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마주하는 발걸음 (1)

무녀의 길을 걷는 여인

by 이샤라
"언령이라고? 개소리하지 마. 그따위 말로 구원받을 거였으면, 카노라스가 그렇게 무너지진 않았겠지. 이 땅에 남은 건 썩은 대지와 독기로 가득 찬 공기뿐이야."

카노라스 출신의 무명의 병사
엘나력 4198년




운명을 마주하는 발걸음




"파도가 다시 몰려옵니다!"


시스테나 전선의 감시탑에서 망을 보던 병사의 외침이 진흙과 피로 눅진해진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에 병사들의 시선이 하나같이 지평선 너머로 향했다. 죽음의 대지, 카노르 평원. 그곳에서 어둠을 타고, 파도처럼 출렁이며 또다시 그것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파도'. 혹은 '파도의 악마들'. 병사들은 그렇게 불렀다.


그들의 모습은 인간의 형상을 닮았지만, 거대한 물결을 치듯 덮쳐오는 흐름 속에서 이제는 인간이라는 호칭조차 부적절했다. 키는 인간만 했으나, 신체는 이미 녹아내리듯 무너지고 뒤틀려 제대로 서 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썩은 살점들이 서로 엉겨 붙어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처럼 꿈틀거렸고, 지나간 자리마다 검보랏빛 점액이 대지를 오염시켰다. 무너져 내리는 그들 위로 또 다른 형체들이 기어올라 한 덩어리를 이루는 모습은 죽은 살점이 억지로 맞물려 꿈틀대는 거대한 흐름과도 같았다.


카노라스의 생존자들은 말했다. 처음 마주했을 때는 그들도 분명 사람과 비슷했다고. 하지만 가까이서 마주하니 미묘한 차이가 있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몸은 부패와 붕괴를 반복하면서 이제는 기어 다니는 흉물로 전락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들의 공포는 여전히 강렬했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검보랏빛 점액은 생사를 가리지 않았다. 사물은 부식되거나 변형되었고, 살아 있는 생명체는 순식간에 온몸이 문드러진 채 이성을 잃고 또 다른 괴물이 되어 주변 모두를 탐식하는 존재로 변했다. 저 지평선 너머에서 몰려오는 놈들 역시 한때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었으리라.


"기름과 불을 준비해라!"


역청과 기름 냄새가 화약 냄새와 뒤섞여 코를 찔렀다.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의 손이 바삐 움직였다. 기름이 가득 담긴 오크통들이 굴러왔다. 기름에 적신 천이 창끝에 묶였고, 거대한 바위와 통나무가 토산 가장자리로 밀려나갔다. 통나무엔 불을 붙이기 위해 역청과 마른 천이 층층이 감겨 있었고, 바위 또한 역청범벅으로 가득했다. 병사들은 칼과 창에 천을 감으며 손을 멈추지 않았다. 한쪽에서는 누군가가 짧게 기침을 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누군가가 빠르게 무기를 정비하며 자신의 장갑을 다시 고쳐 끼었다.


"전열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


"불 붙인 무기 계속 투척해! 각자 창 끝에 불부터 붙여!"


곧이어 괴물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지휘관의 외침이 울렸다.


"나무와 바위에 불을 붙여라!"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통나무와 바위를 덮쳤다. 불꽃이 역청을 집어삼키듯 번졌고, 그 열기를 머금은 거대한 통나무와 바위들이 토산을 타고 괴물 무리로 돌진했다.


콰앙———


지축을 울리는 육중한 충돌음과 함께 불타오르는 통나무와 바위들은 파도의 악마들 속에 쐐기처럼 파고들었다. 불꽃이 터졌고, 검보랏빛 점액이 튀어 올랐으며, 고막을 찢는 비명소리가 번졌다. 그러나 괴물들 일부는 그 안에서도 다시 기어올라왔다. 반쯤 녹은 불붙은 몸뚱이가 한쪽 팔로 흙을 긁으며 토산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토산을 지켜라!"


