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원경> 리뷰
요즘 MBTI 다음으로 유행하는 밈이 있다. 테스토스테론이 많은 사람을 나타내는 ‘테토녀’ ‘테토남’, 에스트로겐이 많은 걸 나타내는 ‘에겐녀’ ‘에겐남’이다. 이중 테토녀는 장군감처럼 기개가 넘치는 여성을 뜻하는데, 원경왕후가 적격이다. 고려말부터 조선 초기의 혼란스러운 왕권 정치 한가운데를 살았던 원경왕후. 드라마 <원경>은 왕비임에 도 자신의 부군이자 왕인 태종(이방원)에게 지지 않고 입체적으로 갈등을 겪어내는 치정 정치 사극이다. 최고 시청 률 6.6%, 티빙 유료가입 기여자 수 1위를 달성하며 뜨겁게 마무리했다. <원경>이 성공한 원인을 다음 3가지 포인트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연대가 아닌 오로지 한 여성의 기개를 보여준 신선함
2. 남성을 향한 복수의 통쾌함이 아닌, 진짜 주체성을 보여주는 대사의 향연
3. 한 여성의 다채로운 감정 묘사
그간 한국의 여성 드라마에는 ‘연대’가 여성 서사를 나타내는 주요 재료로 쓰였다. 예를 들어 <굿파트너>를 보자. 로펌 히로인 시니어 차은경과 로스쿨 수석 한유리는 서로의 변호사 역량을 높여줄 뿐만 아니라, 여성으로서 엄마로 서 딸로서 겪는 어려움과 아픔을 위로하고 지지하며 성장한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퀸메이커>, <작은아씨 들> 등 다양한 여성 드라마가 그렇다. 모두 야망 있고 특출난 여성 캐릭터가 나오지만, 이들을 내적 외적으로 성장 시켜 주는 연대성 캐릭터 역시 필수적으로 등장한다.
조력자 캐릭터는 셰익스피어 시절 플롯에서부터 있었지만, 연대는 단순 조력과는 다르다. 조력이 주인공의 외적 목적을 달성시키는데 방점이 찍혀있다면, 연대는 목적을 넘어 인생의 풍요로움까지 담고 있다. 캐릭터의 삶 자체가 더 나아지는 데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회적 욕망, 외적 동기 외에도 개인의 감정을 어루만지는 연대가 여성 삶의 특징인 걸까. 이는 스토리를 훈훈하게 만드는 공신이다.
하지만 <원경>은 조금 달랐다. 연대하는 이보다는, 놀랍도록 줏대 있는 행동과 품위만이 원경왕후의 동기가 되 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치를 관철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타인의 응원이 아니라 칼 앞에서도 눈 하나 꿈쩍이지 않는 기개였다. 왕이 자신을 견제할 때도, 아끼던 몸종이 후궁이 되었을 때도, 아들 성녕대군이 죽어갈 때도 연대의 힘으로 극복하지 않는다. 왕비로서, 엄마로서, 여자로서 다양한 감정의 갈등을 겪지만 모두 그녀 혼자 감내 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여성 캐릭터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연대 없이 오로지 자신이 가진 힘만으로 스토리를 이어간 <원경>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비슷한 궤도로 이야기를 풀어 호평이 있었던 서바이벌 예능 <데블스플랜2> 를 잠시 보자. 서바이벌 예능 역사상 두뇌 플레이가 똑똑한 여성들이 대거 활약해, 병풍에서 벗어나 게임과 서사를 주도적으로 끌어나갔던 프로그램이다. 덕분에 재밌다는 평이 많았는데, 여성 간의 연대보다는 개인의 능력으로 치 열하게 살아남은 캐릭터에 대한 카타르시스 덕분이었다.
<원경>을 보고 나서, 그동안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여성 서사의 연대가 오히려 너무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연대의 서사를 좋아하기도 하고, 연대가 실제 여성들의 모습을 잘 나타내는 특징일 수도 있겠으나, 입체적인 여성의 모습을 만나기 위해선 다양한 모 습으로 여성들이 성장하는 이야기가 나올 필요는 있겠다.
