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주인
"이곳은... 대체......"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에 시즈는 점차 확신했다. 현실이라기엔 지나치게 낯설고도 신비로운 이곳은 그녀가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세계였다. 그것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었다.
세계수의 잔영(殘影).
이곳의 모든 생명은 그 근원에서 흘러나온 듯 이어져 있었다. 뿌리들은 서로 얽혀 땅속 깊이 맥락을 이루었고, 숲 전체가 거대한 하나의 존재처럼 맥동하고 있었다. 그 흐름은 단순히 숲과 나무에서 끝나지 않았다. 숲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힘줄이 마치 실처럼 얽혀 어디론가 이어지는 듯했고, 시즈의 시선은 자연스레 공터 너머로 끌려갔다.
그곳에는 거대한 호수가 있었고, 그 위로 아로스의 몸이 조용히 떠 있었다. 잔잔한 물결이 주위를 감싸며 마치 호수 자체가 그를 품고 있는 듯했으나, 그는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로스...!"
시즈의 발걸음이 본능처럼 앞으로 향하자, 오미누스가 무심히 손을 들어 앞을 가로막았다.
"...멈춰."
그 무심한 한마디와 동시에 공기가 변했다. 숲을 감싸던 청록빛의 결이 거칠게 흔들리더니, 공기 속에 스며 있던 생명의 향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 그리고 바람이 불었다. 고요하면서도 결코 자연적인 흐름이 아닌, 긴 시간 동안 이 땅을 굽어보던 누군가의 오래된 숨결 같았다.
시즈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드는 순간, 그곳에는 이미 누군가 나타나 있었다.
공간을 가르는 듯한 발걸음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존재는 어디서 온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존재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마치 대지가 엎드리듯 숲이 응답했다. 잎이 흔들리고, 바람이 춤을 추며, 짐승들마저도 그 발걸음을 맞이하는 듯했다.
그는 자연과 하나 된 자였다.
복식은 옷이라기보다 숲의 일부처럼 보였다. 바람과 나뭇잎, 햇살이 어우러져 빚어진 듯한 조화. 날렵하면서도 유연하고, 엄숙하면서도 부드러운 흐름은 숲과 완벽히 어우러져, 마치 이곳이 그를 위해 존재하는 듯 보였다. 그 또한 다른 신들처럼 기묘한 형상의 가면 너머로 자신의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하지만 가면 너머로 뿜어져 나오는 존재감은 숲의 숨결이자, 동시에 범접할 수 없는 신적 위압에 가까운 힘이었다.
순간, 오미누스가 무릎을 꿇었다. 검은 망토가 흘러내리며 땅에 스쳤고, 그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예를 갖추었다.
"라사리아 님."
그 이름과 함께 고개를 숙이자, 녹빛으로 물든 가면 아래로 보이지 않는 시선이 흘러내렸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읽을 수는 없었으나 오미누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라사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오미누스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고, 이어서 신의 시선은 옆에 서 있는 시즈에게로 옮겨졌다.
시즈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라사리아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초록과 금빛이 희미하게 뒤섞인 부드러운 천, 흘러내리는 폭포처럼 몸을 감싸고 있는 옅은 태양빛을 머금은 듯한 긴 머리카락. 손끝에조차 바람이 잔잔히 일렁이는 듯 보이는 그 모습은 마치 숲이 빚어낸 정령처럼 비쳤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여는 순간, 유려한 인상과는 전혀 다른 서늘한 한기가 스며들었다.
"네가 걱정하는 필멸자는 지금 무사하다."
말은 안심을 주었지만, 그 안에는 따뜻함이 전혀 없었다. 시즈의 시선은 호수 중앙에 떠 있는 아로스를 붙들었다. 가슴이 조여 오는 듯한 감각과 더불어 미동조차 없는 그의 모습은 불안을 더욱 키웠다.
"정말... 정말로 괜찮은 게 확실한 건가요?"
불안을 이기지 못한 시즈가 한 발 앞으로 나서자, 라사리아는 가면 너머의 시선으로 호수를 뚫어보듯 바라보다가 차분히 대답했다.
"무모한 짓을 했더군. 죽지 않은 것이 기적이다."
차갑고 짧은 대답 뒤로, 날카로운 시선이 다시 시즈에게 향했다.
"너 또한 마찬가지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것이지?"
라사리아의 물음은 단순한 질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즈의 내면을 꿰뚫어 보려는, 신의 시선에서 던져지는 질문처럼 다가왔다.
"그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조용히 내뱉은 한마디에 라사리아의 시선이 가면을 꿰뚫듯 머물렀고, 시즈는 숨을 길게 들이마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언제나 저를 지켜줬습니다."