지휘관의 목소리가 다시 전장을 가르자 병사들은 기름에 젖은 무기를 불태워 파도처럼 밀려드는 괴물들과 맞섰다. 칼과 창이 놈들의 살점을 도려낼 때마다 역겨운 파열음이 터져 나왔고, 상처에서 뿜어져 나오는 점액은 공기 중에 악취와 부패를 번지게 했다. 파도의 악마들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하나둘 무너져 내렸지만 놈들은 쓰러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찢기는 살점에서 점액을 뿜어내며 병사들을 부패시키려 했다.


한 병사가 넘어지면서 손목에 점액이 튀어 순식간에 피부가 문드러지자 옆에 있던 이가 망설임 없는 칼날로 그의 팔을 잘라냈다. 잘려나간 팔을 붙잡고 비명을 지르는 병사의 울음은 이내 전장의 소음 속으로 묻혀버렸다. 또 한 무더기가 토산 아래로 굴러 떨어졌고, 타오르는 몸뚱이에서 튀어 오른 점액과 퍼져 나오는 불씨가 지평선을 태우듯 번져 나갔다.


그날 밤, 시스테나 전선은 동이 틀 때까지 또 한 번 검은 불길 속에서 타올랐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숲을 누비는 발밑에서 나뭇가지가 꺾이는 소리가 이어졌고, 뒤이어 들려오는 기척은 서서히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짙은 숲 속, 그 어둠을 뚫고 거친 숨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다가왔다.


검은 수도복을 입은 젊은 여인은 폐부 깊숙한 곳까지 차오르는 고통을 삼키며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가시덤불에 옷이 찢기고, 나뭇가지가 뺨을 스쳤다. 발목이 돌에 걸려 휘청였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공포와 생존 본능만이 뒤섞여 심장은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미친 듯이 날뛰었으며, 쫓아오는 괴한들의 거친 숨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저쪽이다! 저년을 놓치지 마라!"


누군가의 외침이 숲을 갈랐다. 그 소리에 여인은 이를 악물고 숲의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머릿속으로 지나온 여정의 잔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안식 교회를 향하던 길에서 만난 인간의 탈을 쓴 또 다른 괴물들. 굶주린 시선으로 서로를 노려보던 이들, 수인을 노예처럼 부리며 팔아넘기던 주민들, 부패란 정죄의 이름 아래 은밀히 이뤄지던 처형. 죽은 이들보다 산 자들이 더 끔찍했던 곳이었다. 여인은 몇 번이고 그런 마을을 지나왔으나 마지막으로 머문 곳에서 또다시 인간의 미소에 속고 말았다.


인신매매의 거래는 이미 조용히 시작되어 있었고, 칼을 든 괴한들이 주민들과 함께 그녀를 포위했다. 환영을 만들어내는 이능으로 시야를 흐리며 간신히 빠져나왔지만 놈들은 지독하리만큼 끈질겼다. 바닥난 체력으로 흐트러진 이능은 펼쳐지기도 전에 무너지면서 놈들은 더 이상 환영에 속지 않았다.


더는 달릴 힘조차 남아 있지 않다고 느낀 바로 그 순간, 덩굴과 나뭇가지가 뒤엉킨 숲 너머로 해진 천막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몸을 웅크리듯 멈춰 선 여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살폈다.


안은 죽은 기척으로 가득했다. 희미한 빛 아래 천막은 너덜너덜하게 늘어져 있었고, 바닥은 젖은 먼지로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천막 한쪽 바닥의 풀썩 꺼진 틈 너머, 어두운 동굴의 틈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냉기가 피부를 스치듯 어루만졌다. 아무렇게나 쌓여 있던 구석의 낡은 포대자루 속에선 썩은 음식 냄새가 코를 찔렀고, 다른 한쪽에는 동물의 뼈로 보이는 잔해들이 무심히 흩어져 있었다.


누가 봐도 이곳은 약탈한 물건들을 쌓아놓은 은신처였다. 여인은 엘라리모스로 들어서기 전 마지막 마을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잠시 머물다 가라는 호의 뒤에 감춰진 칼끝, 자신을 옥죄듯 조여들던 괴한들의 그림자. 그리고 세간의 소문을 떠올렸다. 소리 없이 사라진 무녀들, 오랜 침묵 끝에 곳곳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공허의 신도들. 자신을 노리는 이들이 누구인지, 그 배후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더 이상 우연이라 말할 수 없었다.