원경왕후의 대사들을 듣고 있으면 짜릿한 통쾌함이 느껴진다. 그런데 통쾌함의 위치 역시 여타 드라마와는 다르 다. 보통 여성 서사에서 통쾌함은 그간 여성들이 느꼈던 불쾌함을 되돌려 주는 방식으로 풀이한다. 예를 들어 <힘 쎈 여자 강남순>에서 성추행하는 남성에게 똑같이 빡센 희롱 혹은 물리적 폭력으로 갚아준다든가, <대행사>에서 여성 캐릭터를 무시했던 남자 상사에게 더 큰 성과로 치욕을 안기게 해주는 방식이 그렇다.
하지만 <원경>은 미러 링의 방식이 아닌, 본인이 가진 권력으로 대적한다. 갚아주는 것이 목적이 아닌, 의견을 관철하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자신에게 명령하는 왕에게 “용상에서 내려와 눈높이를 맞추어 얘기하시지요.”라고 말하는 것, 이 나라는 성리학의 나라니 중전 말대로 하면 안 된다는 왕의 말에 “허면 그 성리학이 틀린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자신이 만든 조선에선 조선의 여인으로 살라는데 “저는 고려의 여인으로 죽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전하의 사랑을 잃는 것이 저를 잃는 이유가 되진 않습니다.”라고 강인한 자아를 유지하는 것이 그렇다. 마치, 자아가 막 생기기 시작하는 10대 초반에 내 생각을 부모님께 또박또박 말씀드려 내가 더 이상 당신의 소속만이 아님을 알렸을 때의 그 쾌감이랄까.
그간 사극은 아무리 주체적인 여성이라 하더라도 한계가 있었다. 시대적 배경에 맞게 남성에 의해 성장하거나, 남성을 보조해 주는 위치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려말을 살아본 원경왕후의 역사적 배경이 이를 탈피하게 했다. 여성들의 입장을 생각해보라는 미러링 문법 대신 비슷한 힘으로 의견을 전달하는 방식은 묵직한 통쾌함을 선사한다.
간혹 히로인 여성의 캐릭터는 (혹은 남성일지라도) 대단히 천재적인 모먼트 혹은 너무 강인한 리더십만 그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원경>은 여성으로서 느낄 수 있는 질투와 애정의 감정도 그려내며 원경왕후를 다채롭게 그려냈다. 질투 역시 흔한 궁중 암투의 클리셰적인 은밀한 시기 질투가 아니다. 후궁들을 남몰래 해치기보다는 왕 앞에서 솔직하게 질투 난다고 말하기도 하고, 상궁 앞에서 질투하는 자신의 모습을 고찰하며 감정을 담담하게 인지한다. 그녀에게 질투는 감춰야 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저 겪어가는 과정 중 하나이기에. 괘념치 않고 계속해서 왕에게 대적한다. 그래서 가끔 나오는 태종과 원경왕후의 혐관 로맨스가 더 짜릿하게 다가온 것일 수도 있겠다. “질투는 나지 만 네 말대로 해주진 않을 거야. 하지만 사랑해.” 이런 미친 LOVE랄까.
<원경>은 조선의 대표 테토녀 원경왕후를 통해 기존 여성 서사의 클리셰를 벗어났다. 서로 간의 연대는 없으며, 남성을 향한 이벤트적 복수 장면도 없고, 무소불위 권력에 인간성을 배제하지도 않는다. 대신 진짜 힘있는 여성이 신념을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지에 대해 그간 한국 드라마에선 만나기 어려웠던 캐릭터를 보여줬다. 이것이 시청자가 새로운 자극을 느낄 수 있던 점이며 반응이 좋았던 이유 아닐까. 연대를 벗어난 <원경>의 이야기처럼 여성 서사가 한 곳으로 점철되지 않고 다양하게 펼쳐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