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가는 어디서부터 아이디어를 얻는가? >
작가(또는 예술가)는 도대체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으며 어떤 소재를 가지고 글을 쓰는가? 나는 이것에 대해서 무척이나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작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상념들은 작가의 자아에서 야기된 것인가. 아니면 외부의 특정 사물을 볼 때 그것에 대한 이미지가 상념으로 발현되는 것일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두 가지 방법 모두 아이디어를 얻는 데 사용된다고 본다. 작가는 작가 내면의 무의식으로부터 생각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외부의 새로운 대상을 보고 앎으로써 새로운 상념을 작가 내면으로 갖고 오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가끔씩 나 스스로 떠올린 소재나 아이디어의 실체를 깨달을 때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어느 순간 나 스스로 갖게 된 영감이 다른 작가들의 책에서 거의 똑같이 등장할 때에 그렇다. 나는 그 작가와 일면식도 없으며 서로 대화를 해본 적 없는데 텔레파시처럼 나와 그 작가는 소스는 알 수 없지만 일종의 동일한 영감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우연의 일치는 나로 하여금 뮤즈의 존재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분명 작가들은 완벽히 일치하진 않지만 동일한 뮤즈를 섬기며 살아가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뮤즈는 오직 한 명이다. 뮤즈는 공통의 지식을 평등하게 분배한다. 사실 평등하진 않다. 왜냐하면 모든 작가들이 그 특정 영감을 얻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작가라는 직업은 일부 신비의 요소를 자신의 삶 속에 허용하며 살아간다. 시대는 다르지만 작가들은 특정 대상에 대한 동일한 영감을 품고 그것을 글로 옮긴다. 나는 고전을 썼던 옛 작가들과 시대에 이름을 남겼던 작가들의 수준에 한참 못 미치지만 가끔씩 그들의 책을 읽으면서 놀랄 때가 있다. 부족한 ‘나’라도 여러분께서 이해해주신다면 이에 대한 몇 가지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첫 번째는 '명상'에 관해서다. 내가 쓰는 소설들은 다른 작가들의 플랏에 비해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편이다. 아무래도 소설이라는 장르에 철학적인 주제를 삽입하려고 하다 보니 우리가 보는 가시적인 외부세계보다는 인물 내면에 펼쳐지는 심리적·정서적 변화에 더 신경을 쓰게 된다. 개인적으로 사람의 성격이나 생각이 변화하는 일은 그리 흔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런 내면의 변화가 일어났다면 그 사건은 현실세계에서 전쟁이 발발하는 것만큼 큰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로 이 시점! 그 인간이 변화하게 된 시점! 에 집중하며 글을 쓴다. 보통 인물의 심리적 변화를 가져다주는 계기는 인물이 자기 자신에 대한 지속적인 성찰을 거듭할 때다. 이런 면에서 소설을 쓰거나 스토리텔링을 할 때에 명상만큼 다루기 좋은 주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떤 SF 소설을 쓰면서 우주 속에 떠다니는 고독한 인물을 표현하고자 했고, 그 인물이 습관적으로 명상을 즐기는 쪽으로 플랏을 이어갔다. 소설 속 인물은 명상을 통해 우주 속 한정된 공간을 벗어나 광활한 세계를 꿈꾸며 그곳으로부터 평안과 위안을 얻는다. 그런데 저자 입장에서 소설 속 인물의 명상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도 눈을 감고 잠시 생각을 가담으면 내면에서부터 오만 가지 잡다한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 생각들은 서로 전혀 관련이 없을 수도 있고 있을 수도 있다. 또는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일 수도 있다. 그 생각들은 매우 괴기할 수도 있고 잔인할 수도 있으며 광기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명상의 이미지를 매우 정연한 글로 - 신문기사나 인문학 서적들의 필체 - 표현한다는 것은 인간의 심리를 1차원적이며 매우 동물적인 것으로 대신하는 모욕이나 다름없다. 그나마 문학적인 필체가 명상의 날 것 그대로를 조금이나마 잘 반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명상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하나의 예술행위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현실세계를 완벽히 구현해내는 것이 아니라 인상주의나 큐비즘 화가처럼 대상의 형식을 파괴하는 대신 대상의 본질을 더 자세히 기록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명상 속의 대상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도, 그 대상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파악할 수 없지만 그 대상 자체, 날 것 그대로 받아들인다. 