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마키 Jul 22. 2022

나는 엑스트라 인가 아닌가

저마다의 소우주

어느덧 7월 말,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간다. 세상에 마상에. 

권태로운 일상을 '간신히' 견뎌내면서 하릴없는 고립에 빠지게 될 때가 (많이) 있다. 이럴 때마다 힘없이 무너지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친구와 다양한 주제로 얘기하다가 '네가 심약해서 그래'라고 말했다. 맞아. 가끔가다 바다와 우물에 빠져버리는 나는 강하지 않고 심약하다. 나에게 있어 내가 기댈 수 있는 기둥 같은 존재는 무얼까. 스스로를 향한 증오와 미움 같은 - 과장하면 환멸까지 - 이런 자조적인 마음을 재활할 수 있는 건 뭘까. 고작 디저트와 쿠키? 고작이라고 하기엔 먹을 때마다 미소 짓고 하하 웃고 많이 행복해한다. 간식을 좋아하는 내게 과자를 건네는 사람이 있다면 금방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심약'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어릴 때가 생각난다. 나 스스로도 생각하기에 나는 약한데 어렸을 때 친구들은 왜 나를 강하게 봤을까. 내가 당시 입시에만 매진해서 그랬나 신기하다. '너 새침데기에 내가 말 걸려고 하면 너는 말 걸지 말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어' 또는 '그때 너 약간 4가지'라고 말한 이성친구들이 몇 있다. 친한 동성친구들에겐 장난을 치기도 했는데 이성친구들에겐 과한 철벽을 쳤나 보다.

나는 선을 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어느 순간 누구에게나 다 선을 넘어버리며 마음을 주게 된다. 그런 말을 한 친구들이어도 뒤에 '네가 그런 줄 알았지만 지금 보니 아니어서 좋네'라고만 말해주거나 (   ) 여백의 괄호 느낌이라도 들었다면 상처받지 않고 좋을 텐데. '앞으로 너랑 친해지고 싶다, 알고 싶다, 이런 네가 좋다'라고 하면 인간적인 호감으로 나는 마음을 다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는 친구들이 다행히? 도 없어서, 마음을 다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나는 본투비 초등학생 때부터 이랬고 성격이 그렇게 변하지도 않았다. 나랑 친해질 노력조차 하지도 않았던 친구들에게 그런 과거 얘기를 들을 때면 겉으론 'ㅋ'개수를 연속으로 누르면서 '나이'를 언급하며 푼수라고 둘러대며 해명? 하지만 이 말을 쓰면서 내가 왜 해명하고 있지라고 속으로 생각하게 된다. 고등학교 다닐 땐 장난을 많이 치고 웃긴 걸 좋아해서 얼굴에 장난기가 아주 가득 하단 말을 많이 들었다. 고등학생 땐 내가 속했던 세계가 편했나 보다.


어릴 때부터 옥상에 올라가는 걸 좋아했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원생 때까지.

학생에겐 금지구역이라 그랬나? 침범하면 안 되는 금지구역은 항상 호기심을 당기게 한다. 어린아이가 뭐가 답답했는지 바람을 맞으며 아래를 내려다보는 게 속이 뻥 뚫렸다. 지금은 마땅히 옥상에 올라갈 곳도 없고 올라간다 하더라도 그다지 마음이 풀릴 것 같지는 않다. 마음에 비가 내리는 날에는 나약한 내가 싫어지는 순간이다. 모든 건 다 상대적이라 이런 고민을 들으면 배가 불러서 하는 생각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상황도 나쁘지 않고 단계적으로 착착이지 않냐며 할 수 있다. 욕심이 많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조건이라는 것이 독립변수고 나라는 인간은 종속변수인 걸까?

나이가 적지 않다 보니 친구들과 연애, 결혼 그 이후의 이혼까지 얘기 나올 때가 있다.

'결혼 전에 서로의 집안 때문에 깨지는 경우를 많이 봤어. 서로 비슷한 집안이 중요해'

'내 외적 취향은 얼굴이 이래야 하고 키가 이래야 하고 비율이 이래야 하고 몸매가 이래야 해'

그래 뭐 나도 조용한 걸 좋아해서 방배, 반포 참 좋아한다. 그래 뭐 나도 대통령 하고 싶다! (뜬금포)


나는 어릴 때부터 예민하고 불편한 게 많은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은 보통 본인에 대한 기준치가 높은 사람이라 커리어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많다던데.. 난 뭐지? 예민하고 성공한 사람일수록 내가 만들어 놓은 프레임이 옳다고 생각하기 쉽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 기준은 더욱 견고해지고 높아진다. 나를 더 몰아세우고 상대방이 나의 기준치에 따라오지 못하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상대방이 나의 기준치에 벗어나는 행동을 할 때면 사실 속으로 평가하면서 겉으론 괜찮은 척 착한척한다. 보통 우리는 본인을 대하는 방식 그대로 상대방도 대하기 마련인데, 결국엔 나라는 사람도 조건을 따지는 착하지 못한 사람인 것이다.

각자가 옳다고 믿는 저마다의 소우주 속에서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만난 적도 있었을 거다. 알고 보면 우리가 속한 우주는 아주 작아서 어차피 피할 수도 없었을 수도 있다.  

각자만의 우주 예술가들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다. 그러면서도 내 코가 석자인지라, 응원을 보내기에는 내가 체력도 부족하고 지쳐서 각자 알아서들 살겠지 하면서도 성장을 응원, 지지하고 싶다. (나도 열심히 성장해야 하는 것인데..)


한동안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 빠진 적이 있다. 동네 공원 산책하면서 좋아하는 노래 '갯마을 차차차' ost 가수 최유리의 '바람'노래를 들었다. 걸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슬프고 감성적인 가사라 센치해지고 싶을 때 들으면 좋다. '불쑥'  동굴에 들어갔다. 그러다 다음 플레이리스트인 DJ DOC 노래 'DOC 춤을'를 듣고 신이 났다. 이렇게 사소한 것으로 기분이 안 좋아지고는 하다가 사소한 것으로 금방 좋아지기도 한다. 머릿속으로 춤추는 걸 상상하는 내가  투명하고 단순하다.


늦은 오후까지 산책하다 보면 바람이 불어 은근히 춥다. 여름이 끝난 건가. 

한여름이지만 가을도 오고 있기는 하나보다. 어김없이 오고 간다. 오고 가고, 가고 오고.

결핍을 인정하는 순간 성장한 거라고 그러던데, 나는 엑스트라도 아닌 실패한 주인공의 영화일런지? 

영화라는 작품을 만들 때 배역조차 없는 배우들, 카메라 등이 있어야 하나의 영화가 완성된다. 나는 어떤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존재하는 엑스트라일까.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왜 사랑을 줄 수 없는 사람들만 사랑하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는 걸까? 얽혀있는 마음을 방치하는 것보단 조금씩 풀어헤쳐 나가야 하는 건 알고 있지만 나도 외로운 누군가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싶을 때가 있다. 사랑으로, 마음으로. (커리어적으로도?)

행복은 여전히 찰나의 순간이다. 

요새 인기있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나온 '정치적으로 덜 낭만적이게'라는 대사가 마음에 꽂힌다.


공원 산책하다 올려다본 구름모양이 마치 ufo
작가의 이전글 강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