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이 잠든 땅 (5)

잃어버린 자애

by 이샤라

시즈는 '엘라마가 길을 열어주길 원했다'는 말에 심장이 요동쳤고, 입술을 깨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엘라마라는 거인이, 아직 이곳 어딘가에 살아있는 건가요?"


라사리아가 가면 뒤에서 시즈를 곧장 바라보았다. 눈빛은 보이지 않았으나 시선만으로도 형언하기 어려운 압박이 쏟아졌다. 그것은 단순한 경계가 아닌, 적의와 불신이 고스란히 담긴 듯한 지독하게 날 선 기척이었다.


숨이 막힐 듯한 시선에 시즈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떨구었다. 가면 뒤에서 흘러나온 차갑고 매서운 기운이 그녀를 꿰뚫고 지나가자 마치 마음속 깊은 곳까지 읽히는 듯한 서늘함이 스며들었다. 영혼의 밑바닥까지 샅샅이 훑어내는 듯한 서늘한 감각. 감추고 싶은 비밀조차 낱낱이 파헤쳐지는 기분에, 저도 모르게 호흡이 가빠져 왔다.


그 모습을 본 아로스가 라사리아를 향해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눈빛을 던졌다.


"허... 다 죽어가던 놈을 살려줬더니 기가 차는구나."


시즈와 아로스를 차례로 날카롭게 훑어본 라사리아는 깊은 숲 속을 향해 등을 돌렸다.


"너희 둘이 이곳에 들어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따라와라. 보여줄 것이 있으니."


시즈와 아로스는 잠시 망설였으나 곧 발걸음을 옮겨 라사리아의 뒤를 따랐다. 그때 미사가 불쑥 앞으로 나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분들을 어디로 데려가려는 건데요?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미사의 머리 위로 나뭇가지와 함께 무언가 떨어졌다. 나무 위에서 뛰어내린 것은 오미누스였다. 검은 로브를 두른 채 기척조차 없이 나타난 그의 모습은 순간적으로 실체 없는 그림자와도 같았다. 감정이라곤 비치지 않는 외눈의 시선이 미사에게 곧장 꽂히자, 그녀는 겁에 질려 본능적으로 헌의 등 뒤로 숨었다.


그 광경을 본 시즈가 잠시 뒤돌아보며 두 사람을 향해 짧은 눈빛을 건넸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 대신의 신호였다.


라사리아는 아무 말 없이 숲의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즈와 아로스가 그 뒤를 따르자, 오미누스 또한 그림자처럼 발소리 하나 없이 따라붙었다.


아로스와 시즈는 라사리아의 발걸음을 따라 숲의 심부로 들어섰다. 이미 울창했던 생명의 숲은 그 깊이에 따라 전혀 다른 차원을 드러냈다. 수천 년의 세월을 품은 듯한 고목들이 거대한 기둥처럼 뻗어 있었고, 굵은 뿌리들은 대지를 움켜쥐듯 엉켜 땅속으로 사라졌다.


바람조차 스며들지 않은 고요 또한 결코 죽은 적막이 아니었다. 땅 밑에서 울려 나오는 듯한 은밀한 맥박이 숨결처럼 진동하며, 온몸을 감싸는 감각은 숲 자체가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속삭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라사리아가 마침내 걸음을 멈춘 순간, 눈앞의 숲이 거대한 장막을 열듯 갈라졌다. 탁 트인 공간 한가운데, 세상을 지탱하듯 우뚝 선 한 그루의 나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는 숲의 심장부라 불러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경이로운 거목이었다. 끝을 알 수 없이 솟아오른 줄기는 작은 산맥과도 같은 위압을 품었고, 사방으로 퍼진 가지들은 천장을 이룬 듯 하늘을 가렸다. 가지와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빛은 푸른 기운과 햇살이 뒤섞여 눈부신 장막을 이루었으며, 초록빛 대지 위에는 물결처럼 흔들리는 광휘가 흩날렸다. 촉촉한 흙내음과 나뭇잎의 은은한 향이 빛과 함께 스며들면서 대지의 맥박을 더욱 선명히 만들었고, 그 아래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자연의 힘과 위엄이 뼛속까지 파고들어 숨조차 가쁘게 만들었다.


그 장엄한 거목의 틈새에서, 두 사람은 더욱 압도적인 존재와 마주쳤다.


