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날개의 둥지 (4)

비명의 공방

by 이샤라

베리엘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애써 고개만 끄덕였다. 날개를 잃은 종족이 하늘을 동경하는 것은 본능이자 저주였다. 비록 그것이 살을 찢고 쇠를 박아 넣는 고통일지라도.


그때, 붕대를 가지러 나갔다 돌아온 익인 하나가 어느새 곁에 서 있었다. 손가락과 깃털 끝, 옷자락 군데군데가 피로 붉게 물들어 있는 그의 숨결에는 수술로 인한 긴장이 묻어났다.


"수술은 어떠하오."


베리엘의 물음에, 익인은 허리를 곧추세우며 정중히 대답했다.


"저번보다는 한결 낫습니다. 날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신지, 생각보다 잘 버티고 계십니다."


그 말을 들은 베리엘은 잠시 시선을 떨구더니, 더 말을 잇지 않고 공방 안쪽으로 깊게 이어진 돌계단에 발을 옮겼다. 발톱이 계단에 닿을 때마다 바위를 찍어내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날카로운 발톱 끝이 단단한 돌을 파고드는 마찰음은 좁은 굴길에 메아리처럼 번졌다.


한참을 내려가자 불과 쇠, 그리고 땀 냄새가 한데 뒤섞인 공간이 펼쳐졌다. 바위 동굴의 광장 같은 자리에는 수많은 인간 노예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돌가루와 먼지가 자욱하게 흩날리는 외곽에서는 곡괭이를 휘두르며 광석을 캐내고 있었고, 중심부에는 거대한 화로와 모루가 줄지어 놓인 대장간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수십 명의 인부들이 불꽃을 오르내리며 기다란 석관 같은 형상을 다듬고 있었다. 붉은 용융물과 바위 파편이 튀어 오르는 사이, 금속의 울림은 끊임없이 동굴 천장을 울렸다.


베리엘은 그 모든 광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감시대로 향했다. 그가 감시대 선채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까마귀 형상의 가면을 쓰고 붉은 로브를 입은 자가 등 뒤에서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진행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아시다시피, 진척도는 계속 떨어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노예들을 끌어들이는 것도 쉽지 않을뿐더러, 대지의 기운 역시 흔적을 찾기 어렵습니다. 이대로는 이곳을 오래 유지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베리엘은 잠시 말이 없었다.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히고, 후드 아래 그림자 속 녹빛 시선이 서늘하게 흔들렸으나 끝내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감시대 아래로 쇠망치의 굉음과 불꽃이 치솟는 소리가 그의 침묵을 대신해 동굴을 가득 채웠다.


그러던 순간, 귓속을 찢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퍼어어어어어엉────


광장에서 금속 주조 하나가 불길을 삼키며 폭발했다. 화염과 용융물이 함께 터져 오르며 뜨거운 바람이 사방으로 몰아쳤고, 파편이 튀며 인부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불길에 삼켜진 용융물은 마치 용암처럼 흘러내리며 바닥을 녹였다. 그 충격으로 석관들이 쌓여 있던 지반이 산산이 갈라지더니, 거대한 석관들은 굉음을 내며 연쇄적으로 무너져 내린 동시에 전부 박살 나면서 사방으로 쏟아졌다.


그 광경에, 베리엘이 감시대 위에서 사건의 현장으로 뛰어내렸다. 3m는 족히 넘는 거대한 덩치가 땅에 닿자 먼지가 일며 주변이 뒤흔들렸고, 주조를 터뜨린 노예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무릎을 꿇었다. 온몸을 떨며 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애원했다.


"잘못했습니다!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제발......!"


베리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후드 아래서 번뜩이는 녹빛 시선으로 노예를 내리꽂을 뿐이었다. 숨조차 막히는 고압적인 기운과 일말의 감정조차 담기지 않은 시선이 노예의 전신을 짓눌렀고, 그 공포에 노예는 온몸을 덜덜 떨며 바닥에 손톱을 파고들었다.


그때, 까마귀 가면에 붉은 로브를 걸친 자가 어느새 베리엘의 곁으로 다가와 서 있었다.


"......눈."


베리엘의 말이 떨어지는 동시에, 그의 손가락이 노예를 향해 겨누어졌다. 손끝에서 번진 불꽃이 허공을 가르며 쏜살같이 날아들자, 노예의 두 눈은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끄아아아악──!! 내 눈!! 내 눈!!!! 제발, 제발 꺼줘!! 아아아아아아아아악───!!!”


노예의 절규가 동굴 안을 가득 메웠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지만 이미 검게 그을린 살점이 비틀리며 부풀어 올랐고, 눈동자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산산이 무너져갔다.