수없이 스쳐간 순간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검을 휘두르며 아로스가 자신의 앞에 선 순간, 어둠 속에서도 등을 돌리지 않았던 순간, 상처를 입고도 한 번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던 순간들. 그 모든 기억이 잔잔한 물결처럼 되살아났다.
"이번만큼은... 제가 그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시즈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 일렁이던 감정만큼은 꺼내지 않았다. 단순한 부채감이 아니었다. 언제나 그의 등 뒤에 숨어 보호받던 나약한 과거와의 결별이자, 그를 잃는다면 자신의 세상 또한 무너질 것이라는 선명한 공포가 만들어낸 필연적인 선택이었으리라. 그 감정은 너무도 깊숙이 내면에 자리 잡았기에 이 차가운 신 앞에서 내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을 마음속에 감춘 채 담담한 표정으로 라사리아를 마주했다.
마지막 말이 숲의 공기 속으로 스며들자, 라사리아의 시선은 다시 호수 한가운데 떠 있는 아로스에게로 옮겨졌다. 그의 시선이 머무는 동안 숲은 숨을 죽인 듯 고요해졌고,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짧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조금 뒤면 깨어날 것이니, 그때 호수에서 데리고 나가라."
차가운 대답을 끝으로 라사리아가 시선을 거두자 그의 형체는 바람 속에 스며들 듯 희미해졌다. 라사리아는 사라지기 직전 잠시 오미누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오미누스 또한 짧게 숨을 들이쉰 뒤 당연하다는 듯 시즈 곁을 떠나 숲 속으로 사라졌다.
남겨진 것은 고요한 숲과 잔잔한 호수, 그리고 두 사람뿐이었다.
시즈는 조용히 호수로 걸어 들어갔다. 맑고 투명한 물결이 그녀의 발끝을 감싸며 부드럽게 흔들렸다. 호수는 깊었지만, 신비롭게도 그에게 향하는 길은 얕았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려온 것처럼 허리춤까지만 물이 차올라 있었다. 발걸음이 물을 가를 때마다 수면은 넓게 흔들리며 반짝였다. 깊은 곳에서부터 희미한 빛이 일렁이며 살아 있는 듯 호흡했고, 어느덧 중심에 있는 아로스에게 닿았다.
그는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무수한 전투와 희생이 새겨진 흉터투성이의 갑옷, 흐트러진 회색빛 머리칼이 물 위에서 천천히 흩어졌다. 얼굴은 평온했으나, 동시에 너무도 지쳐 있었다.
시즈는 떨리는 손끝으로 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차가운 물에 젖은 피부 위로, 여전히 살아 있는 온기가 느껴졌다.
"...아로스."
속삭임과 함께 그녀는 아로스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 순간, 잔잔했던 호수의 수면이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떨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눈이 열리고, 흐릿한 시선이 시즈를 향했다.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던 그의 입술이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무녀님?"
희미하지만, 너무도 그리운 목소리였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아로스는 여전히 지쳐 있었고, 더 말할 힘은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시즈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눈가에 눈물이 맺혔으나 그녀는 애써 감추려듯이 미소 지었다.
"우리... 잠시만 이대로 있을까요......?"
그 말과 함께 시즈는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고, 아로스는 저항하지 않고 조용히 몸을 맡겼다. 주변에서는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수면은 은은하게 빛을 머금었다. 숲은 잔잔한 나뭇잎의 속삭임을 흘려보냈다.
세상은 여전히 거칠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에서 멀리 떨어진 듯했다. 물결에 잠긴 발끝에서부터 전해지는 온기가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듯 감싸 안았다.
심연 깊숙한 곳, 검게 일렁이는 거대한 웅덩이가 있었다. 그 안에서는 수십 마리의 심연의 생명체들이 부산하게 몸을 뒤집으며 기어 다녔다. 어둠과 부패가 뒤엉킨 물결 속은 끊임없이 꿈틀거렸고, 그 중심부에는 그리즈마가 웅크린 채 상처투성이의 몸을 묻고 있었다.
라그나르에게 잘려나간 팔은 간신히 돋아났으나 바르그에게 물어 뜯긴 목과 상체는 여전히 회복이 더뎌 흉측하게 속살과 내장이 드러나 있었다. 평소 같았더라면 주위에서 살점을 뜯으려 몰려든 벌레 같은 존재들을 진작에 삼켜버렸을 테지만 목구멍이 찢긴 지금은 씹는 일조차 힘겨워 그저 파리 떼를 쫓듯 허우적일 뿐이었다.
그때, 웅덩이 가장자리에서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이런, 이게 무슨 꼴이야?"
