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마주하는 발걸음 (9)

생명의 숲의 전설

by 이샤라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을 텐데 괜한 모습을 보여드린 것 같네요. 불편하진 않으신가요?"


조심스러운 미사의 물음에 시즈가 머리를 약간 숙이며 대답했다.


"아뇨, 별말씀을요. 몸이 불편하신 것 같아 오히려 저희가 폐를 끼친 건 아닌지......"


"괜찮습니다. 천천히 움직이면 큰 문제는 없어요."


미사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애써 꾸미지도, 무리해서 밝히지도 않았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그녀의 속내는 더욱 분명하게 전해졌다.


"두 분은 이 마을에서 얼마나 함께 지내셨나요?"


"음... 10년쯤 된 것 같아요."


"이곳에 오기 전에는 시스테나 교회 근처에서 지냈습니다. 그곳에서 병사들과 종군의사분들을 도우며 지냈었죠. 그러다 일반 주민들이 더는 교회 근처에 머무를 수 없을 만큼 상황이 나빠져서 의사분들의 권유로 이 마을로 옮겨오게 됐습니다만, 그 뒤로도 종종 의사분들을 도와 전선 근처로 나가곤 했죠. 그런데... 얼마 전에 사고가 났습니다."


헌의 시선이 옆에 앉은 미사에게로 향했다. 미사는 그 시선을 느낀 듯, 미안함이 어린 얼굴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몇 주 전, 제 아내는 여느 때처럼 의사분들을 돕기 위해 전선 근처로 함께 동행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부패에 잠식된 짐승이 내뿜는 장기에 노출되고 말았죠.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면서 금방 나을 줄 알았는데, 점점 기침이 멎지 않고 고열까지 시달리더니......"


무릎 위로 얹힌 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이 서로를 눌렀고, 말끝이 잠시 흔들렸다.


"이제는 거동조차 힘에 부치죠. 조금 전 이 여관까지 오는 길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조용히 앉아있던 미사가 천천히 팔과 다리를 드러냈다. 말없이 펼쳐진 팔목과 종아리 위로 얼룩진 흔적이 선명했다. 곰팡이처럼 번진 병색은 낡은 나무껍질처럼 피부를 조용히 점령하고 있었다. 희미한 악취마저 새어 나오는 그 모습은 굳이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내분을 치료할 방법은... 정말 없는 건가요?"


시즈의 물음에 헌은 고개를 살짝 떨군 채 답했다.


"백방으로 시도해 보았습니다. 약도 써보고, 별의별 짓을 다해봤지만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어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결심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곳 엘라리모스 땅에 전설로 전해지는... 거인이 잠들었다는 숲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미사의 시선이 헌을 향하더니, 마치 '또 시작이네...'라고 말하는 듯한 기색이 스쳤다. 조용히 내려앉은 표정에는 자신 때문에 헌이 허망한 희망을 붙잡고 있다는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혹시 생명의 숲을 이야기하시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아주 오래전, 생명의 거인들은 엘나와 가장 가까웠던 존재들이자 숲의 파수꾼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불의 심판이 닥쳤을 때, 그중 하나인 '엘라마'라는 거인이 남쪽으로 내려와 자신의 몸을 이 땅에 내려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남쪽 땅이 '엘라마가 잠든 땅', 엘라리모스라 불리게 된 것이죠."


헌의 이야기를 듣던 시즈는 이곳으로 오는 길에 떠올렸던 전설의 한 조각을 다시 꺼내 보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하지만... 그곳은 전설 속의 장소 아닌가요? 아주 긴 시간 동안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곳이라고 들었는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찾아야 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도, 이 마을의 의사분들에게도 아내를 치료할 방법은 없습니다. 사실...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이유도 없죠. 그렇지만, 이렇게 된 이상 다른 어딜 간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헌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남았습니다. 숲을 찾기 위해 말이죠. 생명의 거인이 잠든 숲에는 영겁의 세월 동안 간직한 생명의 기운이 있다고 합니다. 그 기운이라면 부패마저 씻어낼 수 있을 모릅니다. 엘라리모스 산 어딘가에 반드시 있을 겁니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곳을 찾아낼 겁니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아로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 말씀하신 숲이 정말 실재한다는 근거나 징표 같은 것이 있습니까?"


