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
...그날, 온 세상은 불꽃으로 뒤덮였다. 탐욕에 눈먼 나의 형제이자 벗이었던 이들과, 그들을 따르던 어리석은 권속들이 감히 대지의 심장을 탐하였기에. 그들의 문명은 위대했으나, 그 영광 아래 곪아 터진 교만은 결국 파멸을 자초하며 이름마저 잿더미 아래에 묻혔다. 그것이 질서라 믿었다. 그들의 헛된 영광은 불길 아래 흔적 없이 지워졌다. 그럼에도 하나만은 남겨두었다. 가장 충직했던, 그러나 가장 깊이 길을 잃었던 나의 권속. 마지막 순간 눈빛에 서렸던 고뇌를 나는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이 땅에 홀로 남아 영겁의 시간 속에서 자신의 죄를 되새기리라. 발길이 오가지 않는 신전의 끊어진 사슬 아래에서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채 영원히 속죄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내릴 수 있는 마지막 자비이자, 가장 깊은 형벌이었으니...
불의 신 바트라의 비망록 中
에리스 협곡의 심장부는 여전히 태고의 어둠과 침묵에 잠겨 있었다. 홀로 칩거하는 주인의 심기처럼 협곡의 바람마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 정적의 중심에 비디아가 변함없이 가면 아래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고, 곁에 있는 오베디안이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덕분에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습니다, 협곡의 지배자시여."
비디아의 능글맞은 목소리가 어둠 속을 향해 부드럽게 울렸다. 오베디안은 한 치의 미동도 없이 비디아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의 태도와 말투, 숨기고 있는 꿍꿍이 등 모든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사브라트가 이미 결정을 내린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두 개의 거대한 황금빛 눈동자가 천천히 떠올랐다.
「너희의 쓸모는 증명되었군.」
담담한 의식 안에는 필멸자의 작은 성공 따위는 당연하다는 듯한 오만함이 깃들어 있었다.
「약속한 물건은 가져왔을 테지.」
"물론입니다."
비디아는 여유롭게 웃으며 허리춤에서 이전보다 더 크고 기괴한 문양이 새겨진 그릇을 꺼내 들었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이 '순수한 정수'는 어지간한 그릇은 감당조차 못 하는 맹독과도 같습니다. 당신의 충성스러운 권속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직접 보셨지요. 그럼에도... 정말로 이 힘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그 말은 확인이라기보다는 패룡의 자존심을 시험하는 교활한 도발이었다. 오베디안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지만 어둠 속에서는 분노를 억누른 거대한 의식이 파문처럼 퍼져 나갈 뿐이었다.
잠시 후, 협곡의 중심을 휘감던 어둠이 찢겨나갔다. 잠들어 있던 기척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공간 전체가 짓눌리는 듯한 압박이 몰려왔다. 강철 같은 검붉은 비늘과 대전쟁이 남긴 흉터와 상흔들. 사브라트가 온전한 형체를 드러낸 것이다.
그 압도적인 위용 앞에, 비디아는 능글맞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런, 제 생각이 짧았군요. 아무래도 이미 답을 정하신 모양입니다."
비디아는 조심스럽게 사브라트의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가 그릇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그릇 안의 검은 액체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물결치듯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검은 촉수처럼 허공을 가른 그것은 망설임 없이 사브라트의 잘려나간 왼쪽 어깨와 날갯죽지로 향했다.
액체가 닿는 순간, 끔찍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사브라트의 상처 단면에서 검은 힘줄이 뼈대를 억지로 빚어내기 시작하더니 부패한 살점이 그 위를 뒤덮으며 기괴한 팔과 날개의 형태를 만들어갔다. 그것은 재생이라기보다 썩은 고름과 종양이 뭉쳐 자라나는 증식에 가까웠다.
사브라트의 거대한 몸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는 끔찍한 고통을 티 하나 내지 않고 묵묵히 받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주인의 고통을 직감한 오베디안의 표정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가 동요하며 무어라 외치려 하던 찰나, 황금빛 눈동자가 차갑게 번뜩이자 아무 말도 못 한 채 입을 다물었다.
