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식된 황금의 땅 (12)

심연, 그리고 백은기사단

by 이샤라

심연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정적일 거라 생각했으나 공기에는 묘한 흐름이 있었다. 마치 어디선가부터 축축한 수증기가 밀려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처음에는 폐가 짓눌리는 듯 답답했지만 예상과 달리 숨이 쉬어졌고, 그 안에는 알 수 없는 온기가 서려 있었다.


발아래의 지면으로는 검은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흡사 거미줄을 닮은 듯한 부드럽게 흩어진 실오라기는 마치 살아있는 혈관처럼 꿈틀거리며 퍼져 나갔다. 그것은 등불 가까이로는 다가오지 않았다. 마치 빛을 두려워하는 듯, 그 검은 흐름은 빛이 닿는 경계 앞에서는 주춤거리며 움직였다.


그렇게 주변을 살펴보던 아로스의 시선에 라그나르의 품에 안겨 있는 시즈가 들어왔다. 그는 본능적으로 곧장 시즈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잿빛으로 질린 피부와 의식 없는 와중에도 가늘게 떨리는 손끝이었다. 그 연약한 모습에 애써 이성을 단단히 묶고 있던 차가운 가면이 산산조각 났고, 라그나르는 그런 아로스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기절한 무녀를 바라보는 기사의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애틋함이 담겨 있었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무언가에 찢기고 깎여나가는 듯한, 애틋함마저 고통이 되는 듯한 그림자가 함께 서려 있었다.


"제가 업겠습니다."


아로스의 말에 라그나르는 조심스럽게 시즈를 넘겨주었다. 시즈의 체온이 등을 타고 은은하게 갑옷 너머로 전해졌고, 희미한 숨결이 목덜미를 스쳤다. 그는 등을 단단히 받쳐 들며 환시의 등불을 라그나르에게 다시 건네주었다. 라그나르가 받아 든 등불은 희미한 빛을 머금은 채, 일정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라그나르는 질문 대신 나직이 읊조렸다.


"지켜야 할 것이 생기는 것은... 때로는 축복이 아닌 가장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합니다."


그 말은 질문이 아니었기에 아로스는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시즈를 업은 채, 묵묵히 어둠 속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미세하게 굳어진 어깨는 라그나르의 말을 부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등에 업힌 무게는 깃털처럼 가벼웠음에도 시즈를 향하는 마음의 무게는 천근만근이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검을 들었으나, 정작 자신이 곁에 머무는 것 자체가 그녀를 사지로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모순. 이 무게를 묵묵히 견디는 것이 과연 그녀를 위한 길일까, 아니면 파멸로 향하는 형벌일까.

그렇게 묵묵히, 빛이 인도하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 지 반나절 정도 지났을까. 어둠과 빛이 혼재하는 심연을 말없이 걸어가던 중, 시즈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느낀 아로스는 등을 단단히 받치며 한 걸음씩 나아갔다.


"...귀공?"


잠결이 뒤섞인 희미한 목소리였다. 아로스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려다 이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척 다시 발을 내디뎠다. 그녀가 온전히 깨어난 것이 아니길 바랐지만 등의 온기가 조금 더 선명해지면서 이내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습니다. 내려주셔도 돼요."


아로스는 즉시 걸음을 멈추었다. 등에 닿아 있던 시즈의 손이 가볍게 움찔였고, 그녀는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스스로 내려섰다. 두 발이 축축한 바닥을 디디는 순간, 시즈는 자연스럽게 균형을 잡고 주변을 살폈다.


"저희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죠?"


라그나르가 앞을 바라보며 짧게 대답했다.


"심연입니다."


그 말에 시즈는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는 습했지만 예상했던 것과 달리 숨이 막히지 않았고, 오히려 생각보다 부드럽게 폐를 채웠다.


"숨을 쉴 수 있네요......?"


놀라움이 섞인 시즈의 말에, 아로스와 라그나르는 조용히 시선을 주고받았다. 시즈 역시 이곳의 환경이 예상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제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르네요."


"저도 처음에는 무녀님과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심연으로 더 깊이 이동하면서 마주한 광경에, 세 사람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발을 딛고 서 있는 땅의 한쪽 절벽 아래로는 검은 강이 흐르고 있었으며, 그 주변에는 희미한 빛을 내뿜는 발광형 식물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분홍빛과 연보랏빛이 뒤섞여 일렁이는 풍경은 신비로웠다. 가까이 다가가자 나비가 꽃에 앉는 것처럼 식물들이 반응하면서 미세하게 빛의 강도를 바꾸었다. 마치 볼 수 있는 것처럼 주변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는 듯했다.