명상 속의 대상이 뿜어내는 무드와 아우라를 감지하고 그것이 가리키는 심상이나 사상을 추측한다. 진리가 오직 구체적인 것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쩌면 그 사람은 아직 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진리가 반드시 애매모호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인간의 마음을 전부 알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는 것처럼. 그런데 신기한 점은 진리의 이러한 애매모호함 때문에 우리는 예전보다 더 호기심을 갖고 진리를 탐색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어느 날 나는 우연히 《블루 벨벳》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고, 그 순간부터 데이비드 린치 감독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의 영화에서는 현실과 꿈을 쉽게 분간할 수 없다. 그의 영화는 절대 관객들에게 구체적인 메시지를 주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의 변칙과 애매모호함 가운데로 관객을 끌어당겨 영화를 해석하게 만든다. 극 중 인물들은 도대체 상식적인 선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무엇인가 인물들 간의 어색한 구어체와 연기는 관객들을 명상 속으로 집어넣는다. - 관객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지만 이런 부류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쪽이면 영화를 보면서 곧바로 명상이 아니라 단잠에 빠지게 될 것이다.(웃음)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단점을 꼽으라면 영화에 대해 호불호가 갈리고 영화가 매우 어렵고 지루할 수 있다는 점이다. - 데이비드 린치 감독은 매일 초월명상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영화를 제작하기에 앞서 초월명상을 통해 아이디어를 얻고 이를 기반으로 영화를 제작한다고 밝혔다. 그는 명상을 통해 아이디어를 얻는 과정이 마치 낚시를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우리의 깊은 내면에는 무의식이 존재하고 그곳에는 수많은 심상과 영감들이 떠다니며 명상을 통해 우리는 그 깊은 무의식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 과학자들은 이러한 깊은 무의식의 공간이 과학에서 일컫는 통일장 개념이라고 말한다. 데이비드 린치는 이 초월명상의 효과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여러 명상협회를 조직하고 있다. 그는 이 초월명상의 도입이 세계평화에게 기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물론 명상에 대한 나의 생각과 린치 감독의 생각이 완전히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소설을 통해서 일상 중에 개인적인 성찰의 시간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꼭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그리고 미래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명상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나에게는 명상이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대상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미술관이나 전시회에서 명상을 한다. 꼭 눈을 감지 않더라고 마음에 드는 예술작품이 있다면 5~10분가량 그 앞에 서서 작품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다. 나는 이 방법이 단순히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행위와는 조금 다른 것이라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마음에 드는 작품을 찾게 되더라도 대체로 1~2분 이상 감상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 관점에서 예술작품을 깊이 생각한다 라는 것은 첫 번째로 그 예술작품을 정말로 좋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정말 어떤 예술작품에 매혹을 느끼게 되면 그 작품 안에 담겨 있는 심상과 사상이 내 마음 깊숙이 들어와 모든 것을 해부하고 해체한다. 그리고 내면의 스파크 안에서 나는 그 작품과 대화를 하고 깊은 명상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작품은 나를 나 자신의 과거로 데려가기도 하고 어떤 천재성의 영역으로 나를 인도하기도 한다. 천재성의 영역이란 수많은 재능들이 숨 쉬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사상의 아름다운 힘이 폭로된다. 긴 역사를 통해서 사상들이 어떻게 인간들을 매혹했고 인간들과 어떻게 교감해왔는지를 느끼게 해 준다. 니힐리즘이 어떻게 수많은 독일인들을 호도했는지. 사람들이 왜 그렇게 괴테의 슬픈 소설에 열광했는지.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각성 운동이 복음주의로 이어질 때까지. 그래서 나는 명상이란 사상과 인간 사이의 뜨거운 교감을 느끼는 행위라고 말해두고 싶다.