그 광경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비디아는 감탄으로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과연 협곡의 지배자시군요. 이 정도의 정수를 받아들이고도 버텨내시다니."
비디아는 아직 불완전하게 재생되고 있는 사브라트의 신체를 보며 덧붙였다.
"하지만 당신이라 할지라도... 이 힘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일 겁니다. 그분의 힘에 당신의 육신이 완전히 익숙해지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 테지요. 지금 스스로도 느껴지는 것이 있으실 겁니다."
비디아의 말에 사브라트의 황금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몸속에서 휘몰아치는 심연의 힘은 거대한 폭풍을 억지로 존재의 근간에 가둬둔 듯 격렬하게 날뛰고 있었다.
「...네놈 따위가 헤아릴 영역이 아니다.」
사브라트는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는 듯 비디아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공간 전체가 짓눌리는 듯한 무언의 압박이 쏟아졌지만 비디아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가면 아래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오만함이야말로 가장 다루기 쉬운 족쇄가 아니던가. 놈은 이미 스스로 족쇄를 찼으니... 이제는 그저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터.
"필멸자인 제가 감히 조언을 드린 것부터가 실수였군요. 주제넘은 발언은 용서해 주시지요. "
비디아는 능글맞은 태도로 사브라트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럼... 새로운 재앙의 탄생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비디아가 떠나고 난 뒤, 협곡에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오베디안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의 주인이 겪고 있는 고통의 파동을 피부로 느끼며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금방이라도 달려가 안위를 묻고 싶었지만 사브라트의 미동조차 없는 모습에서 뿜어져 나오는 '접근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에 발이 얼어붙었다. 그의 얼굴에는 충성심과 함께 자신이 경고했던 재앙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깊은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사브라트는 자신의 몸을 잠식하며 새로운 형태로 빚어내는 검은 액체의 고통을 묵묵히 견뎌냈다. 잘려나간 날갯죽지의 단면에서는 검은 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황금빛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부터 어둠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고통을 음미하듯 잠자코 있던 패룡은, 이내 거대한 몸을 돌려 협곡 가장 깊은 곳의 어둠 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열두 번의 해가 뜨고 지는 동안, 불꽃의 고원은 신화의 한 장이 현실에 새겨지듯 변해갔다. 도시의 남쪽, 한때 접근조차 불허하던 불의 장벽 코앞에는 이제 거대한 흑요석 창과 같은 탑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고 있었다. 신계 데오르 니아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불의 흐름은 주변 대지를 용암처럼 끓어오르게 만들었고, 숨 막히는 열기 속에서 거인들의 거대한 실루엣이 묵묵히 움직였다.
필멸자라면 단 한순간도 버티지 못할 지옥과 같은 환경이었을 테지만 그들은 신과 함께 불가능을 빚어내는 중이었다. 신계에서 쏟아지는 불의 흐름을 오르드의 권능으로 억지로 비껴낸 공간 안에서 거대한 역사가 쓰이고 있었다. 오르드의 신위가 담긴 망치질 한 번에 대지가 울렸고, 거인 철기장들의 노동요 같은 함성과 함께 도시 외곽에서 가져온 수백 톤짜리 잔해가 들어 올려져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들에게 부서진 성벽과 무너진 구조물은 단순한 돌덩이가 아닌 이그니카의 뼈와 살을 이루는 신성한 재료였다. 신과 거인들의 손을 거친 파괴의 흔적은, 이제 하늘로 향하는 새로운 길의 초석이 되고 있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다리를 놓기 전, 신계에 가장 가까운 이 땅을 정화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광신도들의 맹렬한 저항과 마주해야만 했다. 한때 불의 신을 섬겼던 그들이 이성을 잃고 눈에 뵈는 것 없이 달려드는 모습에 오르드는 깊은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그들을 심판한 뒤 비틀려 버린 영혼을 애도해야만 했다.
"...저게 말이 돼요? 마치 땅에서 솟아나는 거대한 창 같아요."
이그니카의 서쪽 성벽 위, 노아는 저 멀리 눈앞의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옆에는 도시의 파수꾼 역할을 맡은 아마룬이 묵묵히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아로스가 떠난 후로 매일 이곳에 나와 그가 돌아올 서쪽 지평선을 바라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 지 오래였다.
