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산업 민영화, 그 뒷이야기 18

노교수의 분노

by 요아킴


아침이 밝았다. 연구단 일행은 브루노가 준비한 토론토 하이드로 회사 안에 있던 회의실로 이동했다. 토론토 시내는 흰 눈으로 덮여 있었고, 눈길 운전이 일상적인 현지 운전기사는 능숙하게 미니버스를 몰고 도로를 질주했다. 문득 창밖을 내다보던 최용석이 재미있는 것을 하나 발견했다. 6차선으로 쭉 뻗은 길의 이름이 용스트리트. 최용석을 영어로 적을 때 Yong이라고 했는데, 그 길 이름이 Yonge. 물론 끝에 e자가 붙어 있기는 했지만, 발음상 같았다. 이건 내 이름을 딴 길인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미니버스는 약속된 토론토 하이드로 회사 앞에 도착했다.


현지 가이드는 이미 토론토 하이드로 직원과 연락이 미리 됐던 모양이다. 휴대폰으로 어딘가로 전화를 하니 중년 백인 여성이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차단기가 달린 게이트로 뛰어나왔다. 몇 마디 주고받고 일행을 실은 차는 회사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연구단 해외일정을 세운 후 최종 일정표를 서울의 여행사에 전달하고, 그 여행사는 항공, 호텔, 현지 안내인 등등의 세부적인 준비를 다 했다. 이때 일정표에는 날짜와 함께 방문지 연락처를 넘겨줬다. 그러면 현지 가이드가 사전에 방문처의 연락 담당자를 미리 접촉해서 일정에 오차가 없도록 한 그런 시스템이었다.


안내를 받고 토론토 하이드로 4층 건물로 올라가니 10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회의실이 있었다. 건물 자체는 전력회사답게 평범했고, 회의실도 별 특징이 없었다. 전기를 만들고 공급하는 전력산업은 상당히 보수적인 산업이다. 전기는 발전소에서 돌아가는 발전기와 마지막으로 소비자 집의 전등이 실시간으로 연결된 그런 구조이다. 나라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기는 일정한 주파수에 맞춰서 회전한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1초에 60번 회전하는데, 이걸 60헤르츠라고 표현한다. 미국과 캐나다는 주로 50헤르츠 주파수의 발전기가 돌아간다. 주파수가 다른 두 전기는 연결이 불가능하다.


아무튼, 생산과 소비가 같은 초 단위로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전력산업은 한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못한다. 그 오차는 정전, 전기가 끊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주파수를 60헤르츠로 고정 우리나라도 주파수 오차 허용 범위는 59.8헤르츠와 60.2헤르츠 안에서 유지해야 한다. 이 범위를 벗어나면 전기의 품질에 심각한 장애가 생긴다. 작게는 전등이 깜빡거리는 선에서 끝날 수 있지만, 제철, 제련, 전자제품 제조 등 정밀한 산업에서는 생산라인 자체가 망가진다. 그래서 전력회사는 발전에서 송전, 그리고 배전 각 단위별로 적절한 전압과 주파수를 유지하기 위해 아주 세밀하게 관리를 한다. 그러므로 전기회사는 보수적이다. 창조적인 일을 하면 안 되는 것이 전기회사 사람들이다. 어느 전력회사를 가도 건물들은 다 얌전하게 생겼다. 회사의 분위기를 그대로 따라 한다.

bruno.jpg 집회에서 연설하는 브루노 실라노


아담한 회의실 안에는 놀랍게도 딱 두 사람만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흔 살은 넘어 보이는 노신사와 어제 오후에 처음 만났던 브루노. 오늘 만날 사람이 많다고 들었는데 왜 둘 뿐이지? 궁금했다.


