이며 그 표현형식은 사람의 생존 기능이다. 사람에게 말하자면 필요하고 없어선 안 되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 사람에게 그 속에서 도를 깨닫고 도를 닦게 하려고 존재하는 것이다. 술(術)은 도(道)를 근본으로 하며 도(道)는 술(術)로 표현된다.”

                                                         - [古中文化] 한자(漢字)의 도(道)중에서-



깨달음(道)을 향한 정진의 도구로써 침과 붓과 검은 한가지니, 매일을 수양하는 마음으로 침술을 익히고 환자를 치료하며 깨달음(道)에 가까이 가라는 메시지를 선배는 전하고 싶었던 거구나! 30년이 지나서야 선배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알겠다. 그런데 어디 침과 붓과 검뿐이랴? 인간이 생존하고 존재하기 위한 모든 활동이 깨달음(道)을 향하고 있으니, 또한 하나의 도구로만 고정된 것은 없지 않겠는가! 마치 우리의 생활에서 지팡이와 비슷한 작대기가 지게를 받칠 때는 버팀대가 되고 빨랫줄을 지탱하는 지지대가 되고 몸이 불편할 때는 지팡이가 되고 싸움에서는 무기가 될 수 있듯 말이다. 


일상의 어떤 행위든 생존을 위한 투쟁의 도구가 될 때는 무술(武術)이고, 사람을 건강하게 하고 질병을 치유하는 도구가 될 때는 의술(醫術)이 되고, 멋스러움을 즐길 때는 예술(藝術)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깨달음(道)을 향한 길은 결국엔 자신의 일상을 멋스럽게 즐길 줄 아는 사람만이 걸어갈 수 있겠구나 싶다. 요 며칠 성인이 된 아이들 생활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으며 해야 할 일을 모두 미뤄두었던 부끄러운 내 모습을 돌아본다. 일상이 예술이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그래서 도(道)를 ‘닦는다’는 말이 나왔겠지!


영화 <동방불패>를 실로 오랜만에 다시 보았다. “동쪽에서 해가 뜨는 한 절대로 패하지 않는다.”고 호기로웠던 동방불패(임청하 分)가 사랑하는 사람(이연걸 分)을 밀쳐 살려내고 혼자서 아스라이 사라져가는 그녀의 모습이 시도록 붉은 한 송이 꽃 같다. 침구학을 처음 배우며 설렜던 새내기 적 마음을 떠올리게 하는 그 진한 감동으로 흐릿해졌던 마음의 거울을 닦고, 내 업인 침술이 예술이 될 때까지, 내 일상이 어딘가에서 멋진 공명을 만들어 내기를, 스스로 화이팅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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