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PD로 살았던 30년의 겨울, 그리고 잊히지 않는 한 할머니
날씨가 추워졌다.
입동도 지나니 바람이 확실히 달라졌다.
이제 곧 긴 겨울이 올 것이다.
방송국을 퇴직한 지도 벌써 7년.
하지만 겨울이 오기 전의 이 찬 공기를 느끼면
나는 아직도 현장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수없이 달려갔던 그 겨울의 기억들이
오래된 필름처럼 한 장면씩 다시 떠오른다.
산골짜기, 강, 바다, 사고 현장,
홀로 사는 노인들,
학대당하던 아이들,
배를 곯던 장애인들,
겨울 숲에서 죽어가던 야생동물까지.
시사프로그램 PD에게는
아이템의 경계가 없다.
문제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야 한다.
누군가가 억울하고 고통받는다면
그것이 곧 우리의 현장이다.
나는 물도 불도 가리지 않았다.
거기 사람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뛰어갔다.
그래서 30년 동안 지켜온 단 하나의 원칙이 있었다.
‘억울한 사람은 반드시 도와야 한다.’
그 원칙 하나로
나는 겨울을 버텨왔다.
그런데 겨울이면 유독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다
수많은 얼굴 중에서도,
겨울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바로 폐지를 줍던 한 할머니다.
농촌에서 홀로 사는 어르신들 대부분은
형편이 좋지 않다.
지금도 연탄을 아끼려고
하루에 한 장, 많아야 두 장을 떼며 살아간다.
연탄의 냄새는 가난의 냄새였고,
겨울의 냉기는 늘 어르신들의 삶을 먼저 파고들었다.
나는 당시 ‘고독사’ 특집을 준비하고 있었다.
원인을 찾고, 대안을 찾고,
정말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는 해결책이 있는지
고민하던 시기였다.
후배 PD는 일본의 사례를 취재했고,
나는 국내의 현장을 책임졌다.
옥천 시내를 지나던 중,
차창 밖으로 한 장면이 번개처럼 내 마음을 때렸다.
머리를 해진 벙거지 모자로 눌러쓰고
허리는 굽었고
키는 리어카보다 더 작아 보이던 할머니 한 분이
폐지를 가득 싣고
얼어붙은 도로를 힘겹게 끌고 가고 있었다.
바람은 살을 에고,
길은 미끄러웠고,
그날의 공기는 마치
세상이 한 사람을 외면하는 냉기처럼 느껴졌다.
나는 견딜 수 없었다.
차를 세우고
와이어리스 마이크를 차고
카메라 감독에게 말했다.
“내가 내리는 순간부터…
그냥 이 장면 전체를 찍어줘.”
나는 PD가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의 인간으로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할머니…
이 추운 날,
아침부터 이렇게 하시면 너무 힘드시잖아요.
해 뜨면 좀 따뜻해지면… 그때 나오지 왜 이렇게 일찍 나와요?”
할머니는 손수레에 기대어
작게 숨을 골랐다가 말했다.
“해 뜨면 남들이 다 주워가요.
나는 이거라도 해야 오늘 저녁에 국이라도 끓이지요.”
그 한마디가
그날의 찬 바람보다
내 심장을 더 세게 얼렸다.
할머니는
가난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살아야 해서 폐지를 주웠다.
사람들 틈에서 외로워서가 아니라
살아 있으려고 길 위에 나왔다.
겨울의 차가움보다
노인의 삶이 더 차갑다는 것을
나는 그 할머니의 한 문장에서 배웠다.
할머니의 뒷모습이 겨울을 만든다
그날 할머니의 뒷모습은
리어카 뒤로 작게 흔들리며
얼어붙은 도로 위를 걸어갔다.
작지만 강한 걸음.
추웠지만 꺾이지 않은 걸음.
나는 오래도록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촬영을 마치고도
귀가하는 길 내내
나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할머니…
죄송합니다.
나라가, 사회가,
그리고… 방송하는 저조차
지금까지 당신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겨울이면, 나는 항상 그 할머니를 떠올린다
입동의 바람이 불 때마다
아침 공기가 유독 차가울 때마다
창문이 하얗게 서리 낄 때마다
나는 그 할머니를 떠올린다.
그의 삶을 떠올리면
내가 달려갔던 수많은 현장들이
새로운 의미로 되살아난다.
그 할머니는
내 30년 시사 PD 인생이
왜 필요한지,
왜 달려야 했는지,
왜 한 사람의 인생을 지켜야 하는지
조용히 가르쳐준 스승 같은 존재였다.
겨울은, 결국 한 사람의 얼굴로 완성된다
퇴직하고 괴산에서 사는 지금은
눈이 내리면 아내와 산책하고
가끔은 따뜻한 차를 마시며
조용히 살아가는 시간을 즐기지만
겨울의 첫 찬바람이 불면
나는 가장 먼저
그 할머니를 떠올린다.
한 사람이 이렇게 오래 남는다는 건
그분이 남긴 삶의 흔적이
얼마나 무겁고 깊었는지를 말해준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생각한다.
내가 그때 달려간 일이
그 할머니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한 겨울이 되었기를.
겨울이 오면 나는 한 사람을 떠올린다.
폐지를 줍던 작은 할머니.
그분의 삶이 내 30년의 방송 인생과
지금의 겨울까지 따라온다.
이 글은 그 잊히지 않는 얼굴에 대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