브루로 일행과 연구단은 각자 자기소개를 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브루노와 같이 있던 그 노신사의 이름은 마이런 고든이라고 했고, 토론토 대학에서 은퇴한 경제학 교수 출신이라고 들었다. 어차피 최용석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고, 브루노가 초청해서 온 사람으로 그냥 가볍게 넘겼다. 그런데 김창석 교수가 고든 교수와 명함을 주고받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라는 표정이 역력했고 일부 일행은 이 상황을 알아차렸다. 무슨 일이지?


의아해하는 일행의 눈길이 쏟아지자 김 교수가 상황을 설명했다.

“아니, 여기서 이분을 만날 줄을 몰랐네요.”


옆에 있던 한전 이승곤 실장이 물었다.

“아시는 분이신가요?”


“예, 유명한 분이지요. 공공경제학 또는 규제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학자입니다. 나도 이분 책을 서너 권 읽었지요. 근데 나는 이분이 미국인으로 알고 있는데, 캐나다에 계시네요. 허허.”

김창석 교수의 설명에 일행은 모두 고든 교수를 쳐다봤다.


상황을 이해한 브루노가 최용석을 향해서 설명했다.

“용, 미리 설명 못 했는데, 사실 내가 온타리오 자유화 상황을 설명하는 것보다 고든 교수가 하시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해서 사전에 연락을 드렸어. 나는 현장에서 뛰는 노동자고 교수님은 학문적으로 다루는 분이니까 한국에서 오신 교수님들하고 대화하는 수준이 더 맞다고 봤거든. 뭐, 별 문제가 없지?”


브루노의 계획에 최용석은 속으로 감탄했다. 저명한 한국 교수님들이 일개 지역 노조 대표와 대화하면 별 흥미를 못 느낄 것 같은데, 그래도 나름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수를 불러다 놓음으로써 자기 대신 민영화 실패를 이야기하게 만든다, 참 좋은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어. 글쎄, 나도 알지 못했는데. 문제는 내가 아니라 연구단 위원님들의 생각이지.”

말끝을 흐리며 최용석은 이근석 단장을 쳐다봤다.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이근석 단장은 주변을 둘러보며,

“아, 그런 상황이군요. 잘됐네요. 우리가 이 먼 곳까지 온 이유가 상황을 연구하러 온 건데, 이런 교수님을 모셔다 준 건 오히려 고마워해야지요. 다들 동의하시지요?”

라고 말했다.


아무도 이 단장의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니까. 하지만 모두 어렴풋이 예상은 하고 있었다. 노조 위원장이 부른 교수가 어떤 말을 할지는 안 들어도 뻔할 것이니. 그렇지만 단장의 말에 싫다고 말할 정부 측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구단의 중립위원인 이병호 교수가 브루노와 고든 교수에게 공동연구단에 대해 설명 했다. 이병호 교수는 이근석 단장과 함께 중립 측 위원으로 선임이 됐는데, 사실 간사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 교수의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든 교수가 입을 열었다.

“민영화를 연구하러 이렇게 멀리까지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연구와 대화로 해결하려는 한국정부의 결정에 경의를 표합니다. 진심입니다. 여기 캐나다, 특히 온타리오에서는 이런 과정이 없었습니다. 잘못된 결정을 너무 일방적으로 진행했고, 참혹한 실패를 겪었습니다. 제가 설명하겠지만, 저의 견해로는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 바로 전력산업을 자본가들의 손에 넘기는 겁니다.”


토론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고든 교수는 이미 단호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정부 측 위원들은 약간 맥이 빠지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항상 미소를 얼굴에 띄고 있는 김창석 교수가 질문을 시작했다.

“고든 교수님, 저도 옛날에 공부할 때 교수님 책도 읽었고 어떤 분이신지 대충 알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직접 만나 뵙게 돼서 개인적으로 영광입니다.”

김창석 교수는 점잖고 예의 있게 말을 시작했다. 테이블에 놓인 커피를 한 잔 가볍게 마시고 김 교수는 말을 이어갔다.