"저것은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의지가 형태를 빚어내는 과정이지."
아마룬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눈에는 크나큰 경외감이 서려 있었다. 수십 명의 거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단 며칠 만에 하늘을 향한 교두보를 쌓아 올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태고의 신화를 목격하는 듯했다.
바로 그때, 망루 위에서 병사의 다급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서쪽! 서쪽에서 누군가 접근 중입니다!"
그 외침에 노아와 아마룬은 반사적으로 서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잿빛 연기와 폐허만이 가득했던 분쟁지역의 지평선 너머로부터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아주 작은 점 하나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폐허의 망령처럼 비틀거리는 걸음이었지만 쓰러질 듯 휘청이면서도 결코 멈추지 않는 끈질긴 의지가 느껴졌다.
노아는 저도 모르게 성벽의 난간을 꽉 붙잡았다. 점차 가까워지는 그 형체는 며칠 전 모두의 걱정을 뒤로한 채 홀로 떠났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피와 먼지로 뒤덮여 있었지만 틀림없는 아로스였다.
"성문을...! 어서 성문을 열어주세요!"
다급하게 외친 노아는 사제라는 직책도 잊은 채 성벽 아래를 향해 서둘러 달려갔다. 그의 뒤로 굳은 표정의 아마룬이 묵묵히 따랐다.
육중한 성문이 굉음과 함께 열리자 두 사람은 밖으로 나섰다. 가까이서 마주한 아로스의 모습은 멀리서 본 것보다 훨씬 더 처참했다. 갈가리 찢긴 갑옷 아래로 드러난 살갗에는 붉게 얼룩진 온갖 광물조각이 엉겨 붙어서 갑옷의 일부처럼 보일 정도였다.
"세상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노아를 향해, 아로스는 아무 말 없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주먹만 한 크기의 검은 정육면체, 운철 각인이었다. 노아는 얼떨결에 조심스레 그것을 받아 들었다. 바로 그 순간, 그의 시선이 아로스의 부서진 갑옷 틈새로 향했다. 갈라진 흉갑 아래로 드러난 가슴팍에는 거미줄처럼 새까만 핏줄이 피부를 뚫을 듯이 선명하게 퍼져 있었다.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끔찍한 오염의 흔적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노아의 손이 저도 모르게 떨렸다. 뒤따라온 아마룬 역시 그 흔적을 발견하고는 숨을 삼켰다.
"너......!"
아마룬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경악과 함께, 이그니카에 도착했던 첫날 아로스가 내뿜던 그 불길한 기운의 정체를 비로소 마주한 듯한 깊은 우려가 서려 있었다. 그것은 더 근원적이고 지독한 심연 그 자체의 편린이었다.
도시로 들어선 아로스는 봉쇄실 방 정중앙에 앉은 채 침묵했다. 이그니카에 처음 도착했던 그날처럼, 살아있는 듯한 불꽃의 시선이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새겨진 어둠의 흔적을 집요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노아였다. 그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사제복 소매를 걷으며 의사로서의 본분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었다.
"몸을... 잠시 확인해 봐도 괜찮을까요?"
아로스는 대답이 없었다. 미동조차 없는 그의 모습은 마치 살아있는 석상 같았다. 노아는 그의 침묵을 암묵적인 동의로 받아들이고 검게 물든 가슴팍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끝이 검은 핏줄이 돋아난 피부에 닿기 직전, 주변을 맴돌던 정화의 불꽃이 마치 위협을 감지한 짐승처럼 격렬하게 타오르며 그의 접근을 막아섰다.
"그만둬라, 꼬마 의사 양반. 그건 네 녀석의 의술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퉁명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아마룬이 앞을 가로막자 노아는 물러서지 않고 답했다.
"하지만......!"
"하지만 이고 뭐고가 아니다. 저건 상처가 아니거든."
아마룬은 아로스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텅 빈 눈을 들여다보았다. 전우로서, 그리고 과거 같은 공포를 맛본 자로서 그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