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속에서 싸우는 법 (11)

위령

by 이샤라

아마룬과의 대화를 마친 노아는 두 사람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빠르게 교회로 돌아갔다. 그는 곧장 치료실로 향했지만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주변에 있던 병사에게 물어물어 도착한 곳은 영빈관 너머에 있는 조용한 침실이었다.


조심스레 들어선 방 안에는 은은한 등불이 깜빡이고 있었다. 그 불빛 아래에는 아로스가 시즈의 곁에 앉아 있었다. 시즈는 깊이 잠든 채 미동도 없었다. 전투의 피로와 정신적 탈진이 한꺼번에 몰려온 듯 창백한 얼굴엔 진한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지만, 숨결은 고르게 안정되어 있었다.


아로스는 노아의 기척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잠시 시선을 맞춘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노아는 잠깐 머뭇거렸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눈빛이 여러 번 흔들렸다.


"괜찮으니 말씀하셔도 됩니다."


아로스의 차분한 유도에, 노아는 결심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마룬과 함께... 이그니카로 떠나게 될 것 같아요."


"...그렇군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고, 아로스는 다시 조용히 말을 이었다.


"거인도 알고 있었군요. 파도의 악마들이 자신에게 이끌린다는 것을."


"그걸 어떻게 알고 계셨나요?"


"저는 어림짐작으로 알고 있었을 뿐이지만... 병사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소문이 도는 모양입니다. 물론 그를 감사히 여기는 이들도 있지만, 왜 진작 오지 않았는지에 대한 분노를 품은 이들도 있습니다.


"그렇군요..."


"지금 당장 무녀님과 억지로 이야기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새벽이면 깨어나실 테니, 그때 작별 인사를 해도 늦진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노아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천천히 문을 닫고 나갔다.


늦은 새벽, 시즈는 조용히 눈을 떴다. 온몸을 짓누르던 피로는 조금 가셨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고, 어깨에 얹힌 슬픔은 아직도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이마를 짚고 앉은 채 한동안 침묵하던 시즈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교회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오르며 불어오는 새벽바람은 살갗을 스쳐 날카로웠고, 그 차가움이 오히려 정신을 맑게 일으켜 세우는 듯했다.


옥상 문을 밀자, 안개 자욱한 하늘 아래로 날 선 공기가 폐부를 파고들었다. 난간 너머에는 먼저 와 있던 아로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허리를 반쯤 기댄 채,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희미한 횃불 아래 그의 갑주는 빛을 받아 붉게 반사되었고, 그 실루엣은 새벽의 고요 속에서 더욱 묵직하게 다가왔다.


아로스는 무녀복도 입지 않고 올라온 시즈의 모습에 침묵을 깨며 말했다.


"깨어나자마자 올라오신 겁니까."


"늦지 않게 올라와서 다행이죠. 귀공께서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시즈는 조용히 답한 뒤, 난간 가까이에 멈춰 섰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아무 말 없이 새벽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이제 괜찮으신 겁니까."


아로스의 물음에 시즈는 고개를 숙이지도, 끄덕이지도 않았다. 다만, 기도를 마치고 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손을 잡았을 때, 너무 많은 것이 보였어요. 공포와 고통, 끝없는 절망... 그리고 두려움이 제 손끝으로 밀려들었죠. 그 순간... 저는 제가 너무 무력하다고 느꼈어요."


시즈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머릿결이 찬 바람에 흩날렸지만, 그 감각조차 잊은 듯 고요했다. 아로스는 조용히 돌아선 뒤 옆에 걸려 있던 담요 하나를 집어 들어 조심스럽게 시즈에게 건넸다. 담요를 두르자 따뜻함이 새벽의 냉기를 밀어냈고, 그 온기는 잠자코 그녀의 등을 감쌌다.


"비록 그 병사의 생명을 제가 거뒀지만... 무녀님 덕분에 그의 마지막 순간만큼은 편안했을 겁니다. 모두가 뒷걸음질 치던 그 자리에서 무녀님만이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키셨으니까요."


"......정말 그랬을까요."


시즈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말은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했다.


아로스는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그 병사의 얼굴... 비록 절반밖에 남지 않았었지만, 마지막에 무녀님을 바라보던 표정을 저는 기억합니다. 그건 분명히 감사였습니다."