“간단하게 질문드리겠습니다. 한국의 한전은 휼륭한 회사입니다. 전기요금도 비싸지 않고 안정적인 전력공급도 합니다. 그런데 앞으로 전력산업도 변해야 합니다. 부분적으로 경쟁체제도 도입해서 효율도 높이고, 일부는 민간에 개방해서 투자도 활성화하고. 지금 그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경제성장에 맞춰 효과적인 투자가 어렵습니다. 영국을 시작으로 이런 자유화는 세계적 추세라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지역에서는 시장설계의 문제, 계절적 원인, 관리의 문제 등으로 기대했던 효과를 못 보는 경우도 있겠지요. 그렇다고 구조개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에 대한 입장은 무엇인가요?”


김 교수가 유창한 영어로 질문을 하자 고든 교수는 김 교수를 바라보며 답했다.

“이론적으로 교수님 말이 틀리지는 않았습니다. 자유화를 시작할 때 다 그렇게 말했지요. 하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기본 전제가 틀렸어요.”


나이 때문에 발언 사이사이 호흡을 끊어 가면서도 고든 교수는 설명을 시작했다.


고든 교수에 따르면 캐나다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전력산업을 민간기업들이 시작했다. 하지만 1930년대 대공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연방 전체 전력회사들이 각 주 정부의 공기업으로 국유화됐다. 국유화 이후 전력회사들은 주 정부의 통제 아래 적절한 이윤을 보장받으며 안정적으로 전기를 공급했다. 특히 수력발전이 많기에 전력산업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온타리오주의 경우 캐나다의 핵심 제조업이 몰려 있어서 계절적으로 강수량 차이에 따라 전력생산량이 변동하는 위험을 극복하고자 원자력발전소도 세웠다. 5대호 주변에 풍부한 석탄을 이용하는 화력발전소도 건설했다. 정부의 적절한 규제 속에서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영국식 자유화에 온타리오 주 정부가 관심을 보였다.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였다. 캐나다에는 보수당, 자유당, 노동당, 그리고 퀘벡 분리주의자 정당 등 4개 당이 있었는데, 주로 보수당과 자유당이 정권을 주고받았고 노동당이 중간에서 캐스팅 보트 역할을 했다. 온타리오 주 정부도 이와 비슷했는데, 보수당 집권 정부가 자유화에 관심을 가지고 영국과 미국이 했던 방식을 따라 했다. 명분은 경쟁을 통한 전기요금 하락, 어디 가나 똑같은 이유였다. 그래서 온타리오 하이드로라고 불리던 독점 전력회사를 쪼갰다. 발전소와 송전선로는 기존 회사에 남기고 배전을 4개로 나눴다. 발전소도 하나씩 민간에 매각을 시작했다. 한 회사가 독점하던 산업이 10여 개 다양한 사업자가 경쟁하는 구도였다.


그러다 2003년, 겨울, 공동연구단이 방문하기 딱 1년 전에 문제가 터졌다. 캘리포니아와 비슷한 현상이 벌어졌다. 발전소 가동이 멈추고 전력가격은 뛰어올랐다. 당시 주 지사였던 스티브 이브는 전력시장 거래를 중단시키고 주 정부 예산으로 전기를 인근 퀘벡 주에서 샀다. 자유화가 중단됐다. 그해 가을 선거에서 정권은 교체됐다.


유일한 엔진니어 출신 신중진 교수가 질문했다.

“온타리오가 겪은 문제는 캘리포니아와 비슷해 보입니다. 사실 이 상황은 시각에 따라 다를 수는 있지만, 시장을 잘못 설계한 것 같습니다. 너무 현물시장에만 의존했거든요. 발전소와 소비자가 직접 거래하는 방식, 즉 PPA도 허용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런 제도적인 개선이 있으면 잘 될 것 같습니다.”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영국식 전력시장의 핵심은 모든 거래를 투명하게 현물시장에서 하자는 겁니다. 발전소와 소비자 사이의 직접거래는 비밀거래이며, 이렇게 되면 누가 시장에서 공개된 가격으로 입찰을 할까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전력시장이라는 개념이 잘못된 겁니다. 전기는 시장에서 거래하면 안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시장화를 위해서 공기업을 민영화한 것도 정말 틀린 결정입니다. 민간사업자는 돈을 벌어야 합니다. 공기업은 투자에 대한 적절한 비용회수만하면 됩니다. 누가 더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나요?”


