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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자수, 삶의 두 빛

그림은 그녀의 젊은 날이고,자수는 그녀의 깊은 날이다

by 최국만


아내의 그림을 다시 꺼내보았다.

아직 건강하던 시절, 퇴직 후 나와 함께 책을 읽고 공부하며 그린 세필화들이다.

그림 속에는 개와 늑대, 말, 여우, 토끼, 닭, 그리고 새들이 있다.

그 하나하나가 살아 숨 쉬는 듯, 눈빛에는 생명의 온기가 깃들어 있다.

붓 끝은 섬세하지만 결코 약하지 않았고, 색의 농담은 절제되어 있었으나 생명은 넘쳤다.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때의 아내는 세상을 관찰하며 ‘살아 있는 생명’을 그리고 있었다.

화필은 자유로웠고, 붓의 흐름에는 여유와 확신이 있었다.

자연을 향한 존경, 생명에 대한 사랑, 그리고 세상과 조화를 이루려는 그녀만의 철학이 담겨 있었다.

그림 속 동물들은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그녀가 세상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언어였다.


하지만 암 투병 이후, 그녀의 예술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붓을 놓고 바늘을 들었다.

실과 천 위에 한 땀 한 땀 삶을 새겨 넣는 자수는

그녀의 새로운 기도이자 수행이었다.

그림이 세상을 ‘그리던’ 예술이었다면, 자수는 세상과 ‘함께 숨 쉬는’ 예술이었다.

그녀의 바늘끝은 더 이상 형상을 만들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삶의 상처와 시간을 꿰매는 영혼의 손길이 되었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그림이 생의 활력이라면, 자수는 생의 통찰이다.

그림이 외부의 빛을 담는 창이었다면, 자수는 내면의 불빛을 켜는 등불이었다.

아내의 예술은 그렇게 진화했다.

젊고 건강할 때는 세상을 바라보며 표현했고,

병을 겪으며는 세상을 품으며 이해했다.

그녀는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켰고,

아픔을 통해 존재의 근원을 탐구했다.


아내는 늘 예술적 감각이 있었다.

생활에서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그녀는 언제나 조화와 균형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녀에게 예술은 화폭이나 실틀 위의 행위만이 아니었다.

삶 전체가 예술이었고,

그 예술은 사랑과 배려, 그리고 ‘느림의 철학’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녀는 빠름보다 느림을, 소유보다 존재를,

완성보다 과정을 더 귀하게 여겼다.

그 철학이 그림의 부드러운 선으로, 자수의 섬세한 결로 스며들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녀의 작품을 볼 때마다 느낀다.

이건 단순한 그림이 아니고, 단순한 자수도 아니다.

이건 살아온 시간의 기록이자, 살아가는 마음의 언어다.


나는 기록으로 세상을 이해했고,

그녀는 예술로 세상을 품었다.

나의 글이 세상의 어둠을 드러내 빛을 찾는 일이라면,

그녀의 예술은 고통 속에서도 빛을 꿰매어 내는 일이다.

서로 다른 길 같지만, 결국 우리는 같은 곳을 향해 걸어왔다.

그곳은 ‘사람을 향한 사랑’, 그리고 ‘삶을 향한 존경’이다.


이제 아내의 자수와 그림은

우리의 지난 세월과 함께 하나의 예술로 남았다.

그림은 생의 찬미로, 자수는 생의 성찰로,

두 빛은 서로를 비추며 내 마음 속에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그녀의 그림은 세상의 빛을 담았고,

그녀의 자수는 내 마음의 어둠을 덮어주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녀의 작품 앞에 서면,

한 사람의 예술가이자 철학자로,

그리고 나의 인생의 동반자로서의 그녀를 다시 만난다.


그림은 그녀의 젊은 날이고,

자수는 그녀의 깊은 날이다.

그 두 빛이 만나 우리 삶을 비춘다.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 사랑해온,

그리고 앞으로도 사랑할 한 사람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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