헌은 아로스의 말을 듣더니 허리춤에서 작게 접힌 천조각을 꺼내 펼쳤다. 땀과 손때에 절어 있는 낡은 지도는 곳곳에 손으로 덧댄 기록들이 덕지덕지 적혀 있었다.


"제가 직접 찾아보고 기록한 겁니다. 3주 전부터 이 일대를 계속 돌며 풀이나 나무, 흙의 상태 같은 걸 살펴봤습니다. 아직 산 전체를 다 돌아본 건 아니지만 이 부근부터 이상한 변화가 느껴졌습니다."


헌은 지도 위의 한 지점을 손끝으로 가리키면서 특정 구간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생명의 거인의 발길이 닿았던 곳엔 유독 생명력이 진하게 남는다고 하잖습니까. 그걸 생각하며 봤더니... 이상하게도 주변의 생명 반응이 전부 여기, 뒷산 어딘가에서 갑자기 끊겨 있더군요. 당장 찾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시도는 계속 시도는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산에 올라가실 생각이신가요?"


"예. 원래는 두 분이 묵을 곳을 정해드린 뒤 올라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함께 가보겠습니다. 귀공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시즈의 물음에, 아로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함께 가시죠."


헌은 잠시 머뭇거리다 미사를 돌아보았다.


"잠깐 다녀올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다녀온나. 두 분도 조심히 다녀오세요."


미사는 미소를 띠진 않았지만 조용하고 힘 있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헌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 일행을 향해 짧게 말했다.


"그럼, 따라오시죠."


세 사람은 여관을 나서 마을 뒷산으로 향했다. 외곽을 따라 세워진 목책과 초소, 작고 낡은 집들이 이어진 골목들, 우물가에 걸린 두레박과 물레방아까지. 산 위에서는 모든 것들이 작고 평범한 일상의 흔적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풍경 너머로 스며드는 신음과 비명, 희미한 연기의 냄새는 마을에 내린 현실의 무게를 결코 감출 수 없었다.


산 중턱에 도착하자, 눈앞에 나타난 울창한 숲은 전설에 걸맞은 침묵 속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짙은 초록빛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아른거리며 쏟아졌고, 산들바람이 불 때마다 가지와 풀잎들이 낮은 속삭임처럼 흔들렸다. 세 사람은 계속해서 산길을 올랐다. 처음엔 넓고 완만한 길이었지만 점점 흙과 돌이 엉겨 붙은 경사로가 이어졌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던 마을은 어느새 시야 아래로 멀어졌고, 발밑의 흙은 부드럽다가도 어느 순간 자갈로 바뀌며 미끄럽게 발을 잡아끌었다.


점점 가팔라지는 산길을 오르며 헌의 이마에는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 땀방울 하나하나가, 마치 간절함을 대변하는 듯했다.


산비탈의 바위 하나를 돌아설 즈음, 문득 시즈가 헌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아내분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20년 전, 카노르 평원 남동쪽의 보르톨 반도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아내 입장에서 저는 처음 보는 이국의 낯선 사람이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어딜 가든 따라오더군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첫눈에 반하신 것 같네요."


시즈가 웃으며 말하자, 헌은 멋쩍은 듯 고개를 저었다.


"사실, 저는 아내가 제 어디를 보고 반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아파서 조용하지만 예전에는 목소리도 크고 성미도 괄괄했습니다."


옅은 웃음 섞인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 세 사람은 숲의 깊숙한 곳에 다다랐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며 어둠을 드리웠고, 공기는 점점 더 서늘하고 묘한 느낌으로 변해갔다. 그때, 뒤에서 따라오던 아로스가 멈춰 섰다. 그리고는 갑자기 등불의 든 채 말없이 방향을 틀어 움직이자 앞장서고 있던 헌이 멈칫하며 말했다.


"어... 거긴 아닙니다. 그쪽은 전에 살펴봤던 곳입니다. 특별한 건 없었어요."


하지만 시즈가 고개를 돌려 아로스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래도... 한번 따라가 보는 게 어떨까요? 어쩌면 못 보셨던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헌은 잠시 주저했지만,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등불의 빛을 따라 다시 숲의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등불은 마치 무언가를 따라가는 듯 작고 부드러운 빛을 계속 내뿜었고, 셋은 그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걸었다. 길 자체는 아까와 비슷했지만 공기는 미묘하게 달랐다. 주변의 기척 또한 어딘가 낯설게 느껴졌다.


