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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Sep 08. 2023

<제37화> 유비의 부인들

삼국지에서 유비의 부인은 대략 10여 명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감, 미, 손, 오부인 네 사람만이 역사책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유비의 아들로는 후주 유선 외에 노왕으로 봉해진 유영과 양왕으로 봉해진 유리 모두 3명으로 조조의 25명의 아들에 비하면 엄청나게 적은 편입니다. 이들은 유선과는 배다른 아우로 기록되어 있는데 정황상 이름이 알려진 기존의 4명의 부인이 아닌 유비의 다른 부인에게서 출생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습니다.      


먼저 유선의 어머니인 감부인은 서주 패현 사람으로 유비가 도겸의 위기를 돕고 조조에게 맞서기 위하여 패현에 주둔하던 시절 유비의 첩으로 들어갔습니다. 194년 당시에 이미 유비는 서른을 넘긴 나이로 분명 혼례를 치르고 본처가 있었을 것이 분명했지만 감부인은 묵묵히 유비의 첩으로 들어간 상황이었습니다. 유비는 고난의 시절을 보냈고 그 와중에 유비의 처첩들은 전란 속에서 목숨을 잃거나 헤어지고 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들도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감부인은 첩실이었지만 점점 두각을 나타내며 ‘본처’가 없는 유비의 집안에서 실질적인 안주인으로 자리 잡아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진의 왕가가 기록한 <습유기>에는 감부인이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어린 시절 점쟁이로부터 ‘부귀영화를 누릴 몸이니, 장차 궁궐의 주인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기록에는 유비는 감부인의 모습을 본 따 만든 ‘백옥 조각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얼마나 아꼈는지 낮에 관저에서 전략회의를 하거나 밤의 침실에서도 항상 손에 ‘옥미인’을 쥐고 놓을 줄을 몰랐다고 합니다. 그런 유비의 모습은 질투심을 유발하였고 주변의 여인들은 감부인은 물론 옥미인을 무척 미워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감부인은 유비를 찾아가 말했다고 합니다.

“동주 시대의 자한은 아름다운 옥을 보물로 여기지 않아서 <춘추>에서 극찬을 받았다고 합니다. 지금 천하가 어지러운데 중임을 맡으신 주군께서 하찮은 장난감에 정신이 팔려있는 것이 합당한 일이겠습니까? 앞으로 더 이상 한낱 조각상에 마음을 주지 마십시오!”

유비는 감부인의 충고를 듣고 들고 다니던 옥미인을 던져 버리고 대업을 위해 달려갔다고 합니다.      


감부인은 평생 첩의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형주에서 7년의 세월을 유비와 동고동락하였습니다. 이 기간 유비는 최고의 전력가인 제갈량을 얻었고 감부인은 유비의 아들 유선을 낳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감부인은 살아생전 감씨로 불리었지만 친자인 유선이 황제에 오르면서 대접이 달라졌습니다. 유비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222년 감부인은 ‘황은부인’으로 추대되었고 호북 강릉에 있던 그녀의 묘를 사천으로 이장하게 되었습니다. 호북에서 사천으로 이장하는 과정은 오나라와 촉이 싸우는 이릉대전이 겹쳐지면서 영구를 운반하는 일은 어렵기만 하였는데 그 도중에 유비가 백제성에서 병사하였습니다. 유선이 황제에 오르자 감부인은 제갈량의 제의로 ‘소열황후’로 추대되어 유비와 합장한 뒤 이를 종묘와 만천하에 알리게 되었습니다. 살아서는 평생 첩의 자리에 있었지만 죽어서 소열황후라는 본처의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감부인의 단짝인 미부인은 감부인과는 다르게 서주의 부유한 귀족 가문 출신입니다. 미부인의 오라버니인 미축은 서주 제일의 부호로 도겸의 수하였습니다. 유비가 여포의 공격을 받아 서주를 잃고 처자식도 포로로 내주고 곤경에 처해있을 때 미축은 재산을 털어서 유비를 지원하였고 자신의 노비와 전호 2,000명을 군대에 편입시켜 병력 지원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부인을 유비에게 시집보냈습니다. 당시의 정황상 미부인이 본처이고 감부인이 첩의 신분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미부인의 최후에 대해서는 정사에는 기록이 없고 언제 죽었는지조차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하지만 <삼국지연의>에서 나관중은 미부인의 최후를 아름답게 그립니다.     


미부인은 전란을 피해 아두를 품에 안고 산골짜기에 숨어 있다가 운 좋게도 자신을 구하러 온 조운을 만납니다. 말에서 내린 조운이 땅에 엎드려 절을 올리자 미부인은 크게 반색합니다.

“소첩, 조장군을 뵈옵니다. 아두는 다행히 무사합니다. 조장군께서는 아이의 부친이신 유공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유공께서는 반평생을 정처 없이 떠돌다가 지금 혈육이라고는 이 아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부디 일점혈육을 가엾게 여겨 아두가 아버지를 만날 수 있도록 보호해 주신다면 이 몸은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부인께서 고초를 겪게 된 것은 이 조운의 불찰입니다. 여러 말씀 마시고 어서 빨리 말에 오르십시오. 제가 목숨을 걸고 모시고 가겠습니다.”

