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는 것과 빠르게 변하는 것들
30대 중반으로 갓 발을 내디딘 어느 날, N과 오랜만에 연남동에 놀러 가기로 했다. 10년쯤 전 N과 인연이 시작되던 때 함께 매일 누비던 동네이다. 대학을 졸업하며 그곳을 찾지 않은지 4~5년 정도 되었다.
“차를 가져왔다고?? 주차는 어떻게 하려고…?”
당연히 대중교통으로 올 줄 알았던 N이 차를 운전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어디 주차할지도 알아보지 않고 출발한 듯했다. 서로 약간의 짜증을 주고받으며 전화를 끊고 잠시 후 다시 전화가 왔다.
일단 학교에 주차를 하겠다고. 우리는 대학 수업에서 만난 캠퍼스 커플이다. 둘 다 친구들보다 조금 늦은 나이까지 대학생으로 남아있었고 나는 초과학기를 들을 때, N은 막 군대에서 복학한 25살에 처음 만났다. 아무튼 그 말을 듣고 급하게 네이버에 연세대 주차비를 검색했다. 다행히 졸업한 동문은 주말에 5시간 무료 주차권을 신청할 수 있다는 블로그 글을 발견했다.
N은 학교 정문에서 날 픽업해 연남동과 비교적 가까운 남문으로 들어섰다. 원래는 주차만 하고 바로 연남동으로 이동할 작정이었지만, 막상 차를 타고 학교로 들어서니 우리는 둘 다 익숙하지만 생경한 기분에 들뜨고 말았다. 항상 두 다리로 열심히 걸어 다니던 길을 직접 차를 운전해 지나며 N은 상기된 목소리로 외쳤다.
“내가 내 차를 몰고 학교에 와보다니!! “
신이 난 우리는 주차장을 지나쳐 대학시절 나의 주 활동지였던 위당관(문과대학 건물)까지 차를 몰았다. 땀 흘리며 열심히 걸어 다니던 그 길을 이렇게 빠르고 편하게 지나다니! 여유 있는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흠뻑 젖어들었다. (아직도 우리의 정신은 여전히 초등학생이다 ㅎㅎ)
위당관 앞에 주차하고 내린 N과 나는 그 주변을 잠시 걸었다. 우리가 각자 수업을 듣던 건물들과 짧은 공강 시간 점심을 사 먹던 장소, 수업이 끝나고 수많은 학생들과 함께 걷던 길목까지.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그 공간만은 전혀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다. 변하지 않는 공간 속에서 나 또한 다시 대학생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N과 나는 우리가 함께 나눈 무수한 추억과 감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듯한 변치 않는 대학 캠퍼스에 감사했다. 그 시절 우리가 나눴던 풋풋한 호감과 설렘이 다시 느껴졌다. 그동안 달라진 점은 주말이나 방학에도 낮에는 항상 열려있던 건물의 출입문이, 코로나 기간을 거치며 학생증을 찍어야 열리도록 변했다는 사실뿐인 듯했다.
다행히 학생증을 찍지 않아도 들어갈 수 있는 오래된 건물이 있었고(아주 옛날 가정대학 건물이었으며 금남의 구역이라고 학부 시절 교수님께 들었다.) 그곳에서 너무나 익숙한 이름의 교수님들의 연구실을 볼 수 있었다.
잠시의 추억 여행으로 말랑해진 마음을 안고 학교를 빠져나와 원래의 목적지였던 연남동으로 향했다. 학교에서 연남동까지 걷는 그 길도 너무나 변함이 없어 우린 점점 더 말랑해져 갔다.
연남동으로 향하며 저녁을 먹을 식당을 찾기 위해 네이버 지도를 켰다. 한창 연남동을 누비던 그 시절 저장해 둔 가게의 절반 이상이 이미 폐업한 상태였다.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익숙한 골목길에 들어섰을 때는 더욱 섭섭해졌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 골목길에 있는 모두가 참 앳된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누가 봐도 20대 초반의 얼굴들. 그 사실을 깨닫고 N과 나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둘 다 있어서는 안 되는 장소에 발을 디딘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어쩌면 이곳에서 가장 많이 변한 건 우리라는 생각을 애써 누르고 평이 좋은 떡볶이 집에서 저녁을 먹고, 후식까지 야무지게 먹은 후 산책을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큰 충격을 맞이했다. 좋아하는 친구들을 데려가던 연남동 최애(였던) 카페마저 전혀 다른 분위기의 베이커리 카페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연남 방앗간이라는 이름을 가진 카페였는데, 부자 할머니집 같은 포근한 분위기를 정말 좋아했었다. (물론 진짜 내 할머니 댁과는 전혀! 매우! 다르지만.)
학교에서 말랑해진 감성이 급격히 딱딱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연남동 상권의 유행은 정말 빠르게 변화하고 나는 이제 그 빠른 변화를 슬퍼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움과 씁쓸함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N에게 딱 일주일만 대학생 시절로 돌아가 그냥 그때의 일상을 살아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이전에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주식을 사고 코인을 사고 전공을 바꾸고 어쩌고 하는 거창하고 큰 상상을 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공간과 몇 달 만에 빠르게 변하는 공간을 돌아다니다 보니, 그냥 과거의 그 일상을 그대로 다시 지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