여인의 형상을 거대한 존재는, 마치 생명의 원천을 품고 잠들어 있는 듯했다. 하반신은 대지 깊숙이 파묻혀 뿌리와 한 몸을 이루고 있었고, 상체만이 땅 위로 드러나 있었다. 눈을 감고 고요히 나무에 기대어 있는 모습은 죽음이 아닌 오랜 세월을 가로질러 이어져 온 긴 잠의 형상에 가까웠다. 대지를 감싸는 그 부드럽고도 장엄한 기운은, 마치 세상의 시작부터 존재해 온 태초의 어머니를 마주하는 듯했다.


그러나 잠들어 있는 존재에는 깊은 상흔이 남아 있었다. 복부와 왼쪽 가슴을 가로지르고, 관자놀이로부터 시작해 목을 따라 어깨까지 내려온 커다란 균열. 그것은 단순한 외상의 흔적이 아닌, 마치 죽음의 손아귀로 끌어내리려 했던 존재가 남긴 치명적인 흔적처럼 보였다.


그 광경에서도 가장 눈을 사로잡는 것은 깨진 복부의 상흔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물이었다. 투명한 정수 같은 액체가 끊임없이 몸 밖으로 흘러내리며 대지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고, 그 물줄기는 곧장 뿌리 깊은 나무로 흘러 들어가 숲 전체를 살아 있게 하는 원천이 되고 있었다. 이 숲을 감싸는 힘, 이곳이 지금껏 살아 숨 쉬는 까닭.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생명의 흔적이 숲을 지탱하는 기적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눈앞의 존재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아로스와 시즈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대지의 어머니, 엘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 홀연히 사라진 마지막 생명의 거인.


엘라마.


라사리아는 말없이 거대한 고목의 중심을 바라보았다. 잎새 사이로 흘러든 빛은 엘라마의 몸을 타며 만들어진 호수 위에서 잔잔히 일렁였고, 공기에는 깊고도 무거운 정적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품어온 비밀을 드러낼 때가 되었음을 느끼고 있었다.


아로스와 시즈는 그 침묵을 방해하지 않았다. 이곳이 단순한 안식처가 아님을, 그리고 눈앞에 잠든 이 존재가 단순한 유해가 아님을 본능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시선이 거대한 형상에 머무른 순간, 라사리아의 목소리가 차갑고도 무거운 물음처럼 울려 퍼졌다.


"너희는 저 존재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


"이 거인이 혹시... 엘라마인가요?"


시즈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라사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안개의 땅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생명의 거인... 그리고 엘나가 잃어버린 일부지."


대답이 떨어지자, 시즈는 다시 눈앞의 존재를 바라보았다. 오래도록 전설로만 내려오던 거인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안식에 들어 있었다. 라사리아는 엘라마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낮고 느린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불의 심판... 세상이 불길에 휩싸이기 직전, 엘나는 단순히 파괴된 것이 아니었다. 본질이 결여되었지."


"본질이... 결여되었다니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시즈의 당황 섞인 물음에도, 라사리아의 목소리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엘나는 본래 대지의 순환을 지켜보는 존재였다. 창조주이면서도 스스로 개입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지. 그러나 욕망에 눈먼 이들이 그 힘을 탐하여 강제로 끌어내자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며 산산조각 났다.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았으나, 더는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엘나는 무엇을 잃은 것인가요?"


잠시의 정적이 흘렀다. 숲을 감싸던 바람마저 숨을 죽인 듯한 순간, 라사리아는 단호히 입을 열었다.


"자애(慈愛)."


그 단어 한마디에, 아로스와 시즈의 눈빛이 흔들렸다.


"과거의 엘나는 대지를 형성하고 그 안의 창조물을 아꼈으며, 생명들이 자유롭게 태어나고 순환하도록 품어주었다. 하지만 강제로 대지로부터 뜯겨나간 순간, '만물의 어머니'로서의 감정을 잃어버렸지. 지금의 엘나는 이 땅의 생명들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말씀대로라면... 설령 엘나가 온전히 돌아온다 해도—"


"지금 살아 있는 것들을 고려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라사리아는 가차 없이 시즈의 말을 끊으며 답을 이어갔다.


"남아 있는 모든 생명은 더 이상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지금까지 저희의 여정은... 대체 무엇을 위한 건가요?"


"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언지 알고 있다. 당장 엘나를 되돌리는 것이 옳은 일인지, 그 판단조차 불가능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엘나를 찾아야 한다."