시간이 흘러 그들이 도착한 곳은 뿌리 부근에 이끼가 낀 고목나무 몇 그루와 기묘하게 쌓인 돌무더기가 있는 작은 터였다. 풀벌레 소리마저 희미해진 그 공간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흔적은 없었다.


"여긴... 아무것도 없네요."


시즈가 아쉬움이 깃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헌은 말없이 나무 한 그루에 손을 얹은 채, 숲 깊은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가 눈빛에 어렸다.


"아닙니다. 아까 그곳은 예전에 분명 지나갔던 곳인데, 오늘처럼 눈에 들어온 건 처음입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이상하군요."


"그런가요? 그렇다면... 저희가 새로운 길을 찾은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시즈의 기대와 달리 발걸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느려졌다. 숲은 어느 순간부터 길을 내어주지 않았고, 환시의 등불 또한 더 이상 뚜렷한 방향을 비추지 않는 듯 희미해졌다. 마치 같은 길을 맴도는 듯한 기분 속에서 걷던 세 사람은 결국 작은 공터에 멈춰 섰다. 헌이 바닥에 주저앉아 손으로 얼굴을 감싸자, 시즈는 그의 곁에 앉아 조용히 어깨를 다독였다. 이토록 절박한데 그저 전설로만 치부해도 되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저 절박함이야말로 닫힌 길을 여는 유일한 탈출구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이곳에 정말 생명의 숲이 있다면... 언젠가 분명 발견될 거예요."


시즈의 부드러운 위로에도 헌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움직이는 어깨에서는 오늘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체념과 아쉬움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로스는 멀리 숲의 끝자락을 바라보았다. 시선 끝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조금 전까지 등불이 미세하게 흔들렸던 방향이기도 했다. 이곳이 생명의 숲이 아니더라도, 지금 이 순간이 헌에게 있어 또 다른 의미를 안겨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그곳을 바라보던 아로스는 조용히 등을 돌려 나직하게 말했다.


"돌아가시죠. 금방 해가 질 겁니다."


세 사람은 다시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걸어온 길 위로 바람이 살며시 불어왔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는 마치 뭔가를 붙잡지 못한 듯한 애틋한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마을의 입구에서는 안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환한 미소를 머금은 그의 얼굴은 나무로 깎은 것처럼 단단한 주름들 속에서 따스함을 자아냈다. 수수한 의복의 어깨에 묻은 오래된 약제 자국들은 그가 이 마을에서 사람들을 돌보는 이라는 걸 조용히 말해주었고, 그의 옆에는 미숙한 기색이 남은 소년이 서 있었다.


"반갑습니다. 낮에는 경황이 없어 손님을 제대로 맞이하지 못했군요. 저는 이곳에서 사람들을 돌보는 의사 안톤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자인 노아입니다."


소년은 안톤의 말에 맞춰 고개를 숙였다. 어딘가 조심스러운 눈빛에는 머뭇거리는 기색이 있었다. 시즈와 아로스 역시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환대 감사합니다, 안톤 님. 이 마을에 대한 이야기는 헌이라는 분에게서 전해 들었습니다."


"허허, 그렇습니까. 혹시 저희가 종군의사 출신이라는 얘기도 함께 들으셨는지요?"


"네, 그것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저희가 전선에서 온 사실도 이미 아시겠군요. 헌데, 무녀님께서는 무슨 일로 이 마을에 오셨습니까?"


'무녀'라는 한마디에 시즈의 몸이 굳었다.


'어떻게 알았지?'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마을에 들어서며 무녀라는 신분은 밝히지 않았기에 조금 전 질문은 예상 밖이었다. 지난 며칠간 겪었던 추적자들의 집요함과 적의를 떠올리자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것은 곁에 있던 헌과 병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안톤의 옆에 있던 병사는 초소에서 자신이 실수를 저지른 듯 당황한 눈치였고, 함께 산을 올랐던 헌 또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시즈와 안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반응을 눈치챈 시즈는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며 안심시켰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이럴 줄은 몰랐으니까요."


병사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고, 헌은 멋쩍은 듯 코를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안톤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5년 전에도, 그리고... 15년 전 카노라스가 멸망하기 이전에도 그런 복장을 한 분들을 여러 번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만약 그 옷차림에 푸른 눈까지 지니셨다면 아우로라의 무녀님들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지요. 무슨 연유로 숨기고 계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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