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속에서 싸우는 법 (4)

봉인된 무덤

by 이샤라

그렇게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창 너머로 미세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구름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무언가가, 아니,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드러난 형체는 사람이라 부르기엔 너무 컸다. 바닥이 울릴 듯 묵직한 발소리, 바람이 틀어지는 기류, 벽을 스치는 공기의 무게가 달라졌다.


빛이 들지 않는 그림자 속에서 거인의 거대한 실루엣이 창문을 가렸다. 그와의 시선이 맞닿은 순간, 시즈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느꼈다. 창밖으로 그의 거대한 손이 천천히 움직였고, 마치 나오라고 명령하는 듯한 그 강렬한 기운에 노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나오라는거 같은데요?"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본 뒤 말없이 일어났다. 문을 열고 교회 영빈관을 나서자 매캐한 검댕 냄새가 공기 중에서 들이쳤다. 그렇게 부지 안뜰을 지나 교회 밖으로 발을 옮기자 거대한 존재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바위처럼 거친 피부, 곧게 선 어깨와 마치 산등성이처럼 솟은 근육. 두 눈은 깊게 파여 있었고, 그 안의 시선은 꿰뚫듯 날카로웠다. 2층 건물에 맞먹는 키와 덩치로 인해 한 걸음마다 땅이 살짝 울릴 정도였다.


아마룬.


그는 말없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즈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삼켰다. 처음 마주하는 거인의 실체는 단순히 크기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존재감 자체가 주는 무게는 사람의 감각을 짓눌렀다. 고서에 따르면, 신들이 이 땅에 발을 딛기 전까지만 해도 거인들은 태고의 시절 용들과 하늘과 땅을 양분하며 끝없는 전쟁을 벌였다고 전해진다. 그들의 피는 세대를 거치며 이어졌고, 용과의 적대는 뿌리 깊은 문화로 남았다. 시즈는 무녀로서 자신이 결코 반가운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거인의 시선으로부터 직감했다. 그것은 마치 차가운 벽과 마주한 것 같았다.


한 발짝 뒤에서 아마룬을 올려다보던 노아는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기억 한 조각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 카노라스의 번화한 거리에서 마주쳤던 어두운 에메랄드빛 갑옷의 거인 전사들. 황금빛이 쏟아지는 도시 한복판에서도 그들은 단연 눈에 띄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갑옷의 유려한 곡선, 빛을 받으면 은은하게 빛나던 무기와 갑옷, 그리고 거침없는 발걸음은 어린 노아의 눈에는 신화 속 존재 그 자체였다.


문득 형이 준 목각 인형이 떠오른 노아는 무의식적으로 주머니 속의 목각 인형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시간의 결이 새겨진 나무는 바로 눈앞의 거인을 본떠 깎아낸 것이었다. 형은 인형을 건네며 자랑스럽게 말했었다.


'저 전사들은 무서움을 몰라. 아주 용감해서 어떤 적이 나타나도 절대 물러서지 않고 맞서는 이들이지.'


노아는 눈앞에 서 있는 아마룬을 보며 속으로 기대를 품었다. 혹시 그때 형이 말하던 전사들 중 하나가 이 거인이 아닐까?


거인의 바위 같은 표정에는 짙은 음영이 깔려 피곤하고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 안의 눈빛만은 칼날처럼 선명했다. 그가 내뱉은 목소리는 땅 밑에서 울려오는 듯 깊고 무거웠다.


"지난밤에 느껴졌던 기운... 희미했지만 확실히 엘나의 힘이었다. 네가 소문의 '사선에서 돌아온 전사'인가?"


아마룬은 아로스를 꿰뚫을 듯이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너무 강렬해서 노아는 거인의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아로스는 아마룬의 말을 듣고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힘은 엘나의 것이다. 대지의 어머니의 숨결이자 모든 생명의 근원이지. 우리 거인들은 그 정수를 가진 채 태어난다. 뼛속 깊이 새겨진 그 힘은 우리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필멸자의 몸에 깃드는 것은 실로 보기 드문 일이다. 이건 아주 특별한 경우지."


아로스는 아마룬의 흉부에 드러나 있는 문양을 보았다. 그 문양은 나무뿌리처럼 얽히고설켜 아마룬의 가슴에서 손과 발 끝까지 퍼져 있었다. 문양에서 희미한 빛이 맥박처럼 일렁이며 생명의 흐름을 전하고 있는 듯하였다.


"우리 거인들의 눈과 귀는 용과 신을 제외하면 다른 살아있는 모든 것들보다 감각이 뛰어나다. 엘나가 사라지고 난 뒤로 비슷한 기운이 돌아다니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지만 두 눈으로 그 힘을 지닌 필멸자를 보는 건 처음이군."


"그 말씀은... 또 다른 환시를 품은 이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까?"


"가능성은 있겠지."


