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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공포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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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전연 May 17. 2024

주온 - 비디오판 1

날것의 공포란 이런 것

1. 감상

공포 마니아 사이에서 무섭기로 악명 높은 영화. 악령 높은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장판이 아니라 비디오판이라는 점이, 영화 보기도 전에 공포심을 자극한다. 수위 높고 자극적인 작품들이 정식으로 개봉되지 못하고 해적판으로 떠도는 것처럼, 이 영화도 대중에게 공개하지 못할 만큼 무섭기 때문에 비디오판으로 출시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준다. 사실은 본래 비디오판으로 계획된 것이었고 그것이 입소문으로 유명해지자(무서우니까) 흥행과 수익을 예상한 제작자와 감독이 후에 극장판을 만든 것이다. 그래도 비디오판이라는 간판이 주는 기대감과 공포감은 반감되지 않는다. 극장에 걸리지 않았으므로 표를 사서 본 사람이 없고, 무섭다는 소문은 자자하고, 여느 영화에 비해 구하기 힘들므로 보고자 하는 이로 하여금 이거 정말 귀신 씐 영화가 아닐까 하는, 이거 보면 정말 어떻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망상마저 들게 한다.

실제 영화를 보면 일단 저화질의, 비디오 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칙칙함과 건조함이 분위기를 압도한다. 귀신이 나온 것도 아닌데 분위기가 무섭다. 평범한 장면에도 긴장감이 스며 있다. 마치 스너프 필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귀신이 등장하는 장면보다 영화의 이러한 전반적 분위기가 더 무섭다. 여기에 서늘한 효과음까지 입혀져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이렇게 서서히 조여 오는 공포는 귀신의 등장과 함께 음악(효과음)을 빵 터뜨리는데,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이 영화를 거의 웬만한 사람은 밤에 집에서 혼자 불 끄고 볼 수 없다고 장담하는 바이다. 아무리 강심장이라 해도 이러한 방식의 공포는 본능적으로 극복하기 힘들다. 칼 들고 설치는 살인마는 잔인하고 흉측한 거지 무서운 게 아니다. 난도질하는 그런 영화는 사실 액션에 가깝다. 그러므로 밤에 집에서 혼자 불 끄고 보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주온의 공포는 차원이 다르다. 카야코 귀신이 무서운 게 아니라 영화의 싸하고 찝찝한 분위기가 밤에 집에서 혼자 불 끄고 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누가 옆에서 놀래면 깜짝 놀랄 수밖에 없듯이 주온 영화도 (방식은 다르지만) 본능적으로 공포감을 조성하기 때문에 이 영화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밤에 집에서 혼자 불 끄고 본 게 아닐 것이고, 이 영화를 밤에 집에서 혼자 불 끄고 봤는데 무섭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타고난 강심장이거나 허풍쟁이임이 틀림없다. 필자도 처음 봤을 때는 밖이 환한 대낮에 봐서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볼 때는 밤에 방에서 혼자 불 끄고 봤는데 처음 봤을 때와 다르게 꽤나 무서웠다. 그렇다고 잠을 못 자고 악몽을 꿀 정도로 무서운 건 아니지만, 이 영화가 시시하다는 둥 별것 없다는 둥 자신의 대범함을 자랑하기 위해 일부러 영화를 격하하고 폄하하는 발언은 고의성이 다분하고 지극히 주관적이어서 남들에게 이 영화가 무서운지 안 무서운지 알려줄 수 있을 만큼 객관적인 평이 못 된다고 생각한다. 현재 대중은 극장판 시리즈를 통하여 주온에 대해 익히 알고 있고, 피칠갑의 카야코가 계단을 내려오는 클라이맥스 장면은 여러 매체에서 패러디되었기 때문에 영화가 나온 지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시점에서는 이 비디오판이 그다지 무섭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사다코와 카야코가 싸우는 마당에(사다코 대 카야코, 2016), 그렇게 카야코의 이미지가 막장으로 갈 때까지 간 상태이므로 주온의 공포 영화로서 지닌 생명력이 다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지금 보면 별로 무섭지 않게 느껴질 수 있지만 어떤 영화의 공포감을 논할 때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처음 접한 것임을 전제해야 하므로 이 비디오판은 당연히 꽤나 무섭다고 평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대다수가 턱 없는 칸나와 계단을 기어 내려오는 카야코가 제일 무서웠다고 말하는데,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장면은 토시오 편의 마지막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롱숏으로 집 외관이 보이는데 고바야시가 고양이 울음소리를 듣고 창밖을 내다본 이후에 나온 장면이므로 시청자의 시선은 1층에 있는 고바야시에게 쏠리게 된다. 몇 초 후 2층 창에 귀신이 스르륵 나타나는데, 롱 숏이고 시선이 고바야시에게 쏠려 있으므로 대다수가 이 귀신을 보지 못하고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턱 없는 칸나와 계단을 기어 내려오는 카야코는 징그러운 것이지 무서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놓고 보여주는 것은 무서움과 거리가 멀다. 공포는 무지(無知)에서 비롯한다. 몰라야 무서운 법이다. 알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따라서 영화에서 공포의 대상은 클로즈업과 미디엄숏이 아닌 롱숏으로 드러나야 한다. 롱숏은 시청자와 대상의 거리감을 멀게 놓으므로 시청자가 대상의 존재에 대해 알 수 없게끔 한다. 그렇게 무지의 상태에 빠뜨려 공포감을 준다. 그러나 클로즈업과 미디엄숏은 대상을 눈앞에 던져 놔 주므로 시청자가 탐색하고 파악할 수 있게끔 한다. 그렇게 이해의 과정을 유도하므로 공포감이 사라진다. 토시오 편의 이 마지막 장면은 롱숏이 유발하는 공포의 속성을 잘 활용했으므로 가장 무서운 장면으로 꼽을 만하다.