이곳은 틀림없이 추적자들의 은거지였다.


결과적으로, 여인은 스스로 범의 아가리에 발을 들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위협은 금방 다가왔다. 따돌렸다고 생각했던 괴한들이 이미 천막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고, 동굴 안쪽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졌다. 두 갈래의 그림자가 동시에 조여들고 있었다.


천막 가장자리에서 녹슨 칼자루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낡고 보잘것없는 무기였지만 쉽사리 놈들에게 쓰러질 생각은 없었다. 여인은 조심스레 칼자루를 집어든 채 천막 한쪽에 쌓여 있던 식량 자루 뒤에 몸을 숨겼다.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번졌고, 숨은 절로 억눌렸다. 바깥의 소리를 주시하는 귀에는 조심스레 흙바닥 위로 발을 디디는 무겁고 건조한 구둣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동굴 안쪽과 천막 바깥에서 괴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때 묻은 짙은 옷과 더러움이 눌어붙은 흉기, 습기 어린 불결한 숨결과 묵직한 발걸음. 역시나, 놈들은 추적자들이었다.


여인은 자루 뒤에서 웅크린 채 손아귀에 쥔 칼자루를 더욱 단단히 쥐었다. 심장은 더 이상 두근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식어가는 긴장 속에서 몸의 감각은 더욱 예민해졌다. 추적자들의 시선은 곧장 여인의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는 낮고 느릿했으며, 말투와 걸음마저 여유롭게 보이는 태도는 더욱 섬뜩한 공기를 만들어냈다. 여인은 이미 자신이 발각되었음을 직감했다.


그 순간, 추적자 중 하나가 식량 자루 옆에 멈춰 서자 여인은 칼자루를 쥔 손에서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실 틈도 없이 추적자 한 명이 자루를 걷어차듯 옆으로 밀어내자 숨은 공간이 노출되었다.


"여기 있었군. 숨바꼭질은 끝났다."


낮고 거친 목소리와 함께 천막의 빛바랜 틈 아래로 육중한 그림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크라인. 그는 이곳의 추적자 무리의 우두머리였다. 황소만한 덩치와 배 위로 뒤룩뒤룩 솟은 살덩이는 마치 칼로 저미기만 해도 고깃덩어리가 수십 접시는 나올 것처럼 비대했다. 크라인이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자, 여인은 재빠르게 칼을 휘둘렀다. 본능이 이끈 칼날이 그의 팔을 스쳤고, 녹슨 날이 남긴 상처 위로 신음소리가 짧게 흘렀다.


팔뚝을 감싼 상처를 흘끗 내려다보던 크라인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불쾌한 놀람 위로 모멸감이 차오른다. 마치, 우스워 보였던 상대가 칼을 들었다는 사실보다는 자신이 피를 봤다는 사실에 더 격분한 듯했다.


"감히 날 베어? 이년이 간땡이가 부었——"


그가 팔을 뻗어 여인의 어깨를 짓누르려는 순간, 여인은 그 틈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녹슨 칼에 푸른 이능을 실은 채 몸을 날렸다. 푸른 기운이 일렁이는 칼끝이 사선으로 휘둘러졌다. 그 빛이 크라인의 얼굴을 가르며 지나가자 피보다 먼저 푸른 화염이 상처 위로 번졌다.


"크아아아아아아악—! 이 망할 년이...... 내 얼굴을!"


"더러운 놈들... 한 놈이라도 데려가주마!"


쓰러진 크라인의 목을 향해 칼끝이 내리 꽂히려는 순간, 뒤에서 날아든 손이 여인의 머리채를 사정없이 휘어잡았다.


"아아아아악!"


"크하하하! 제법 날뛰는군. 하지만 여기서 끝이다!"