라그나르는 강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의 표면 아래로 작은 물결이 일렁였고, 어둠 속을 유영하는 거대한 생물들의 형체가 보였다. 마치 물고기와 같은 유선형의 몸체를 지닌 그 생명체는 몸의 일부가 희미하게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눈이 있어야 할 부분에는 온통 기다란 수염뿐이었지만 그 수염이 감각 기관이었는지 사방으로 펼치면서 주위의 움직임에 즉각 반응했다.


강물에서만이 아니었다. 절벽 위쪽, 나무의 뿌리처럼 뻗어나간 구조물 사이에서도 미세한 움직임들이 가득했다. 박쥐처럼 생겼지만 날개가 없는 작고 가벼운 몸을 가진 생물들이 천장과 벽을 타고 조용히 이동하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그들의 피부는 심연의 기류를 타며 이따금씩 공중을 미끄러지듯이 날아다니기도 했다.


"지하에도 이런 세계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시즈는 연이어 감탄을 하며 눈앞의 광경들을 바라보았다. 빛이라곤 거의 없는 공간에서 어떻게 이런 생태계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일까. 분명 이곳은 일반적인 지상의 생명들이 오래 머무를 환경이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당도한 심연의 모습은 상상했던 것과 달리 너무나도 달랐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역병의 기운도 없었고, 지독한 장기를 뿜어내는 침식된 대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공중을 유영하던 생물 하나가 갑자기 경련하듯 떨었다. 어디선가 튀어나온 검은 그림자가 그것을 단숨에 덮쳐버린 것이다. 희미한 빛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날렵한 체구를 가진 짐승이었다. 긴 몸통과 유연한 사지를 지닌 그 생물은 마치 족제비를 연상케 했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피부는 두텁고 매끄러웠고, 네 개의 발가락에는 사마귀의 앞발을 연상케 하는 발톱들이 잔뜩 돋아나 있었으며, 길게 찢어진 입 사이로 드러난 날카로운 이빨은 몸부림치는 먹이를 거침없이 으스러뜨렸다. 오도독, 하고 뼈마디가 부서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절벽 아래에서 유영하던 물고기들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수면 아래에서 뭔가 떠오르려는 듯 표면이 출렁거리더니 갑자기 강 전체가 뒤흔들리더니, 검은색 물보라가 튀며 거대한 턱을 가진 악어를 닮은 듯한 모습의 생명체가 나타났다. 그 크기는 지상의 악어보다 더 거대했고, 이빨은 더욱 촘촘히 늘어선 데다 비늘이 아닌 단단한 골질의 갑각으로 덮여 있었다. 사냥감이었던 물고기는 제대로 도망칠 새도 없이 단 한 번의 입질만으로 머리가 잘려 나갔다. 토막 난 몸이 강물 위를 떠다니는 동안 포식자는 깊은 물속으로 다시 가라앉았다.


조금 전 공중을 유영하던 생물을 사냥했던 날렵한 짐승이 사냥감을 물고 있는 동안, 불쑥 어디선가 또 다른 개체가 튀어나왔다. 더 크고, 더 단단해 보이던 놈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동족을 덮쳤다. 비명이 터져 나오기도 전에 작은 개체는 발버둥 치지도 못한 채 통째로 씹히면서 큰 개체의 입안으로 사라졌다. 남은 것은 피에 물든 이빨을 드러내며 더욱 날카로운 눈빛을 띠는 포식자뿐.


그 광경에 시즈가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같은 동족까지?"


하지만 변화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동족을 삼킨 짐승의 몸에서 미세한 변이가 시작되었다. 피부가 더욱 어두워졌고, 등 뒤쪽으로는 뼈가 희미하게 솟아오르더니 구조가 더 길어지는 그 모습에 라그나르가 놀라움과 감탄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곳의 생명들은 먹이를 포식할수록 진화하는 것 같습니다."


순간, 짐승이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굶주린 듯한 노란 눈의 시선이 세 사람을 향했다. 발톱이 땅을 긁었고, 신경질적으로 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환시의 등불이 발산하는 빛에 움찔거리며 안쪽으로는 다가오지 않았다. 마치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낀 것처럼, 급히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것은 한동안 빛을 노려보았지만, 아로스가 등불의 빛을 더 가까이 들이대니 결국 몸을 돌려 나무뿌리 사이로 사라졌다. 하지만 포식자들의 시선이 완전히 거둬진 것은 아니었다. 뿌리 너머에서도, 절벽 아래의 강에서도, 어둠 속에서 빛나는 희미한 눈빛들이 세 사람을 향해 깜빡이고 있었다.