두 번째는 ‘곰’에 관한 주제에 대해서이다. 나는 소설을 쓰면서 동물 곰을 등장시킨 적이 있다. 잘 모르겠지만 나는 곰이라는 동물을 은연중에 많이 의식해왔던 것 같다. 많은 동물 중에서도 곰은 사람과 친밀감을 쌓을 수 있다는 점과 맹수의 본능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물론 다른 맹수들도 이와 같은 이중성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겠지만) 곰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동물이지만 나에게는 곰이 숲 속의 전설처럼 느껴진다. 인간의 유아幼兒성과 자연의 야생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왠지 야생에서 곰을 실제로 맞닥뜨리게 되면 쓰다듬어 주고 싶기도 하겠지만 동시에 매우 큰 위협감을 느낄 것 같다.(나는 실제 야생에서 곰을 마주한 적은 없지만) 나는 니스와 이안이라는 두 소녀를 소설 속 인물로 설정하고 숲 속에서 곰을 맞닥뜨리는 상황을 묘사해 나갔다. - 내가 말한 소설이란 최근 습작하고 있는 소설을 말한다. 아까 말한 명상에 관한 스토리도 이 소설에 함께 담겨있다. - 니스라는 소녀는 곰을 본 이후에 두려움에 떨었지만 이안이라는 소녀는 오히려 곰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관찰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곰에 대해 갖고 있는 인상은 모두 각자 다르겠지만, 만약 실제로 야생에서 곰을 마주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특정 대상을 머리로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너무나 쉽게 그 대상을 모두 다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다.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곰은 여전히 미스터리 한 존재이다. 우리는 실제로 곰이 두 발로 직립보행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TV로는 본 적이 있겠지만) 그리고 곰이 먹이사냥을 위해 강렬하게 뛰어가는 모습도 본 적이 없다. - 나는 다만 《레버넌트》라는 영화를 통해서 곰이 먹이를 어떻게 사냥하는지 본 적이 있다. 영화에서의 곰은 주인공을 단번에 죽이지 않는다. 발톱으로 수차례 할큄으로써 상대방이 쥐 죽은 듯이 복종하는 자세를 보일 때까지 기다린다. - TV를 통해 곰을 보거나 에버랜드 사파리 체험에서 차 문 밖으로 곰을 본 적은 있겠지만 그것으로 실제로 곰을 느끼고 체험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실제로 곰을 보고 느낀다는 것은 산이나 깊은 숲 속에서 야생의 곰을 마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내가 그런 상황에 있다면 그런 체험은 분명 이전에 안락한 소파나 차 안에서 경험한 것들과 매우 다른 것일 것이다. 나는 이 점에 대해서 강한 확신이 든다. 야생의 곰은 분명 우리가 모르는 기이함과 신비로움을 내뿜을 것이다. 사람을 향한 두 가지 본능, 애정과 사냥의 모습을 모두 드러낼 것이다. 그 모습이 울창한 숲이라는 배경과 조화를 이룬다면 곰은 단순한 생명이 아닌 토테미즘의 숭배를 받는 성스런 존재로 변신한다.
곰의 이러한 신비한 기운은 내가 야생 곰을 실제로 본 적이 없음에도 상상력을 통해 현실을 사는 나의 오감에 전달된다. 그래서 나는 그런 곰의 야생성을 엄격한 아버지의 이미지와 연결 짓기도 한다. 혹은 반대로 아까 말했듯이 니스와 이안 같은 어린 소녀들과 놀이를 할 수 있는 유아적인 동물로 가정하기도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곰의 기이한 육체 구조를 보면서 어느새 진행된 진화론의 신비라든지 창조론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기도 한다. 누구라도 곰을 만든 존재가 있다면 참 위대한 천재라고 불리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곰을 관찰함으로써 곰이라는 동물에게 인간과 같은 의식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는 토론에서부터 심지어 신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논의를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전에 말했다시피 이 모든 가정은 우리가 실제로 야생 곰을 마주했을 때 가능하다.