라사리아의 말이 무겁게 내려앉자, 아로스와 시즈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 길의 끝에 기다리는 것이 결코 단순한 해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엘나를 찾는다는 것은 곧 세계의 종말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였고,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었던 아로스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따지듯 물었다.


"당신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길을 우리더러 무슨 이유로 가라는 겁니까?”


"망설임은 당연하다. 너희는 세계의 안위를 위해 떠났으니까. 하지만 엘나를 찾는 일이 오히려 그 세계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 두려운 것이겠지."


"사선의 강에서 언령을 듣고 다시 대지로 돌아왔습니다. 내가 죽어서까지 이 땅으로 돌아온 이유가 세상을 멸하기 위함이란 말입니까?!"


아로스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한 채 라사리아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그러나 눈앞의 신의 태도는 한점 흔들림 조차 없었다.


"저희가 찾으려는 것이... 정말로 대지를 구원할 것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면, 이 여정을 이어가야 할 이유가......"


시즈가 고개를 떨군 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라사리아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세계는 이미 무너지고 있다. 너희 스스로 목도하지 않았느냐? 대지는 부패로 썩어가고, 심연 속에서 기어오른 간악한 죄인의 피조물들이 무수한 생명을 앗아가고 있지 않더냐? 적어도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누구보다도 너희가 잘 알고 있을 터."


아로스와 시즈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타리안에서 라그나르와 나눴던 대화였다. 추락한 여신 모르티아와 사자들. 라사리아가 지칭하는 탐욕에 눈먼 죄인들은 바로 그들이었다.


"과거의 간악한 죄인이라면... 모르티아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 이름을 내 앞에서 내뱉지 마라!"


차갑고 담담하던 목소리에 거대한 분노가 얹혔다. 숲의 공기가 흔들릴 만큼 강렬한 울림 속에 담긴 감정은 단순한 적개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래도록 품어왔던 증오와 지울 수 없는 상처가 겹쳐진 울분이었으며, 그 울분은 자연의 온기를 머금은 신의 형상마저 뒤틀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과 더불어, 바람 한 점 없음에도 허리 아래까지 흘러내린 머리칼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면서 사납게 흔들렸다. 숲을 가득 채우던 고요가 파문처럼 일그러지면서 그 압도적인 기운에 주위에 있던 새와 작은 짐승들은 일제히 날아오르거나 풀숲 속으로 도망쳐 사라졌다.


그러나 라사리아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차분하게 감정을 억눌렀다. 가면 아래로 스쳐간 격노의 흔적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는 다시 본래의 냉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아로스와 시즈는 모르티아의 이름이 불러낸 격렬한 동요의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단순한 분노 이상의 무언가였다. 그녀의 이름이 금기이자 영원히 씻을 수 없는 모독과도 같은 것일까. 조금 전의 그 감정은 태고의 상흔임을 짐작케 하는 섬뜩한 살기임이 분명했다.


"대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스러져 가고 있다. 너희가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 속도는 조금 더 당겨지겠지."


그 말이 떨어지자, 아로스와 시즈는 입을 닫은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 세계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길이 그것뿐이라면... 여전히 주저하겠느냐?"


아로스는 반박하려 했으나,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이 끝내 나오지 않았다. 시즈 또한 눈을 감은 채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어 라사리아를 똑바로 마주했다.


"...결국 저희에게는 다른 선택지는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 지금의 너희에게 선택을 피할 권리는 없다."


짧고도 무거운 대답이 내려앉자, 긴 침묵이 뒤따랐다. 라사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어 엘라마를 바라보았다.


"...엘라마는 알고 있다."


조용한 목소리와 함께, 아로스와 시즈가 동시에 엘라마가 잠든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언젠가 엘나가 제자리를 찾게 되는 그 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녀는 이미 알고 있다. 그 무엇보다 엘나에 가까운 존재이니까."


"그렇다면... 그분께 직접 여쭤볼 수는 없는 건가요?”


시즈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라사리아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너희가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뒤에야 그녀는 응답할 것이다."


"그 말은, 당신은 저희가 그 끝에서 무엇과 마주할지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까?"


"...끝에 이르면 너희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가면에 가려진 라사리아의 표정은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 말끝에는 처음으로 흔들린 여운이 스며 있었다. 시즈는 그의 태도에서 확실한 답을 회피하는 기색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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