목소리엔 잔인한 장난기와 악랄함이 뒤섞여 있었다. 여인의 몸이 거칠게 뒤로 잡아당겨지며 바닥에 내동댕이쳐졌고, 손에서 놓친 칼자루는 먼지를 일으키며 바닥을 굴렀다. 추적자들은 저항하는 그녀를 순식간에 에워싸고 제압했다.


"...놔! 그 더러운 손... 저리 치워!"


숨을 몰아쉰 여인이 소리쳤다. 그러나 곧 뒤통수에 기분 나쁜 숨결이 닿았고, 그녀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젖혔다. 정확히 뒤를 향해 온 힘을 실어 박은 뒤통수에 목덜미 냄새를 맡으려던 추적자의 콧잔등이 그대로 부서졌다.


"크윽! 이년이 아직도......!"


신음 섞인 비명이 튀어나오자 또 다른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거칠게 고개를 틀었다.


"그만두는 게 좋을 텐데. 그렇게 반항하면 우리도 곱게 못 넘어가지."


여인은 온몸을 비틀며 저항했지만 추적자들은 점점 더 강하게 그녀를 제압했다. 결국 팔과 다리를 붙잡힌 채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된 여인은 숨을 헐떡이며 그들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차가운 분노와 경멸이 뒤섞인 시선. 하지만 추적자들은 가소롭다는 듯이 음흉하게 비웃었고, 노골적인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반반하게 생긴 년이 괜히 혼자 다니는 것은 아니었구나. 그런데 이제 어쩔 테지?"


"...너희같은 인간들은 그에 맞는 대가를 치를 거야......!"


분노 서린 눈으로 쏘아붙였지만 여인은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두려움이 몰려왔다. 발버둥 쳐도 소용없었다. 한탄스러웠다. 주어진 사명을 두고 고작 이런 곳에서 이토록 비참한 순간을 맞이하다니... 놈들의 손이 점점 가까워지자 몸이 얼어붙었다.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침묵 속에서 흘러내린 눈물 한 줄기가 차가운 바닥에 젖어들었다.


그렇게 이대로 끝이라고 생각하며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그 순간ㅡ


천막이 거칠게 찢겨나가며 바람이 들이쳤다. 그 뒤를 이은 것은 날카로운 함성과 강철의 섬광.


은빛 갑옷과 방패를 를 든 병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안식 교회를 지키는 그들은 안식 교회의 순찰병들이었다. 숲에 남겨진 흔적을 따라 추적자의 은신처까지 추격해 온 병사들의 검이 빠르게 공기를 가르자 추적자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녹슬고 조잡한 무기는 나뭇가지처럼 부러졌고, 동료들이 하나 둘 제압당하자 크라인을 필두로 한 남은 무리는 동굴 지하를 향해 도망쳤다.


잠시 후, 동굴 안쪽 깊은 곳에서 기이한 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기를 가르며 두려움을 불러오는 불길한 울림에 천막 안의 병사들조차 한순간 주춤했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기사는 잠시 동굴의 어둠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도망친 추적자들을 쫓는 대신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여인에게로 향했다. 그는 이 땅에 남은 인간 군상을 두 부류로 나누곤 했다. 절망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자들과 살아남기 위해 기꺼이 절망 그 자체가 되어버린 자들. 저 피리 소리는 명백히 후자의 것이었으리라.


말이 좋아 생존이지, 실상은 짐승만도 못한 길이다. 그렇다면 저 여인은 어느 쪽일까. 지독한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칼을 놓지 않았던 그 눈빛. 그는 내심 답을 정했으나 입을 다물었다. 도움 주는 처지에 물을 것도 아니거니와...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먼저였으니.


"이곳은 위험하다. 서둘러 벗어나야 한다!"


기사의 지시에 병사들은 여인을 부축해 은신처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서늘한 바람이 흙먼지와 땀을 식히며 몸을 감쌌지만 여인은 아직도 등에 닿은 손끝에서 불길함을 느꼈다. 그렇게 은신처에서 한참을 벗어난 후, 기사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걸었다.


"...괜찮으십니까?"


"후... 네, 괜찮습니다.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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