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허무함을 맞이할 준비도 해야 한다.
매치-3 게임을 오래 하다 보면 누구나 경험하는 순간이 있다. 이제 막 큰 콤보가 이어질 것만 같아 손끝에 힘을 주었는데, 의외의 방향으로 보석이 떨어지며 한 번의 이동으로 게임이 끝나 버리는 경우다. 스스로도 당황스럽다. 아직은 여유가 있을 줄 알았고, 더 큰 점수를 쌓아올릴 기회가 남아 있다고 생각했는데, 한순간의 변수가 판 전체를 멈추게 만든다. 이때의 허무함은 짧지만 강렬하다. 그리고 나는 종종 그 순간을 소송에 빗대어 떠올린다. 사건도 마찬가지다. 여러 갈래의 전략을 세우고, 증거를 모으고, 기일마다 발언을 준비해도, 의외의 변수 하나에 어이없이 종결되는 경우가 많다. 소송이라는 긴 싸움이 사실은 매우 인간적인 우연과 흐름에 의존한다는 점을 그럴 때마다 실감한다.
소송을 맡다 보면, 의뢰인들의 기대와 달리 사건이 허무하게 끝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어떤 분은 상대방의 소장을 받고 이를 악물고 맞서 싸우겠다고 결심한다. 나 역시 모든 법리를 동원해 치밀하게 대응한다. 그런데 어느 날, 상대방이 돌연 취하서를 제출한다. 아직 준비해둔 주장도, 꺼내지 않은 증거도 많았는데 말이다. 의뢰인에게 “상대방이 취하했습니다”라고 전하면, 처음엔 대부분 어리둥절해한다. “이게 다인가요? 더 준비할 필요는 없나요? 제 변호사 비용은요 어떻게 하죠?”라는 질문이 따라온다. 이럴 때의 허무함은 게임에서 한 수 잘못 둬서 어이없이 끝난 순간과 겹쳐진다. 그러나 소송의 본질은 이런 허무함을 견디는 과정이기도 하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고,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끝나 버리더라도, 그 자체로 사건의 운명인 것이다.
나는 소송이 법리와 논리만으로 굴러가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체감했다. 법정은 문서와 증거로 움직이지만, 그 문서와 증거를 읽는 것도 결국 사람이다. 재판부의 분위기, 상대방의 태도, 사건을 둘러싼 시선과 흐름이 결론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나는 의뢰인들에게 늘 말한다. “법정에서는 분위기를 잘 살펴야 합니다. 말의 무게도 중요하지만, 그 말이 떨어지는 공기의 결을 읽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준비해둔 화려한 논리를 늘어놓더라도 이미 재판부가 사건을 마무리하려는 국면에 들어섰다면, 그 주장은 공허하게 흘러갈 수 있다. 반대로 아주 사소한 태도의 변화, 조심스럽게 건넨 한 문장이 사건의 공기를 바꿔버리는 경우도 있다.
특히 이혼소송에서 그 분위기의 힘은 더 크게 작용한다. 부부가 첨예하게 대립하며 끝까지 갈 것 같다가도, 조정기일에서 의외로 빠르게 합의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 자리에 있던 나는 가끔 놀라곤 한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서로 얼굴조차 마주하지 않겠다던 사람들이, 재판부의 권유와 현실적인 조언을 듣고는 생각보다 담담하게 합의서에 서명한다. 그렇게 한때의 불꽃 같은 다툼이 어이없을 정도로 조용히 끝나 버리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건 누가 더 옳았느냐가 아니다. 어느 순간 사건의 리듬이 ‘끝’을 향해 기울어가는 분위기를 알아차릴 수 있느냐이다. 판이 갑자기 닫히기 전에, 내가 어떤 말과 행동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마무리의 모양이 달라진다.
민사사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채권 회수를 위해 시작한 소송이 어느 날 갑자기 조정으로 끝나거나, 상대방의 돌발적인 변제 행위로 종결되기도 한다. 의뢰인은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동시에 안도한다. 더 이상 기일에 나오지 않아도 되고, 길게 싸울 필요가 없어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순간에도 나는 방심하지 않는다. 게임에서 판이 끝났다고 모든 게 끝난 건 아니듯, 소송도 종결 순간 이후가 더 중요할 때가 많다. 합의가 이행되는지,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는지, 그 뒤를 살피는 것이야말로 진짜 의미 있는 일이다. 어이없게 끝나버린 순간에도 결국 남는 것은 이후의 관리다.
소송의 세계는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분위기를 읽으려 한다. 재판부의 표정, 상대방 대리인의 태도, 심지어 복도에서 마주치는 짧은 눈빛 하나도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 작은 단서들이 모여, 사건이 언제 끝날지를 예감하게 한다. 매치-3에서 이미 더 이상 움직일 길이 보이지 않는 순간이 있듯, 소송에도 이미 흐름이 닫히는 순간이 있다. 그때 무리해서 한 수를 더 두려 하면, 오히려 허무한 패배만 안겨 줄 뿐이다. 반대로 공기를 읽고 적절히 멈출 수 있다면, 사건은 깔끔하게 끝난다. 결국 소송은 법리를 겨루는 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분위기를 읽는 무대다.
나는 의뢰인에게 종종 이렇게 말한다. “어이없이 끝나 버리는 게 반드시 나쁜 건 아닙니다. 중요한 건 그 끝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입니다.” 매치-3의 갑작스러운 ‘게임 오버’도, 소송의 뜻밖의 종결도, 허무함을 남기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작의 여지를 품고 있다. 중요한 건 그 허무함을 이기는 힘이다. 결국 법정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논리뿐만 아니라 분위기를 읽는 눈, 그리고 흐름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나는 오늘도 사건 속에서 그 흐름을 살피며, 어이없게 끝나더라도 결코 허무하지 않은 마무리를 만들기 위해 애쓴다. 그것이 변호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