그러니까 곰에 대한 나의 인상이 꽤나 설득력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어느 한 책을 읽는 중에서였다. 그 책은 바로 윌리엄 포크너의 『곰』이라는 소설이다. 소설 속 곰의 이름은 올드벤이다. 주인공 소년은 원주민 샘을 따라 올드벤을 목격하게 된다. 소설 속에서 소년과 샘과 사냥꾼들은 올드벤을 결국 죽인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원주민 샘은 올드벤이 죽자 가슴이 철컹 내려앉았고 얼마 있지 않다가 세상을 뜬다. 샘에게 있어서 올드벤은 자신이 자라온 숲의 상징이자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다. 소년은 성장하면서 아직도 올드벤을 기억하고 있다. 올드벤의 잔상들이 소년의 기억 가운데 머물며 성장의 동력으로 작용한다.
나는 왜 그 소설(포크너의 소설이 아닌 나의 소설 원고)을 쓰면서 곰을 소재로 삼았을까? 확신할 수 없겠지만 과거에 곰을 본 체험들이 나의 무의식에 떠돌며 나를 괴롭히지는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현실에서 누군가 나를 위협할 때에 그는 곧 곰의 그림자로 현현顯現하여 나의 눈에 가 박힌다. 나는 현실세계에서 나를 위협하는 그 사람으로 인해서 두려움을 느끼지만 사실 더 큰 두려움은 내면에 남겨진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자 그것의 잔상이다. 그는 내면의 곰으로 현현하여 나를 괴롭힌다.
‘명상’과 ‘곰’에 관한 문학적 주제에 대해 나는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누군가는 서로 다른 시대에 나타난 이 동일한 영감에 대해 사소한 일이라고 짚어 넘길 수도 있겠으나 나는 결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 우연의 신비에 대해서 좀 더 파고들고 싶었다. 작가가 소설에 옮기는 모든 아이디어와 소재들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파생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나의 결론은 이렇다. 나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자연(nature)에서부터 그들의 아이디어를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여기서의 자연은 단지 나무와 숲 같은 생태계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세계를 의미한다. 만약 여러분들이 이 가시적인 세계 이외에 또 다른 세계가 믿고 있다면 나는 그 세계도 우리의 논의에 포함시키고 싶다. 여러분들이 말하는 또 다른 세계란 사후세계나 영적 세계와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앞으로는 지금까지 말하는 모든 세계들 - 보이는 세계든지 보이지 않는 세계든지 - 을 자연이라는 단어로 함축해서 표현하겠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이 자연을 절대적이며 독립적인 개체로 가정할 것이다. 자연은 우리의 외부에 있다. 하지만 나는 자연을 방금 우리가 말했던 모든 세계들 - 보이는 세계들과 보이지 않는 세계들(사후세계나 영적 세계)을 모두 포함해서 - 과는 조금 다른 것으로 가정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든 세계들을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 세계들을 어떤 소중한 객체라고 여기진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무와 풀, 빌딩과 하늘 같은 존재들을 보고 경험할 수 있지만 그것들을 완전한 객체로 생각하진 않는다. 우리는 외부세계를 신성화하기는커녕 매우 하찮게 여기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나 인간의 문명, 시간과 공간 같은 개념들을 우리가 어떻게 무시할 수 있을까?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인간의 존재는 그와 같은 거시적 개념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시간을 되돌릴 능력이 없을뿐더러 유령처럼 사라져 다른 데로 움직이는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공간의 힘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다. 외부세계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를 돌아볼 때 사실 우리는 조금이나마 외부세계를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다. 숭배까지는 아니더라도 외부세계를 인간과 다른 독립적인 개체로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소시민인 우리는 항상 이 외부세계를 무시하고 경멸한다. 마치 외부세계가 인간 아래에 하수처럼 존재한다고 착각한다. 이런 우리의 착각 탓에 굳이 자연이란 말을 넣어서 외부세계와 분리해서 보자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외부세계를 조금 존중할 수 있다면 이제 외부세계를 자연으로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우리가 외부세계를 존중했다면 자연이란 말도 필요 없겠지만.