2. 줄거리

옴니버스 구성이므로 한 번 보고 줄거리를 파악하는 게 힘들다. 여러 번 본 뒤 이야기를 퍼즐처럼 끼워 맞춰야 한다. 이런 조각 같은 이야기 구성이 익숙치 않음과 난해함으로 시청자를 무지에 빠뜨리기 때문에 공포감이 배가되는 외부 효과를 낳는다.

전체 이야기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카야코와 토시오가 남편이자 아빠인 타케오에 의해 살해당한 후 학교 선생님 고바야시가 그들의 집에 방문한 뒤 최후를 맞는 시점(이 부분은 토시오 편과 카야코 편으로 양분돼 있고 그 둘 사이에 무라카미 가족의 이야기가 끼여 있다.). 카야코 가족 죽음 이후에 그 집에 이사 온 무라카미 가족이 차례로 죽어 나가는 시점. 무라카미 가족 이후에 그 집이 부동산 매물로 나와 중개업자 타츠야와 그의 여동생 쿄코가 빈 집을 살피는 시점.

귀신 카야코의 살해 원칙은 일단 집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여지없이 죽인다는 것이다. 그와 관련된 사람도 죽인다. 그래서 칸나와 함께 학교에서 토끼 밥을 주던 친구도 죽은 것이다. 츠요시의 여자 친구 미즈호가 교무실에서 토시오를 만나 최후를 맞이한 까닭은, 즉 그녀도 죽은 이유는 가정교사 유키가 츠요시의 여자 친구를 만난 적 있느냐고 칸나에게 묻는 장면에서 칸나가 츠요시가 미즈호를 집에 데려왔을 때 그녀(미즈호)를 봤다고 대답하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미즈호가 집에 발을 들여놓았음이 확실시된다. 카야코는 집에 온 사람은 모두 죽이므로 미즈호를 교무실까지 쫓아가 죽인 것이다. 그리고 설령 미즈호가 그 집을 방문하지 않았더라도 츠요시의 여자 친구이기 때문에, 무고한 주변 사람도 카야코에 의해 죽기 때문에 미즈호는 어떤 방법으로도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미즈호 편에 카야코가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토시오의 등장은 결국 (희생자의) 죽음을 뜻하므로 미즈호가 주온의 저주에 걸려 죽은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녀가 학교에서 주운 핸드폰은 고바야시의 것이 맞다. 고바야시가 죽은 후 꽤 시간이 흐른 시점에 뜬금없이 그게 학교에 버려져 있는 것은 귀신의 장난이 분명하다. 귀신이 아니면 그런 짓을 할 사람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미즈호가 그 핸드폰을 발견하고 주운 행위는 그녀도 핸드폰 소유자였던 고바야시처럼 죽게 될 것이라는 복선으로 작용한다.