고든 교수의 설명에 김창석 교수가 다시 질문했다.

“교수님, 공기업의 비효율이라는 말 잘 아시잖아요? 관료주의와 무사안일. 경쟁에 노출된 민간기업이 더 효율적인 경영을 할 것이고 결국 전기요금을 낮추게 될 겁니다.”


“아닙니다. 저는 아무리 뛰어난 민간기업도 공기업보다 국가적으로 좋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경영의 목표가 달라요.”


고든 교수의 뜻밖의 발언에 모두 놀랐다.

“아니, 중국의 공기업이 캐나다의 민간기업보다 더 효율적인가요? 교수님 말씀이 이해가 안 되네요.”

김창석 교수는 고든 교수의 공기업 발언에 발끈하며 되물었다.


논란은 커졌다. 다소 강경한 고든 교수의 발언에 정부 측 위원들은 반박했고, 이에 노조 측 위원들도 가세하면서 고든 교수의 발언을 우회적으로 뒷받침했다.


지금까지 방문한 다른 기관과의 면담과는 달리 그날은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고든 교수의 강력한 민영화 비판 발언이 씨앗이었다. 하지만 한 시간 동안 이어진 토론 끝에 결론이 날 수는 없었다. 고든 교수는 분노에 가까운 표현을 자주 썼다. 전력산업의 자유화, 특히 민영화는 사기극이라는 주장이었다.


열띤 토론을 마무리할 때가 됐다. 가끔 중립적인 말을 보태던 이근석 단장이 나섰다.

“고든 교수님, 교수님의 고견을 잘 들었습니다. 이 문제는 밤새 토론해도 이 시점에서는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토론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것을 배웠고 또 앞으로 고민해 볼 내용도 들었습니다.”


이근석 단장의 마무리를 듣고 고든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면서 오랜만의 토론에 즐거웠다는 감회를 밝혔다. 일행과 인사를 마친 노교수는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브루노가 고든 교수의 팔을 잡고 부축해서 같이 방을 나섰다.


의외로 시간이 많이 남았다. 토론토 하이드로의 방문은 원래 10시부터 12시까지 예정됐는데, 11시가 조금 넘었다. 연구단 일행은 오히려 속으로 모두 반기는 분위기였다. 이미 서로 입장은 다르고 토론해 봤자 결론은 없는데 적당히 방문 기관별로 입장만 들으면 된다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고든 교수를 배웅했던 브루노가 회의실로 다시 들어오면서 최용석과 이근석 단장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어...죄송합니다만, 밖에 토론토 시민단체 대표들이 몇 분 와 있습니다. 한국에서 이런 연구단이 온다는 소식을 제가 퍼뜨리니 전력산업 자유화 문제를 소비자 관점에서 해 줄 말이 있다고 합니다. 시간이 되면 만나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브루노는 말을 마치자 최용석을 보며 의미 있는 웃음을 지었다. 아, 이 친구 보통이 아니네. 당초 방문 계획을 논의할 때는 이런 말이 없었는데 현장에서 나를 돕기 위해 준비 많이 했네. 최용석은 속으로 한바탕 웃었다. 참 영리한 사람이구나. 그리고는 이근석 단장을 쳐다봤다. 예정에 없는 토론회라?


이근석 단장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답했다.

“어, 아주 좋아요. 우린 여기 공부하러 왔거든. 더 많이 만나고 더 많이 보고 들어야지요. 다들 들어오라고 하세요.”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노조 측 사람들과는 반대로 정부 측 위원들의 얼굴들은 일그러졌다.


그리고 이 문제는 그날 저녁으로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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