“아니 될 말씀입니다! 겹겹이 에워싼 적진을 뚫고 가야 할 조장군께서 어찌 말도 없이 싸울 수 있겠습니까? 아두를 구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게다가 소첩은 중상을 입어 움직이지 못하니 장군께 짐만 될 것입니다.”

“적군의 함성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부디 부인께서는 빨리 말에 오르십시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리하면 조장군과 아두를 위험하게 할 것입니다.”

미부인은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품에 안고 있는 아두를 조운에게 건넸습니다. 


조운이 몇 번이나 미부인에게 말에 오를 것을 권했지만 미부인은 듣지 않았습니다. 적의 추격대 소리가 들리자 미부인은 조심스럽게 아두를 바닥에 내려놓더니 몸을 돌려 순식간에 말라버린 우물 속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미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 홀아비 신세가 된 유비 곁의 빈자리는 주유의 계략에 의하여 손권의 여동생인 손부인을 아내로 맞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적벽대전을 마친 후 형주를 되찾기 위한 계책에 골몰하던 주유는 유비의 처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손권의 여동생으로 유비를 유인하여 형주를 되찾고자 하였습니다. 209년 정월 유비는 대장 조운을 데리고 결혼을 위하여 오나라를 방문하였고 210년 정월 구정에 강변에서 제사를 지낸다는 핑계를 대고 무사히 형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211년 12월 유비가 원정길에 나선 틈을 노려 손권은 어머니가 위중하니 마지막 인사라도 드리라며 동오로 오라는 편지를 보내면서 외손자라도 보여드리자며 유선을 데리고 오라는 의중을 담았습니다. 손권의 의도는 장비와 조운에 의하여 무산되었고 오나라에 돌아온 후 오부인과 유비와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223년 이릉대전의 대패 이후 유비는 백제성에서 죽고 그 소식을 들은 오부인에 관하여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어차피 정략결혼이었고 결혼 생활도 2~3년에 불과했으므로 손부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부인이 오라비 손권에게 속아 강동으로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유비를 그리워했다는 것입니다. 유비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오부인은 강물에 뛰어들었고 후세 사람들은 그녀를 위로하기 위하여 ‘효희사’라는 묘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민간 전설에 의하면 손부인이 자결하자 유비의 시종 중 한 명인 요리사 오 씨가 손부인이 생전에 자신에게 베푼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평소 게를 좋아하던 손부인을 위하여 게살 만두를 정성스럽게 만들어 북고산으로 가서 제사를 지낸 뒤 강물에 만두를 던졌다는 것입니다. 그 후 동오에 정착한 오 씨가 진강에서 만둣국 가게를 차렸는데 ‘진양해황탕포’라는 요리 이름이 유명세를 떨쳤다는 것입니다.      

유비가 익주에서 유장을 몰아낸 다음 마지막 아내인 오부인과 혼인을 하였다고 합니다. 오부인은 본디 진류 사람으로 일찍 부모를 여의고 오라비인 오의와 의지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중원에 전란이 일어나자 오의는 익주로 피신하였고 아버지의 옛 친구인 한나라 종친인 유언에게 몸을 의탁했다고 합니다. 야심가였던 유언은 황제가 될 야망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오의의 여동생이 어린 시절 점쟁이로부터 천하제일의 귀인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소문을 접하고 자신의 아들인 유모의 짝으로 혼인시킨 것입니다. 유언의 입장에서는 ‘오 씨 집안에서 천하제일의 귀인이 난다고 하니 당장에 황후가 못되어도 왕후는 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운명을 타고난 오 씨를 며느리로 맞이한다면 언젠가는 황제로 불릴 수 있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을 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모는 얼마 후 병사하였고 유언의 아들 유장은 한중의 장로에게 위협을 느끼고 유비를 끌어들였습니다. 손부인은 강동으로 돌아갔고 혼자 지내던 유비는 수하들이 오 씨 부인이 ’ 천하제일 귀인‘이라며 혼인을 권하자 고민하고 있었는데 유비가 신임하는 법정이 

”춘추시대 진나라 문공 중이가 자신의 친조카 자어의 며느리를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그 관계를 따져본다면 주공과 유모의 관계는 중이와 자어보다도 먼 친척뻘입니다. 그러니 유모의 처를 주공의 아내로 맞이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 

법정의 말을 듣고 유비는 오 씨를 오부인으로 맞아들였습니다.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자 오부인은 왕후로 추대되었고 얼마 후 유비가 촉한의 황제에 오르자 오부인도 자연스레 황후가 되었습니다.      


223년 유비가 세상을 떠나자 유비는 혜릉에서 후주 유선의 생모인 감부인과 합장하였고 오 황후는 다시 한번 지아비 없이 살아야 했습니다. 유선으로부터 황태후로 추대된 오 씨는 245년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화려하지만 고독한 삶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삼국지에서 유비에 관한 기록인 촉서 <선주 전>에서는 ”선주는 책 읽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대신 말과 개, 음악을 좋아하고 아름다운 옷을 사랑했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돗자리 장수를 하면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미지와는 차이가 많이 납니다. 유비도 조조만큼은 아니었겠지만 조조만큼이나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지연의의 유비의 이미지와 정사 속의 이미지는 차이가 상당하게 존재함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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