이렇게 자연을 독립적인 개체로 가정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영감(inspiration)의 의미를 올바로 정의할 수 있다. 작가가 얻는 영감이든지 보통의 사람이 얻는 영감이든지 그것은 완벽히 외부적인 어떤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영감을 자기 스스로 생성해낸다면 그것은 진정한 영감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개인의 주관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당하다. 만약 여러분이 영감이 외부에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어떤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면 우리에게 영감을 전달하는 근원 또한 외부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외부적인 어떤 세계로부터 영감을 얻으며 그 영감이란 이전의 나의 내부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 또는 창조적 요소이다.
사실 작가들은 소설의 모든 내용과 소재들을 어느 한순간 번뜩 떠올리지만 그 모든 영감들은 자연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작가들은 자신의 소설들이 혁신적이며 창조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자연은 이미 그 소설들의 내용들을 알고 있으며 그 소설들이 전혀 창조적이지 않다고 반문한다. 자연은 그 소설의 근원이 원래 나에게 있었다고 스스로를 지목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ⅰ라는 순간에 자연으로부터 a라는 영감을 얻었고 ⅱ라는 순간에 다시 자연으로부터 b라는 영감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ⅲ의 순간에 a와 b의 영감들을 결합하여 c라는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c라는 창조적인 아이디어는 완벽히 외부적인 개입을 배제한 상태에서 자신의 내부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자. 누군가의 사고를 통해서 창조된 c라는 아이디어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굉장히 투박한 것으로 여겨질 날이 오게 된다. 고대 호모 사피엔스들은 나무와 돌을 이용해서 불을 지폈지만 현대에 들어서 나무와 돌은 집이나 빌딩을 건축하는 데 쓰이고 있다. 옛날 고대 호모 사피엔스들은 나무와 돌을 결합하여 불을 피우는 기술을 엄청난 혁신이라고 자부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옆에 누군가 나무와 돌을 가져와 불을 피우는 모습을 보면 아마 우리는 그를 제정신이 아니라고 조롱하지 않을까.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와 작가들이 아무리 혁신적인 영감을 얻었다 하더라도 몇 세대 이후의 우리 후손들은 그 영감이라고 불렀던 모든 것들을 쓴웃음을 지으며 바라볼 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 영감은 이미 낡았기 때문이다. 서울 한가운데 서 있는 롯데타워 마천루도 언젠가는 구식에 불과한 어떤 것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시간은 그저 영감을 비웃는다.
나의 생각이 모두 틀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보통의 사람들은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얻고 그 아이디어를 통해 회사나 직장에 혁신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특히 작가들은 보통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색을 한다는 점에서 자연으로부터 더 많은 영감을 얻게 된다. 뛰어난 작가일수록 더 많은 영감을 외부로부터 느끼고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며 그것을 갖고 스토리를 써나간다. 나는 이 자연이 한계가 없는 무한한 영감의 근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작가들은 이 무한한 벽에 기대어 생각들과 영감들을 훔친다. 화학의 이온들이 무한대로 치환 반응을 일으키는 것처럼 말이다.
