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지켜낸 다부동 사투 / 출처 : 연합뉴스
1950년 8월, 대한민국의 영토는 부산을 중심으로 한 낙동강 이남, 국토의 약 10%로 쪼그라들어 있었습니다.
서울은 개전 3일 만에 함락됐고, 대전, 김천, 포항까지 차례로 무너졌습니다.
남은 건 낙동강 한 줄이었습니다.
그 방어선마저 뚫리면 임시수도 대구와 최후 거점 부산까지 내줘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유엔군 지상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고수 아니면 죽음(Stand or Die)'의 결의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부산 지켜낸 다부동 사투 / 출처 : 연합뉴스
그리고 이 방어선의 정중앙, 대구로 향하는 길목에 경북 칠곡 다부동이 있었습니다.
당시 김일성은 7월 20일 수안보까지 내려와 "8월 15일까지 반드시 부산을 점령하라"고 독촉한 직후였습니다.
북한군 전선사령부는 초조했습니다.
북한군의 주공축선은 대구 방면이었고, 그 핵심은 증강된 3개 사단(제3·13·15사단과 1사단 일부)이 공격하는 대구 북방의 국군 1사단 정면이었습니다.
북한군은 약 2만 1,500명의 병력과 전차 약 20대, 각종 화기 약 670문을 다부동에 집중 투입했습니다.
부산 지켜낸 다부동 사투 / 출처 : 연합뉴스
왜관과 다부동은 임시수도 대구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이곳이 뚫리면 대구 점령은 시간문제였습니다.
이에 맞선 국군 1사단의 상황은 참담했습니다.
방어를 담당한 1사단은 학도병 500여 명을 포함해 7,600여 명의 병력과 172문의 화포가 전부였습니다.
1대 3에 가까운 전력 열세입니다.
1사단의 방어정면은 20km에 달했으나 예비 병력을 확보할 여유조차 없이 주저항선을 점령해야 했습니다.
부산 지켜낸 다부동 사투 / 출처 : 연합뉴스
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328고지에서 유학산을 잇는 선에 3개 연대를 배치하고, 이 선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았습니다.
1사단 장병들은 1대 3의 전력 열세 속에서도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8월 한 달간 북한군은 거의 밤낮없이 총공세를 퍼부었습니다.
참전용사의 증언에 따르면, 1사단은 매일 600~700명의 인원 손실을 입었습니다.
위기가 극에 달하자 유엔군사령부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습니다.
부산 지켜낸 다부동 사투 / 출처 : 연합뉴스
1950년 8월 16일, 일본 요코다와 가데나 기지에서 출격한 B-29 전략폭격기 98대가 왜관 북쪽 낙동강 일대에 960톤의 폭탄을 26분간 투하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노르망디 작전에서나 쓰인 융단폭격이 한반도에서 재현된 것입니다.
그러나 전과는 명확히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8월 18일에는 가산에 침투한 적이 쏜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떨어졌습니다.
충격으로 정부가 부산으로 이동하고 피난령이 내려지는 등 대구 일대가 혼란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다부동전투가 다른 전투와 구별되는 지점은 '총력전'의 성격입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물론, 경찰을 비롯해 학도의용군, 소년병, 노무자들도 전투의 주역이 되어 함께 싸웠습니다.
특히 민간인으로 구성된 지게부대의 희생은 기억되어야 합니다.
총탄이 쏟아지는 가운데 탄약과 식량 등 보급품 40kg을 지게로 져나르고, 전사자와 부상병을 호송한 이들을 미군은 'A-frame Army'라 불렀습니다.
다부동전투에서만 지게부대원 약 2,800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결국 누적되는 피해를 견디지 못한 북한군은 8월 하순 대구 공격을 포기했고, 미 극동사령부와 8군 사령부는 피아 전력차가 완전히 역전됐다고 판단했습니다.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24일까지 55일간 이어진 낙동강 방어전투는 북한군의 남진과 한반도 공산화를 저지한 전투였습니다.
다부동이 버텨줬기에 인천상륙작전이 가능했고, 반격의 발판이 마련됐습니다.
이 전투가 없었다면 부산 임시정부까지 함락될 수 있었고,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대구 북방 20km, 인구 수백 명의 작은 마을 다부동에서 벌어진 55일의 사투가 나라의 운명을 갈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