시즈의 질문에도 아마룬은 여전히 시선을 아로스에게로 둔 채 대답했다.


"보아하니 언령을 찾아 여기까지 온 것 같은데 이곳이 마지막이다. 더 이상 엘라리모스 일대에서 찾을 수 있는 계시는 없으니 더 찾으려면 북쪽으로 올라가 봐라."


시즈는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이곳에 내려온 언령의 구절에 대해 아십니까?"


아마룬은 시즈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싸늘한 경멸과 오래된 적대감이 스쳐 지나갔다.


"직접 가서 확인해라. 난 용을 섬기는 것들과는 그리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아로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조금 전까지 거인의 날이 선 언행은 참고 넘어갔지만 시즈를 향한 노골적인 무례는 다른 문제였다. 아마룬의 적대감이 그저 용과 거인의 오래된 역사 때문인지, 아니면 시즈라는 개인에게 어떤 이유로 반감을 품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의 태도는 대화가 아닌 일방적인 공격처럼 느껴졌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시즈는 아마룬의 무례함에 화를 내거나 불쾌함을 드러내지 않았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도 평온함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아로스는 끝내 참지 못했다.


"무녀님께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


"그래? 잘난 무녀와 함께 사명을 받드는 인간의 실력이 어떤지 한번 구경 좀 해볼까?"


아마룬의 조롱 섞인 말을 시작으로 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둘 사이에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아마룬은 거대한 그림자처럼 그를 내려다보았고, 아로스는 그 시선에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거인의 위압적인 체구도, 망치 같은 눈빛도 그에겐 의미 없었다. 둘 사이엔 침묵만이 흘렀고, 그 짧은 정적은 오히려 날카로운 칼날처럼 위태로웠다.


그러나 먼저 고개를 숙인 것은 아로스였다. 시즈와 노아 앞에서 소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아로스가 먼저 발걸음을 돌리자, 아마룬 또한 그 뒷모습을 잠시 응시하다니 말없이 몸을 돌려 망치를 집어 들고 대장간으로 향했다.


시즈는 아로스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여전히 무거운 기운에 눌린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태고적 존재들이 서로를 향해 품어왔던 깊은 적대감이 얼마나 큰지, 그들 사이에 서 있는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체감하고 있었다.


아로스는 그런 시즈를 조용히 위로했다.


"무녀님이 미워서 하는 말은 아닐 겁니다. 어쩌면 거인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요. 일단, 언령을 확인하러 가시죠."


그 말은 시즈의 가슴에 잔잔하게 내려앉았고, 두 사람은 말없이 본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편, 노아는 대장간으로 향하는 아마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땅을 울리는 거인의 발걸음엔 묵직한 무게가 실려 있었고, 노아는 거인의 거친 말투와 무례한 태도 너머에 무언가 숨겨진 이야기가 있음을 직감했다.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읽지 못했지만 분명 말할 수 없는 사연이 위풍당당했던 거인을 저런 폐인으로 만들었을 거라 생각한 노아는 조심스럽게 아마룬의 뒤를 몰래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한때 황금의 땅으로 불리던 시스테나 전선 북쪽, 카노르 평원은 이제 죽음과 부패의 물결로 뒤덮인 검보랏빛 대지로 변해 있었다. 평원을 떠도는 파도의 악마들은 녹아내린 몸을 질질 끌며 흐느적이는 형체로 생명을 찾아 떠돌았다. 그들의 피부는 기괴하게 일렁이는 점액으로 뒤덮여 있었고, 가끔 들려오는 괴성은 이 땅의 정적을 더욱 음산하게 만들었다. 들짐승들조차 온전한 모습을 잃은 지 오래였다. 뿔과 이빨, 다리마저 비틀려 미쳐 날뛰는 짐승들은 언제든 덤벼들 수 있는 위험 그 자체였다. 이 땅에는 더 이상 이성이 남지 않았다.


그 중심을 향해 누군가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사도 샤비트.


그는 무려 보름 가까운 시간 동안 위험을 무릅쓰고 이 지대 깊숙이 들어섰다. 비록 주교의 은총으로 부패에 대한 저항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 죽음의 땅 한복판에서 오래 버티는 것은 샤비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까지 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계획이 틀어졌기 때문이다.


환시를 품은 자의 등장으로 무녀 납치는 실패했고, 뒤이어 동원한 사냥꾼 부대마저 전멸했다. 모든 준비가 수포로 돌아간 상황에서 샤비트는 결국 대담한 도박을 감행하기로 했다.


시스테나 전선 안쪽의 봉인된 무덤.


그곳은 과거 수많은 병사들과 파도의 악마들이 하나의 소용돌이처럼 뒤엉켜 생매장된 참사의 장소였다. 당시 시스테나의 무녀는 무덤의 위험성을 직감했고, 그곳에 깃든 영혼들을 달래고 넋을 위무하는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무덤 위에 강력한 봉인을 남긴 후 대지에 안식을 부여했다.