카야코의 남편 타케오는 고바야시의 아내를 죽이고 태아를 꺼낸 뒤 공중전화 박스에서 고바야시에게 전화를 건다. 고바야시는 아내와 아이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망연자실한 뒤 카야코에게 살해당한다. 타케오는 태아가 든 가방을 이리저리 흔들고 던지다 쓰레기 더미에 버리는데 거기서 한 여자 귀신이 쓰레기 봉지를 뚫고 나타난다. 그 여자는 누구일까. 카야코일까, 아니면 고바야시의 아내일까. 주온의 설정은 원한을 품고 죽은 사람이 귀신이 되어 나타나 저주를 내린다는 것이므로 타케오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고바야시의 아내가 귀신이 되어 나타나 타케오에게 복수하는 것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쓰레기 봉지를 뚫고 나오는 여자 귀신이 고바야시의 아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렇게 따지면 카야코도 타케오에 의해 억울하게 죽었으니까 그 쓰레기 봉지 귀신이 카야코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무조건 고바야시의 아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필자는 쓰레기 봉지 귀신이 카야코라고 확신하는데 그 이유가 손톱 길이 때문이다.

귀신이 손가락으로 쓰레기 봉지를 뚫는 장면에서 그녀의 손톱은 꽤 길다. 만약 그 귀신이 고바야시의 아내가 맞다면 생전의 그녀의 손톱도 길어야 함이 맞다. 그녀의 손톱 길이를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 딱 하나 있는데, 그녀가 퇴근 후 집에 온 고바야시와 대화를 나누며 요거트를 떠먹는 장면을 보면 손톱이 짧고 정갈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쓰레기 봉지를 뚫는 손톱과 요거트를 떠먹는 손톱을 비교하면 둘의 차이가 확연하다. 절대 같은 손톱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카야코의 손톱 길이는 어떠한가.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찍은 장면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충 짐작할 수 있을 만한 장면은 존재한다. 카야코가 고바야시를 죽이려고 계단을 기어 내려올 때 손으로 계단 난간을 잡는데, 화질이 후져서 정확하게 판단하기 힘들지만 그 장면을 보면 손톱이 고바야시의 아내 것보다는 길어 보인다. 그러므로 쓰레기 봉지 귀신은 카야코라고 추론하는 것이 합당할 듯한데, 손톱 길이로 귀신의 정체를 가늠하는 것이 이 영화에서 가당하기나 한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옥에 티가 몇 개 있기 때문이다. 감독이 비디오판 두 편을 9일 만에 찍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 말이 사실임을 방증하듯이 영화에 감독의 실수라고 볼 수 있는 허점이 존재한다. 손톱 길이도 그 허점 중에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엄밀히 말하면 감독이 손톱 길이 따위에 신경 썼을 리 만무하다고 본다. 쓰레기 봉지 귀신이 고바야시의 아내라면 손톱을 짧게 해서 봉지를 뚫었어야 함이 옳고, 그 귀신이 카야코라면 카야코임을 알 수 있게 그녀의 긴 손톱을 이전에 미리 암시하거나 피칠갑의 손이 봉지를 뚫었어야 함이 옳다. 그런데 감독은 그런 것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짧은 손톱으로는 봉지를 뚫기 힘드니까 그냥 긴 손톱을 이용한 것 같다.

그래서 쓰레기 봉지 귀신이 카야코일 가능성이 높지만 확실히 누구인지 확증할 길이 없으므로 결론을 유보함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비디오판 2편을 보고 나서 그 귀신이 누구인지 알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카야코임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발견한 것이다.

귀신 카야코가 교실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노부유키(부동산 중개업자 타츠야의 아들)에게 다가가려고 유리창을 손바닥으로 한 번 치고 창문을 여는데, 그 장면에서 그녀의 손톱이 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카야코는 손톱이 긴 게 맞았던 것이다. 또, 노부유키가 집에서 혼자 영화를 보다 귀신의 장난에 놀라 티브이 화면 뒤로 물러날 때 등 뒤에서 손 하나가 올라오는데, 그 장면에서도 손톱이 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손이 카야코의 손이 맞느냐 하는 것이다. 그 집은 고바야시의 아내가 카야코의 남편 타케오에게 살해당한 곳이므로 그 손이 귀신이 된 고바야시 아내의 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인과관계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연속적 드라마 구성이 아니라 정보 제공에 인색하고 띄엄띄엄 전개되는 단편적 옴니버스 구성이라 줄거리에 빈 부분이 있다면, 즉 영화에 나오지 않은 부분은 시청자가 알아서 추론하든 상상해야 한다. 개방적 해석이 가능하므로 그 손이 누구의 것이냐 하는 문제에 유일한 답을 내릴 수 없다. 손톱 길이로 보아 카야코의 손이 확실하므로 그녀의 손이라고 해야 함이 옳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고바야시의 아내 손이라고 한다 해도 이야기 전개 논리상 큰 문제가 없기 때문에 그 손의 주인은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고바야시의 아내가 요구르트를 떠먹는 장면에서 그녀의 손톱이 짧다는 것이 드러났으므로 최대한 논리적인 해석을 위하여 그 손은, 노부유키의 등 뒤에서 올라온 긴 손톱의 손은 고바야시의 아내 손이 될 수 없다고 결론짓는 것이 합당하다. 따라서 그 손은 카야코의 손이고 그녀의 손톱이 길다는 것이 확실시되므로, 반면에 고바야시의 아내 손톱은 짧으므로 쓰레기 봉지를 뚫고 나온 귀신은 카야코가 맞는 것이다. 주온 소설에서도 타케오를 죽이는 것은 카야코이고(죽이는 방식은 다르지만), 주온 영화를 소개하는 여러 자료에서도 쓰레기 봉지 귀신을 카야코라고 해설하므로 그렇게 결론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3. 표현