아로스의 말은 시즈의 마음에 작은 파문을 남겼다. 모든 것이 가라앉는 새벽, 그 말은 겨우 수면 위로 떠오른 한 줄기 온기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위로는 받아들이되, 다시 길을 걸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듯이. 앞으로의 여정이 얼마나 더 가혹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 무엇인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동이 트면 노아는 떠날 겁니다."


"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가요?"


아로스의 말에 시즈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속에는 이미 많은 것을 받아들인 기색이 담겨 있었다.


"거인과 함께 떠날 겁니다. 노아가 그에게 허락을 받아낸 것 같더군요."


그는 시즈를 향해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쓰러져 계셔서 상황을 모르셨겠지만, 지금도 저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파도의 악마들은 거인에게 이끌리고 있습니다. 그가 지닌 엘나의 힘 때문이겠지요."


아로스의 말에 시즈는 천천히 전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타오르는 불꽃 방책 앞으로, 아마룬은 홀로 주저앉아 있었다. 거인의 거대한 실루엣은 마치 대지에 뿌리내린 고목처럼 미동도 없었고, 그 앞으로는 수많은 파도의 악마들이 불나방처럼 불길 속으로 몸을 던지고 있었다.


"...귀공의 말씀이 사실인 것 같네요."


"그래서 아마룬은 전선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디로 떠난다고 이야기하던가요?"


"이그니카로 향할 겁니다. 노아가 함께 떠난다는 건, 그의 목적지도 같다는 뜻이겠죠."


"그렇겠군요..."


시즈는 말끝을 흐리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노아가 떠난다는 사실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고, 가슴 어딘가가 순간 움찔하며 조여왔다. 그러나 더 깊이 흔들린 것은 마음 한켠에서 피어난 아쉬움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노아가 보여준 웃음과 열정, 공허의 신도들과 맞서 싸우던 단단한 의지가 또렷이 떠올랐다. 그 기억들은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흔적이었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시즈와 아로스는 여전히 언령의 흔적을 따라 끝을 알 수 없는 길을 걸어야 했지만 노아는 처음부터 이그니카를 향하고 있었다. 그의 여정은 애초에 다른 길이었다. 아마룬과 함께라면 노아를 보다 빠르게, 보다 안전하게 목적지에 닿을 수 있을 터. 그것이 그의 선택이라면 시즈는 응원해주어야 했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며 하늘을 바라보던 그때, 노아가 조심스럽게 옥상으로 올라왔다. 그의 얼굴에는 미안함과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시즈는 어색하게 시선을 떨구는 노아에게 먼저 다가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이야기 들었어요. 동이 트면 떠나신다면서요."


노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정해졌어요."


"그래도 거인께서 함께 하시니... 그나마 안심이에요. 적어도 혼자보단 훨씬 나을 테니까요."


"저도 그 점에선 정말 다행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이건 작은 선물이에요."


노아는 조심스럽게 들고 온 가방을 열었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의약품, 그리고 두 사람과 말을 위한 각각의 전용 마스크가 두 개 씩 담겨 있었다.


"카노르 평원의 독기를 버티시려면 꼭 필요하실 거예요."


시즈는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언제 이런 걸 다... 정말 고마워요."


"아니에요. 제가 두 분 덕분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배웠는데요."


노아는 쑥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시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웃음을 지켜보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함께한 시간의 잔상이 마음을 파고들었다. 서로가 곧 다른 길을 걷게 되리라는 것을 알기에, 그녀의 미소에는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아쉬움이 스며 있었다.


잠시 뒤, 교회 뒤편에서 커다란 불꽃이 치솟았다. 어두운 하늘은 붉게 물들었고, 마치 대지를 품었던 용기들이 하늘로 되돌아가는 듯했다. 시스테나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마련한 제의(祭儀)는 단순한 의례가 아닌 전날 처절한 전투 속에서 산화한 이들을 위한 마지막 작별이었다.


그 불꽃은 단순한 화염이 아니었다. 삶을 바쳐 싸운 이들의 영혼이 속박에서 벗어나 하늘로 오르는 상징이자, 남은 자들이 바치는 침묵의 경례였다. 거대한 장작더미 위로 올려진 유해들과 검은 깃발들은 불길 속에서 천천히 사라졌고, 남겨진 자들은 그 순간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불을 응시했다.


불길은 바람에 흔들리며 일렁였고, 그 춤처럼 번지는 붉은빛 아래에서 죽은 자들과 산 자들 사이의 거리는 조금씩 좁아지는 듯했다. 그것은 이별인 동시에 삶을 이어가는 자들의 맹세이기도 했다.