샤비트는 그 봉인을 깨울 계획이었다. 5년 전 무녀를 납치한 것은 전혀 다른 의도였으나 계획의 실패는 전선의 봉인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본래 다른 목적을 품고 감행했던 무녀 납치는 예상치 못한 전선의 격렬한 저항으로 근위대가 전멸하고 추적자들까지 큰 피해를 입으며 끝이 났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무녀는 그의 손아귀에 들어왔고, 그것은 지금 이 계획의 실행을 가능케 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실행뿐이었다. 오늘 밤, 파도의 악마들이 전선을 교란시키는 틈을 타 사도 카브르가 봉인을 해제할 것이었다. 봉인이 풀리면 억눌린 원혼들이 하나로 응집된 끔찍한 살덩이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며, 그 괴물은 전선을 급습해 방어선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하게 될 터였다. 만약 무덤을 장악해 원혼들을 지배할 수 있다면 이 전선은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샤비트는 조용히 웃으며 정제된 액체들을 대지 위로 뿌리기 시작했다. 기화한 액체가 그림자가 되어 퍼지면서 어두운 안개가 주변을 집어삼켰다. 땅은 검게 변하며 독기의 숨결에 휘감긴 듯 일렁였고, 저 밑 어딘가에서 울리는 울음소리는 살아 있는 존재라기보단 기억 속의 저주처럼 으르렁거렸다.


"심연의 숨결이 너희를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눈앞의 모든 생명들을 갈기갈기 찢어라!"


샤비트의 목소리가 대지에 메아리치자, 검보랏빛 안갯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땅속을 뒤엎고 기어 나온 파도의 악마들은 썩은 살점과 뒤틀린 뼈로 이루어진 형체들이었다. 그들의 울음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의 정신을 갉아먹는 광기의 진동이었다.


검보랏빛의 물결은 끝없는 파괴를 예고하는 듯이 대지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불꽃으로 반항한들 이번만큼은 버틸 수 없으리라.




노아는 조심스럽게 거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발소리를 죽였지만, 아마룬의 걸음은 느릿하면서도 무거워 일정한 간격으로 땅을 두드리듯 울려 퍼졌다. 전선 한복판이라기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병사들의 움직임도, 감시병의 눈초리도 닿지 않는 이 좁은 구역은 마치 외부와 격리된 독방처럼 고요가 내려앉아 있었다.


그 끝에서 검은 연기를 뿜는 대장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덕의 열기는 담장을 넘어 길가의 공기마저 데울 정도였다. 불길은 벽 틈이며 지붕 사이를 가리지 않고 새어 나왔고, 숨이 턱 막히는 기운이 대장간 내부에서 퍼져 나왔다. 인간이라면 가까이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웠을 그 뜨거움 속으로 아마룬은 거침없이 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그 열기조차 몸의 일부인 듯, 그는 느릿하고도 거대한 동작으로 망치를 들었다.


캉—— 캉——


쇠붙이를 모루 위에 올려놓고 망치가 내려쳐지는 순간, 불꽃이 번쩍이며 공기를 쪼개듯 튀었다. 둔탁하면서도 묵직한 소음이 이어졌고, 그의 망치질은 기계적인 반복이 아닌 일종의 의식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아마룬이 스무 번째 망치질을 하는 순간,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뭔가를 직감한 듯 천천히 망치를 내려놓고 몸을 돌려 대장간 밖으로 걸어 나가는 아마룬의 모습에 노아 또한 그가 사라진 방향을 따라 조심스레 움직였다.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기사로 보이는 누군가가 아마룬의 앞에 서 있었다. 둘 사이엔 설명이 필요 없는 기류가 흘렀고, 곧바로 날 선 말들이 터져 나왔다.


"그 이야기는 다시는 꺼내지 말라고 했잖아!"


아마룬의 목소리는 맹렬한 화덕의 불길마저도 뚫을 듯 멀리서도 울려 퍼졌다.


"난 저들에게서 크게 기대하지 않아! 너는 내가 무엇과 싸워왔는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라!"


노아는 교회 입구 옆으로 몸을 숨긴 채 그 고함을 고스란히 들었다. 분노가 아닌 어떤 오래된 상처가 터져 나오는 소리였다. 주먹을 쥔 채 몸을 떠는 거인의 모습은 흡사 과거와 싸우는 전사 같았다. 그때, 자신을 찾아온 기사를 쫓아내고도 한참을 가만히 서 있던 아마룬은 돌연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 인간!"


거인의 시선에 정조준당한 노아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아까부터 날 따라다니는 거 진작에 알고 있었다. 대장간 뒤로 따라 나와!"


노아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아마룬이 향하는 곳을 따라 움직였다. 잠시 후 대장간 뒤편의 거대한 철문의 그림자 아래에 선 거인과 마주하자, 그 공기는 전혀 다른 온도를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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