베리엘은 무너져 내리는 노예의 머리를 한 손으로 거칠게 움켜쥐었다. 길게 뻗은 날카로운 손끝이 두개골을 누르자, 마치 뿌리 깊은 독을 주입하듯 울컥거리며 스며들었다. 이마와 관자놀이의 핏대가 미친 듯 솟구쳐 오르며 울부짖었고, 이내 암녹빛으로 변색되더니 내부에서 무언가 터져 나온 듯 뭉개졌다.


머리의 모든 구멍에서 피가 폭죽처럼 쏟아져 나온 노예는 비명마저 끊어진 채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노예의 시체를 내려다보던 베리엘의 시선은 여전히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때, 한 익인이 허겁지겁 달려와 그의 귓가에 다급하게 속삭였다. 잠시 말을 듣던 베리엘의 눈빛이 번뜩이며 뒤틀렸고, 귓속말이 끝나자마자 격노에 휩싸인 그의 목소리가 굵게 터져 나왔다.


"이따위 짓은 이제 끝이다──!!"


동굴 광장을 울린 그 외침에 노예들의 몸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이어서, 베리엘의 외침이 다시 공간을 가르며 메아리쳤다.


"불의 사제들이여!!"


어둠 속에서 불길이 일듯, 베리엘의 곁에 있던 자와 동일한 까마귀 형상의 가면을 쓴 자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을린 붉은 천이 팔과 어깨를 스치며 바람에 흩날렸고, 한 명, 두 명, 이내 십수 명의 사제들이 대장간과 갱도의 곳곳에 모습을 드러내자 노예들의 얼굴은 절망으로 굳어갔다. 그들의 무릎은 힘없이 꺾였고, 공포에 휩싸인 떨림이 동굴 전체를 휘감았다.


베리엘의 목소리가 낮게, 그러나 단호하게 울렸다.


"손과 발을 불로 지져서 전부 지하 감옥에 처넣어라!!"


말을 마친 그는 소식을 전하러 온 익인과 함께 걸음을 돌렸다. 암녹빛 로브 자락이 어둠 속에 사라지는 순간, 광장은 지옥으로 변했다.


불의 사제들이 손끝을 휘두르자, 붉은 불길이 뱀처럼 기어 나와 노예들의 발목과 손목에 휘감겼다. 살갗이 타 들어가는 냄새가 순식간에 번졌고, 비명은 작업장을 울리며 메아리쳤다.


"끄아아아아악──!!"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아아아아아악──!!"


끊임없이 울부짖는 목소리 위로 불꽃이 살점을 태워나가며 검붉은 연기가 치솟았다. 발목이 타 들어간 채 쓰러진 노예는 몸부림치다 다시 붙잡혔고, 손가락 사이사이가 까맣게 그을려 뭉개진 자들은 고통에 몸을 뒤틀며 땅을 뒹굴었다. 사제들의 얼굴은 가면에 가려져 감정조차 보이지 않았고, 그들의 손짓 하나마다 새로운 비명이 동굴 천장에 부딪혀 터져 나왔다.


광장의 공기는 타는 살과 피 냄새로 점점 진득하게 변해갔다. 손발이 숯처럼 검게 그을러 문드러진 노예들은 지하 감옥으로 질질 끌려갔고, 바닥에는 고통을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린 일부 노예들의 주검이 덩그러니 쓰러져 있었다.




의식은 오래 잠겨 있던 물 위로 서서히 떠오르듯 깨어났다. 아로스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으나, 세상은 아직 짙은 안개에 잠긴 것처럼 흐릿했다. 귓속에서는 규칙 없는 나무의 삐걱임과 자갈을 긁어내는 바퀴 소리가 교차하며 이어졌다. 온몸은 낯선 흔들림에 맞춰 위로 떠올랐다가 곧바로 내려앉았고, 그 진동은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듯 불편하게 파고들었다.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일으키려 애쓰자 마른 먼지가 목구멍을 할퀴며 거친 기침이 터졌다. 팔을 뻗었으나 무게 중심을 지탱할 힘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위로 들이치는 바람은 싸늘했고, 바람결에 묻어난 흙내음이 의식을 선명하게 끌어올렸다.


'여기가... 어디지? 분명 폭주하는 차원의 틈새로 빨려 들어갔었는데.'


그 순간, 덜컹이는 진동 사이로 흥미로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일어났구만?"


낯선 음성에 힘겹게 고개를 들자, 시야 끝자락에는 수레를 밀고 있는 꾀죄죄한 옷차림의 사내가 어른거렸다. 아로스는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온몸을 짓누르는 알 수 없는 충격의 잔해가 사지를 무겁게 옭아매며 움직임을 빼앗았다.


"지금은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걸, 형씨."


남자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으나, 수레 위로 드리운 그의 시선은 정면 아래에 누운 아로스를 비스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퀴가 돌부리에 걸려 덜컹거릴 때마다 그 목소리 또한 묘하게 울려왔다.