오프닝 크레디트에 거미줄을 클로즈업한 장면이 나온다. 그 거미줄은 원혼의 저주를 상징한다. 끈적한 거미줄에 걸리면 헤어나지 못하듯이 카야코의 저주에 걸리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일단 걸리면 죽는 것이고, 도망치려고 하면 죽을 때까지 쫓아온다. 거미줄과 주온(呪怨)은 그러한 끝없는 성질을 지녔다.

화면 앞쪽에 장애물을 걸쳐 찍은 장면이 많다.

이러한 화면 구성은 공포 영화에서 단골로 쓰이는 기법인데, 앞쪽에 놓인 장애물은 시청자에게 심리적 압박감과 불편함을 주고 뒤쪽에 놓인 배경과 함께 인물을 가두는 밀폐 공간을 만들어 화면 속 인물들의 주체성과 능동성을 거세하고 그들을 수동적인 객체로 전락시킨다. 장애물 없이 깔끔하게 뚫린 화면으로 잡힌 인물은 화면 속 주인공답게 주체적이고 능동적이지만 장애물에 가려 답답하게 막힌 화면으로 잡힌 인물은 화면 속 여러 배경과 다를 바 없어 보여 객체적이고 수동적이다. 사진기로 어떤 인물을 찍는다고 가정해 보자. 장애물 없이 인물을 온전히 담아 냈다면 그것은 인물 사진이 된다. 반면에 장애물을 걸쳐 배경과 사물에 인물이 묻혀 있다면 그것은 사건 사진이 된다. 후자의 사진에서 인물은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는 단지 그 상황에 종속된 부품과 다름없다. 이러한 화면 구성 속 인물의 객체성과 수동성은 정해진 각본대로 귀신에게 희생당하는 등장인물의 처지와 운명을 나타내는 데 효과적이다. 그래서 장애물 놓인 화면 구성이 공포 영화에서 자주 쓰이는 것이다. 등장인물이 귀신을 무찌르는 액션 장르가 아니라 등장인물이 귀신에게 희생당하는 공포 장르이므로 인물의 주체성과 능동성을 부각하는 화면 구성은 공포 영화에 적합하지 않다. 또한 장애물 놓인 화면 구성은 마치 귀신이 엿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어 긴장감과 공포감을 배가하기도 한다. 영화에 나온 그런 화면은 귀신의 시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영화에서 창살 이미지는 전통적으로 구속과 억압을 상징한다. 창살이 감옥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카야코 편에서 고바야시가 화장실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창문에 달린 창살이 그를 가두고, 쿄코 편에서 쿄코가 무라카미 가족의 빈 집을 찾았을 때 타케오 이름 앞으로 온 편지를 확인하는 장면에서 계단 난간이 창살이 되어 그녀를 가둔다. 이 두 창살 이미지는 그들이 집에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에 저주에 걸렸음을, 저주에 갇혔음을 상징한다.

사선(斜線) 구도는 인물의 불안감과 상황의 긴장감을 나타낼 때 주로 쓰인다. 아무래도 구도가 비뚤어져 있으니 평범함과 거리가 멀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가정교사 유키가 칸나의 방에서 이상한 소리를 듣고 무서워서 방문을 열고 나갈 때 난데없이 집 안 불이 꺼져 있어서 놀라고 두려워하는데, 그때 화면의 사선 구도는 유키의 심리를 반영하고 귀신이 나올 것 같은 긴장된 상황을 표현한다. 미즈호가 교무실에 있다가 숫자 4가 여러 개 찍힌 착신 번호를 보고 무서워서 문을 열고 복도를 두리번거리는 장면에서도 사선 구도가 동일한 효과를 나타낸다. 미즈호의 불안한 심리. 그리고 귀신이 나올 것 같은 긴장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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