목소리의 주인공은 모르티아였다. 그녀는 치명상을 입은 채 돌아온 그리즈마를 보자마자 재밌다는 듯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너, 그 늑대를 얕봤군. 꽤나 깊이 물린 것 같은데?"
여유롭게 웅덩이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자신을 망가진 장난감처럼 바라보는 그 모습에, 그리즈마는 분노와 수치심이 눈동자에 이글거렸다. 하지만 목구멍이 찢어진 탓에 그것을 말로 토해내기는 쉽지 않았다.
모르티아는 한참을 깔깔대다 이내 웃음을 거두었다. 가면 아래의 표정이 굳어버리자, 공기 속에 스민 기운은 단번에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입으로는 제법 강해 보이더니, 정작 실상은 허세뿐이었잖아?"
모르티아는 무심히 손을 뻗어 검은 웅덩이 속에서 기어 다니던 작은 생명체 하나를 집어 올리더니, 손가락으로 눌러 터뜨렸다. 피할 새도 없이 압살 당한 그 형체는 검은 액체로 변해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너에게서 도움을 받을 건덕지도 없을 것 같네. 그 상태로는 당분간 쓸모없을 테니 말이야."
그리즈마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자신을 도구로 취급하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반발심이 일었지만, 지금은 반박할 힘조차 없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웅덩이를 내려다보던 모르티아는 곁을 스쳐 흐르는 거대한 뿌리에 손길을 얹었다. 단단한 껍질을 손톱으로 가르자, 마치 혈관이 터져나가듯 검은 액체 속에서 미약한 대지의 정수 조각들이 흘러나왔다.
"세계수의 뿌리..."
낮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감탄이라기보다 확인에 가까웠다. 심연 깊숙이까지 뻗어내려 온 이 뿌리는 지상의 세계수가 내린 마지막 생명줄이었다. 본래라면 순환과 생명을 지탱했던 존재의 일부였으나, 그녀의 손 안에서는 다른 의미로 쓰일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르티아가 갈라진 틈새에 손을 깊숙이 찔러 넣자, 삽시간에 심연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거대한 뿌리를 감싸던 공간은 요동쳤고, 그 진동에 이끌리듯 심연의 어둠 속에서 울루니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모르티아의 명을 받아 대지의 기운을 수확하러 지상으로 올라간 이들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모습은 전과 달랐다. 보통은 태고의 기운으로 몸이 조금씩 문드러진 정도에 그쳤지만, 이번에는 처참했다. 사지가 뒤틀린 채 붙어 있거나, 몸의 절반이 녹아내린 자, 흉측하게 내장을 드러낸 자들까지 있었다. 그리고 일부는 끝내 돌아오지조차 못했다.
모르티아는 서둘러 그들이 가져온 석관을 열었다. 검은 깃털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뚜껑이 들리자, 흘러넘쳐야 할 기운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희미한 파동은 운반한 이들의 희생을 조롱이라도 하듯 가볍게 흩날렸고, 그녀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울려 퍼졌다.
"이게 전부란 말이야?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이것밖에 없는 거지?"
그 말에 존재들은 병든 짐승처럼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모르티아의 시선을 붙잡은 자가 있었다.
"...팔은 왜 그 모양이지?"
모르티아의 관심은 울루니아 하나에게 향했다. 그는 잘려나간 팔을 움켜쥔 채 몸을 떨고 있었다. 심연에서라면 금세 돋아났어야 할 상흔이었음에도 본래의 터전으로 돌아온 지금 공허한 빈자리는 메워지지 않았다.
"잘린 팔이 아직도 돋아나지 않는군. 태고의 기운 때문인가?"
울루니아는 몸을 움찔 떨더니,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아니다. 태고의 기운 때문이 아니야."
"그럼 뭐야? 너희들은 중간에 '그들'에게서 양도받을 뿐이잖아. 기운의 위치를 찾아내는 것도 흔적만 남길뿐이라 직접적으로 몸에 닿을 일도 없을 텐데?"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가 품은 두려움은 매일같이 겪어온 위협과는 전혀 달랐다. 결코 몸에 익을 수 없는 낯선 기운이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다.
"...우리가 태고의 기운을 인계받고 돌아가던 와중에, 낯선 존재가 나타났다.”
"낯선 존재?"
"너무 순식간이어서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온몸을 검은 로브로 감싸고 있었지. 그리고 거대한 칼날을 지니고 있었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공간이 일순 정적에 잠기며 분위기는 단숨에 싸늘해졌다.
"거대한 칼날?"
"...그렇다."
울루니아는 잘려나간 팔을 내려다보았다.
"그 칼날이 내 팔을 벴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잘린 감각이 아닌... 내 일부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심연으로 돌아왔는데도 전혀 회복되질 않아. 마치... 마치 내 존재 일부가 완전히 소멸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