"하늘에서 저만큼이나 떨어졌는데 안 죽은 게 기적이지. 온몸의 뼈가 죄다 으스러져 있어도 이상할 것 없는 높이였거든."


아로스는 숨을 몰아쉬며 흐릿한 시야를 더듬었다. 몸을 받치는 것은 넉넉한 바닥이 아닌 돌이나 나무를 나를 때 쓰이는 수레의 거친 판자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보자, 수레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깊은 골짜기를 따라 오르내리고 있었다. 양옆으로 솟은 절벽은 햇빛조차 가로막아 낮임에도 그늘이 길게 드리워졌으며, 바람은 좁은 협곡을 따라 몰려들어와 울부짖듯 스쳐갔다.


산등성이 너머로는 희미한 안개가 흘러내렸고, 산허리에는 메마른 나무들이 간신히 매달린 듯 드문드문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 모든 풍경은 아득한 정적에 잠겨 있었고, 작은 수레의 덜컹임과 뒤에서 밀어 올리는 발자국 소리만이 그 침묵을 깨어내고 있었다.


"......여긴 어디지?"


간신히 입을 연 아로스의 질문에, 남자는 수레를 밀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대륙의 동쪽 끝, 마르프록스 산맥이야."


여전히 흥미를 감추지 못한 목소리가 곧이어 이어졌다.


"그런데 형씨는 어디서 뭐 하다 온 사람이야? 하늘 한복판에서 뚝 떨어지다니, 아무래도 평범한 사정은 아닌 것 같은데."


남자의 질문에 아로스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대답할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고,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경계심을 풀고 싶지도 않았다.


"뭐,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지. 아, 내 이름은 벨라미. 괜히 형씨가 불편해할까 싶어서 먼저 알려주는 거야."


하지만 그 뒤로도 아로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자신을 벨라미라 소개한 남자는 뒤에서 낮게 툴툴거리며 혼잣말을 던졌다.


"재미없는 형씨로군. 말 한마디쯤 해 주면 어디 덧나나 말이야."


허공을 향한 푸념은 곧 수레의 삐걱임에 묻혔다. 그 후로는 긴 시간 동안 말이 오가지 않았다. 바퀴가 바위를 긁는 소리와, 골짜기 사이를 가르는 거친 바람만이 흐릿한 의식을 흔들며 스쳐갔다.


얼마나 흘렀을까. 땀 냄새와 흙먼지가 배어든 공기를 헤치고, 낡은 지붕의 실루엣이 눈앞에 다가왔다. 그곳에는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 하나가 골짜기 끝에 외로이 서 있었다 부서진 벽 틈으로 바람이 드나들며 삐걱 소리를 냈고, 썩은 기둥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그 앞에는 또 다른 사내가 앉아 있었다. 길고 덥수룩한 더벅머리를 늘어뜨린 남자는 닳아 해진 사슬갑옷을 입고 있었고, 발치에는 벗어놓은 견갑과 투구가 나란히 굴러 다니고 있었다. 무장을 내려놓은 채 손에 쥔 것은 검이 아니라 붓이었으며, 거친 손끝은 묘한 집중 속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낡은 이젤 위에는 막 피어오른 물망초는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의 윤곽이 흔들리는 듯 양피지에 겹겹이 번져갔다.


"여—어!"


수레를 밀던 벨라미가 길게 늘어뜨리듯 목청을 높이자 사내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힐끗 스쳐보았다. 하지만 관심조차 두지 않는 듯 시선을 다시 그림으로 돌렸고, 그런 사내의 행동에 벨라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봐, 좀 도와줘야겠는데?”


사내는 붓질을 멈추지도 않은 채 건조하게 내뱉었다.


"난 네게 빚진 거 없어. 그러니까 여기서 당장 꺼져."


"또 시작이네. 왜 이리 까탈스러워? 내가 갖다 준 걸로 그림이나 그리고 있으면서 말이야."


벨라미는 코웃음을 치면서 사내 옆에 놓인 작은 통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기름과 뼛가루, 청금석 가루가 섞인 안료통이었다.


"저거 다 내가 갖다 준 거잖아. 덕분에 물망초가 그렇게 곱게 피어난 거고."


양피지로 위로 그려진 꽃들을 흘겨본 벨라미는 수레 위의 아로스를 흘끗 내려다보고는 다시 사내를 보며 말을 이었다.


"사람 하나 데려왔어. 온몸의 뼈가 죄다 나간 것 같은데, 지난번에 날 고쳐줬던 것처럼 이번에도 좀 도와주지 그래?"


그 순간이었다. 아로스의 시선이 그림을 그리는 사내의 뒷모습에 닿자마자, 카노르 평원에서 마주쳤던 뒤틀린 기사들의 기운이 스멀스멀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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