세 사람은 말없이 교회 뒤편으로 내려갔다. 그곳엔 2백여 명의 병사와 기사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모두가 고개를 숙인 채 불꽃 속에서 이승과 작별하는 이들을 기리고 있었다. 그들이 둘러싼 중앙에는 거대한 묘비가 서 있었지만 무덤은 없었다. 대부분의 전사들이 부패에 잠식되어 육신조차 수습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흙이 아닌 불에 묻혔고, 그 불꽃을 따라 하늘로 올랐다.


묘비에는 이름 없는 자들의 희생을 기리는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희생은 헌신의 증거이며, 두려움은 그 빛을 가리지 못하리라.


그 문장은 오래전부터 시스테나 교회에 전해 내려오던 가르침의 구절이었다. 시즈와 노아, 아로스도 묵묵히 그들 뒤에 섰다. 침묵은 무거웠으나, 불꽃이 갈라지는 소리와 타오르는 기운은 어쩐지 위안을 주는 듯했다. 슬픔의 끝에서도 마지막까지 싸운 자들을 보내는 위엄이 있었다. 그 누구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곳에 있는 모두가 이 작별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잠시 후, 가장 앞줄에 서 있던 한 기사가 걸음을 옮겨 시즈에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은 침착했지만 깊은 상실이 스며 있었다. 기사는 투구를 벗어 가슴에 안고, 조용히 그녀에게 말을 꺼냈다.


"무녀님께...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말씀하세요."


"전사자들의 마지막 여정을 위한 기도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기사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말을 던지는 그 순간까지 누르고 있었던 감정이 묻어났다. 상실과 비통, 그리고 무력함이 엉켜 있었다. 시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망설임은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기사와 함께 제단 쪽으로 걸어 나섰다.


제단 앞에 선 시즈는 고요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잿빛 구름 아래 숨조차 가쁘던 지난날들과 달리, 오늘의 하늘은 지금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청명하고 맑았다. 불길에 달아오른 공기가 여전히 눈앞을 감쌌지만 그녀는 고요히 그 안에 서서 숨을 가다듬고 두 손을 모았다.


시간마저 멈춘 듯한 침묵이 흐르면서 시즈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낮고 잔잔한 음성으로, 기도를 시작했다.



"깊은 어둠을 지나 이곳에 닿은 이들이여.

이름 없는 밤에 스러진 자여.

두려움 속에서도 검을 들었던 자여.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가슴에 품고 떠난 자여.

이제는 고통의 쇠사슬을 풀고 엘나의 숨결이 깃든 곳으로 걸어가십시오.

남은 이들은 그대들이 남긴 싸움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대들의 용기 덕에 우리의 삶이 이어졌으니,

절망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 걸어가겠습니다.

피로 씻은 영혼이 안개의 강을 건너 평안의 언덕에 이르시길.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머니의 품처럼 넓고 조용한 곳으로 가시길."



시즈의 기도는 어둠을 가르듯 전장 위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어둠을 가르는 촛불처럼 그녀의 음성은 병사들의 무거운 어깨를 어루만졌고, 불꽃에 휩싸인 전사들의 영혼에 닿아 그들을 조용히 위로하는 듯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부드럽게 퍼지자 잔혹했던 전장의 하늘은 그 울림 아래 조용히 가라앉았다.


평소라면 검은 연기와 독기로 뒤덮여 숨조차 버거웠을 시스테나 전선의 하늘.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시즈의 기도는 부드럽고 맑은 울림으로 퍼져가며 전선에 잠든 모든 영혼들의 넋을 조용히 달래고 있었다.


기묘한 정적 속, 병사들 중 누군가는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투구를 벗은 채 고개를 숙이는 이도 있었고,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 이도 있었다. 불꽃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지만 그 앞에서 우는 이는 없었다. 울음이 아닌 기도와 기억으로 그들을 배웅하는 시간.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말없이 같은 바람을 빌었다.


시즈는 기도를 마치며 가슴에 고요한 숨을 품은 채 천천히 제단 아래로 돌아섰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어깨로 바람이 스쳤고, 그 안에 흩날리는 영혼의 기척이 담겨 있는 듯했다.


오늘의 이 기도가... 죽은 자들을 위한 마지막 길이자 남은 자들을 위한 새로운 시작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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