여러분들 중 어떤 분들은 만약 당신이 말한 것이 모두 옳다면 예술가들의 행위는 모두 무의미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맞다. 자연에 관한 나의 주장대로라면 예술가들의 영감은 모두 헛되고 무의미하다. 그 모든 영감들은 이미 자연에서 한 번 존재했던 것이기에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자연을 우리가 사는 이 세계만큼 인식하며 살아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 세계 자체이며 자연은 후後 순위에 있다. - 아까 앞에서 외부세계에 대한 인간의 존중이 결여되어 있기에 우리가 자연이란 단어를 쓰기로 했다는 것을 기억해주시라 - 또한 반대로 내가 자연의 존재를 알고 있으며 더 많이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기분 나빠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자연을 더 소중하게 여길수록 우리는 우리가 얻은 영감들을 복제품 따위로 여길 필요가 점점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냥 자연이 나에게 영감을 전달해주었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영감은 이 현실세계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발견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자연은 인간이 인간 마음대로 영감을 사용했다고 해서 절대 인간을 처벌하거나 꾸짖지 않는다. 자연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 과연 지진과 폭풍을 악한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자연의 선함과 악함에 대해선 이미 많은 철학자들이 언급한 바 있다. -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 속에서 얻은 영감을 당당히 세상의 첫 번째 것이라고 여겨도 좋을 것이다.
영감에 대해서 한 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나는 영감이 세대를 뛰어넘는 어떤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감의 이런 시대 초월적인 특성이야말로 우리가 영감을 지루해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다.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의 쥰세이는 라파엘로의 성모상을 보며 감탄한다. 이탈리아에서 복원가로 활동하는 쥰세이는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피티 궁 안에 파라티나 미술관을 들른다. 거기서 라파엘로의 <대공의 성모자>를 보며 감탄한다. 이유는 무엇일까? 라파엘로가 그린 성모는 한결같이 온화하고 유려한 아름다움이 넘쳐흐르기 때문이다. 다른 르네상스 화가들이 그린 수많은 성모와는 다른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라파엘로는 다른 화가들이 갖고 있던 영감들보다 더 뛰어난 영감으로 성모상을 그렸다. 라파엘로의 재능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었으며 그 신비로운 영감을 세세하게 그림으로 묘사했다. 라파엘로는 다른 화가들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고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이 절대 과거에만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사물의 본질을 관통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 세대를 앞서는 어떤 기발한 아이디어를 얻게 될 것이다. 자연에게 미래라는 시제가 존재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획기적인 영감은 미래를 관통하면서 생성된다. 윌리엄 포크너는 내가 소설 속 곰을 깊이 생각하기 이전부터 이미 곰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었다. 이승만 씨는 이미 일본의 제국주의를 향한 동경을 알아차리고 있었기에 태평양 전쟁의 서막을 예상할 수 있었다. 획기적인 영감은 뛰어난 안목과 재능을 바탕으로 얻어진다. 특정 사물의 본질에 대한 안목이 너무나 탁월했기에 그 사물의 미래 행동까지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영감은 사람의 영혼의 성격이나 사물의 특성을 완전히 이해하지 않으면 얻기 어렵다. 소설가처럼 상상력이 뛰어나기만 해서도 안 되고 수학자의 기계적인 논리성만으로도 얻기 힘들다. 분석력과 상상력, 두 가지가 모두 합쳐질 때 시너지 효과가 일어날 수 있으며 이때 비로소 대상을 관통할 수 있는 영감을 얻을 수 있다. 분명한 건 아무나 이러한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탁월한 영감은 세대를 거듭해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에서 영감의 시대초월적인(transcendental) 특성을 느낄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는 몇 세대가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 유효하다.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이라는 기존의 이론을 무너뜨리고 물질의 중력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질 수 있다는 획기적인 영감. 나는 아직도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대해 의아하면서도 경이롭게 느껴진다. 그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의 이론 덕분에 우주가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우주라는 곳은 매우 불안정하며 변덕이 심한 곳이라는 것도. 그래서 우주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게 되고 왠지 모르게 친근하기까지 하다. 나는 이제야 곰에 대한 영감을 얻게 되었지만 아직도 내 주변에는 곰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난 그들에게 이 영감을 전달해주고 싶다.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포크너와 초월적인 대화를 나눠 보고 싶다. 나에게 주어진 이 영감이 과거의 당신에게도 전달되었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