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대동여지도

by 지구별여행자

매년 7월에서 8월로 넘어가는 중턱 모든 직장인들 그리고 반년간 학업에 충실했던 학생들에게는 꿀 같은 그시기 여름 휴가철.

그 여름 휴가철이 오면 내게는 늘 생각 나는 어린시절의 기억이 있다.


어렸을 적 우리 아버지의 차 뒷좌석 주머니 안에는 대동여지도를 방불케 하는 커다란 지도가 항상 꽂혀 있었다.

전국의 국도, 고속도로, 산, 지역들의 명칭들이 빼곡히 적혀 빳빳한 종이에 인쇄 된 내 키만큼 컸던 지도는 아버지에겐 늘 여행길을 함께하는 동행쯤 되었을 것이다.

얼마나 접었다 폈다를 반복한지 모를 정도로 접혀 선이 생긴 구간들은 반쯤 너덜너덜거리기도 했다. 어떤 구간들은 지워져 볼펜으로 끊긴 구간을 솜씨 좋은 아버지께서 종이를 새로 덧붙여 만들고 펜으로 도로를 잇는, 마치 도로의 공사를 하듯 복구를 하기도 하셨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하나쯤 새로 살 법도 한데 당신의 손때가 잔뜩 묻은 그 지도를 아버지는 쉽게 버리지 못하셨나보다.

가끔, 아버지가 엄마와 다툰 날에 우리 남매를 차 뒷자석에 태우고 수도권 근교 휴게소의 국밥을 먹으러 잠시 고속도로 여행길을 나서는 소심한 일탈이 아버지에게는 큰 낙 중 하나였을까?


저 놈의 역마살 때문에 제 명에 못 죽을 거야라는 잔소리를 늘 입에 달고 살던 엄마.

그 당시 어린 나로서는 역마살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주말이면 주말이라서, 날씨 좋은 날이면 날씨가 좋아서, 기분이 꿀꿀하며 꿀꿀해서 그런 것들을 핑계 삼아 여기저기 친구들과 가족들과 방방곡곡 다니는 아버지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쯤이라고만 여겼던 것 같다.

엄마의 말이 씨가 된 것처럼 아버지는 오십을 넘기기도 전에 세상을 등지셨다.

아버지의 지난 오십년 간의 인간사를 말해주듯이 장례식장은 조문객들로 북적였던 걸로 기억한다.

16살 어리다면 어리고 또 어느정도 컸다면 컸을 나이.

사춘기 시절의 중턱을 넘고 있는 그 당시 나에게 아버지의 죽음이란 절대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상주 옷을 입고 조문객들을 맞이하는 14살의 남동생이 그렇게 어색해 보일 수가 없었다.


내게 아버지는 요즘 흔히들 말하는 딸바보의 전형적인 아버지였다.

딸바보는 아마 오스트렐라 피테쿠스의 선사시대 즉 인류가 시작된 이후로 국적을 불문하고 이 세상 아버지라면 늘 품게 될 불변의 법칙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아버지에게 딸들이란 그 어떤 관계보다 더 애틋한 관계일 것이라고 여겨진다.


여자로 태어난 나는 남아선호사상의 폐해를 우리 할머니에게 고스란히도 받으며 자라왔다. 엄마가 결혼 후 처음으로 가진 아기가 다들 남자아이일거라고 추측했다고 한다. 배도 남산만큼 불렀으며 게다가 입덧 하나 없고 워낙 다 가리지 않고 잘 먹으셨다고. 특히 고기와 밥을 유난히도 사내대장부 같이 먹었다던 엄마. 이러한 신호들은 튼튼한 집안의 기둥은 남자를 외치는 우리 할머니를 더할나위 없이 기쁘게 하고 행복한 첫 손주에 대한 기대를 더욱 더 부풀리게 했음에 분명할 것이다. 웬만한 보통 성인 남자 이상으로 내가 먹성이 좋은 이유를 굳이 찾자면 이러한 선천적인 영향을 받아서이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조심스레 해본다.


그러곤 첫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온 아이에게 사내아이의 굳건한 상징인 작은 고추를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으셨단다. 엄마는 그것이 그렇게도 속이 상하고 억울해 간호사들이 채 떠나지도 못한 병실 한 가운데서 엉엉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에 늘 덧붙는 똑같은 말.

"그래도 딸이 최고야. 아들 녀석들 낳아서 다 키워봐야 소용 없어. 아유, 그 때 내가 미역국 먹으면서 얘네 할머니 앞에서 운 거 생각하면 은지한테 미안하지. 이런 복덩이가 태어난 줄도 모르고. 딸이 최고야, 최고."

지금은 우스개소리로 말하지만 그 당시 엄마의 섭섭함은 어떻게 이루 말할 수 있으랴. 10개월을 감쪽 같이 속은 기분이란. 나는 사실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서운하거나 기분 나쁜 기색을 그닥 표현하지 않는다. 물론 그 뒤에 항상 따라 붙는 "딸이 최고지"인 이유도 있겠지만 예로부터 남자를 선호하는 우리나라 문화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인이라면 그러한 고지식한 사상을 갖고 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걸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즘 흔히들 말하는 깨어 있는 시대의 페미니스트며 여성의 인권 보장이며를 높여 외치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저런 이야기거리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볼매를 맞을 수도 있겠지만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대의 중도기를 거쳐 자라 온 나는 당연히 고객 끄덕이며 뭐,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과 함께 받아들일 수 있는 사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아무튼 그러한 할머니 밑에서 어린 시절의 나는 남자의 성별을 가진 내 남동생에게 치여 꿔다 놓은 보릿자루의 신세를 종종 면하질 못했다. 그런 미운 오리 새끼에게 사랑을 듬뿍 준 건 딸바보의 애칭을 가진 우리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늘 종종 말씀하곤 하셨다. 너희들 다 커서 이 다음에 대학교에 들어가면 우리 손 잡고 전국 여행 한번 하는 게 내 꿈이라고. 그 때의 나는 너무 어렸어서 그 당시 아버지가 무심코 내뱉은 그 말의 의미를 역마살이 단단히 낀 아버지의 한번쯤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 정도일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머리가 커지고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보다 아버지 없이 살아 온 날들의 시간이 더 많아진 어른이 된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버지에게 있어서 그 꿈을 이룬다는 것은 단순한 여행이 아닌 20년이라는 긴 자식 농사의 끝을 가장 아름답고 값지게 수확했을 당신의 작은 소망이 아니지 않을까싶다. 우리의 나이만큼 먹었을 아버지의 대동여지도와 함께.


삼십 대 중반의 문턱에 선 요즘, 아버지 차 뒷자석 주머니에 터줏대감 같이 늘 묵직하게 꽂혀 있던 손때가 타 너덜너덜 해진 아버지의 지도가 나는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