"심연은...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로군요."


시즈는 등에서 서늘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세 사람은 그렇게 먹고 먹히는 모습을 뒤로하며 환시의 등불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더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등불을 따라 걸음을 옮길수록 공기는 점점 더 무거워졌다. 숨을 쉬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었지만 들이쉴 때마다 알 수 없는 불쾌한 감촉이 폐 깊숙이 스며드는 듯했고, 축축한 냉기가 살얼음처럼 피부에 파고들었다.


그때, 등불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아로스의 발걸음이 문득 멈췄다. 등불이 비추는 저편, 어둠 속에서 무언가 은은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빛이 퍼져나가며 어둠 속의 장막이 천천히 걷히자 세 사람 앞으로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넓은 공터 위로, 텅 빈 은빛 갑옷 수십 벌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갑옷은 곳곳이 부서지고 짓뭉개져 있었으며, 예리한 무언가에 잘려나가거나 긁힌 흔적이 가득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그 어디에도 핏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마치 내용물만 감쪽같이 사라진 것처럼 갑옷 안에는 뼈 한 조각, 살점 한 점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라그나르가 한 무릎을 꿇고 날카롭게 찢긴 흉갑 조각을 손에 쥐었다. 조심스럽게 흔적을 살피던 그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이건......!"

라그나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즈가 비명 같은 신음을 터뜨리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녀의 눈이 텅 빈 갑옷 어깨에 희미하게 남은 문양에 고정되어 있었다.


용의 형상, 아우로라의 문장이었다.


시즈는 무너진 갑옷 하나를 붙잡고 떨리는 손으로 표면을 매만졌다. 15년 전, 심연으로 내려갔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아우로라의 백은 기사단. 그들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설마......"


시즈의 시선이 갑옷을 꿰뚫고 있는 흉측하게 뒤틀린 검은 창들로 향했다. 그 형태는 너무나도 익숙했다. 타리안에서 보았던, 전쟁의 여신 카야를 꿰뚫었던 바로 그 창.


이곳의 참상은 모르티아의 소행이 분명했다.


충격에 휩싸인 시즈가 비틀거리는 순간, 콧속을 파고드는 역한 냄새에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막았다. 썩은 살이 부패하며 퍼지는 지독한 악취였다.


"냄새가... 안쪽에서부터 나는군요."


라그나르의 말에 아로스는 등불을 들고 더 깊숙한 곳으로 발을 들였다. 그러자 아로스는 문득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 추락할 때 의식 너머에서 보았던, 심연 깊은 곳으로 사라져 가던 바로 그 빛의 미약한 잔향이었다. 그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다가갈수록 주변의 풍경은 더욱 잔혹하게 변해갔다.


텅 비어 있던 갑옷들의 무덤 사이로, 마침내 시신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바닥을 덮은 검붉은 웅덩이들이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채 번들거렸고, 곳곳에는 부러진 칼날과 조각난 방패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초입의 시신들은 방금 전 숨이 끊어진 듯 선혈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몇 걸음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시간의 축이 뒤틀린 것처럼 시신들은 급격하게 부패해 있었다. 수십 년의 세월이 단 몇 걸음 사이에 압축된 듯, 살점이 썩어 문드러지고 하얀 뼈가 드러난 시신들이 즐비했다. 특히, 잘려나간 단면들은 하나같이 끔찍하게 부풀어 오르거나 내부에서 무언가 터져 나온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이 모든 죽음의 행렬을 지나 막다른 길에 다다른 순간, 세 사람은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다. 길의 끝자락, 빛이 미처 닿지 않는 어둠의 경계선 위에 한 사람의 형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무릎을 꿇은 채 다섯 개의 검은 창에 꿰뚫린 기사의 옆에는 얼굴을 감싸던 무녀의 가면이 깨진 채 나뒹굴고 있었다. 푸르게 빛났을 왼쪽 눈은 빛을 잃은 채 차갑게 식어 있었고,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눈조차 제대로 감지 못한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그녀가 끝내 확인하지 못한 것이 있기라도 했던 걸까. 아니면,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이 남아 있었던 걸까.


"...엘리샤 님."


그 이름이 저절로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유일무이했던 아우로라의 무녀 기사.


깊은 슬픔을 머금으며 말하던 율리아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15년 전, 엘리샤는 친우를 따라 무저갱으로 향했으나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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