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달리기 여행 첫 번째
아무 생각 없이 운동화를 신고 태화강 둔치를 달리던 것에서부터 일이 점점 커져버렸다. 처음엔 1킬로도 달리지 못하고 헥헥거리던 나에서부터, 살기 위해 몸이 노곤노곤해질 때까지 달리던 날도 있었고, 크고 작은 부상을 여러 번 겪고 나서는 이젠 먼 거리는 아닐지라도 제법 몸 상태를 살펴가며 달리는 정도까지는 된 것 같다.
딱히 주말에 혼자서 할 일도 없고, 집에 웅크리고 앉아 있기도 뭣하고, 나의 한계도 넘어 보고 싶어서 해파랑길 50 구간 전체를 달려서 완주하기로 마음먹었다.
마라톤 하프 정도 거리는 몇 번 달려 봤으나, 더 긴 거리는 달려보질 않았고, 산길과 도로길이 서로 섞여있는 길을 달리며 여행한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 하는지 감이 오질 않아 먼저, 서생면에 있는 간절곶 소망길을 시험 삼아 달려봤다. 왕복 약 18킬로 정도 되는 거리였는데 그럭저럭 달릴만할 뿐만 아니라 재미도 있었다.
해파랑길 전체 50구간 중 울산에 있는 7구간을 제외하곤 모두가 타지이니 교통비나 시간을 고려할 때 한 번에 한 구간씩 달리기보단 두 구간씩 달리는 게 좋을 듯했다.
먼저, 해파랑길 1구간 시작점인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까지는 얼마 전 부산과 울산에 새롭게 개통한 전철을 이용했다. 울산 태화강역에 도착한 건 오전 7시 50분경이었다. 어떻게 전철을 타는지 몰라 한참을 헤매다 겨우 전철 플랫폼에 도착하고는 전철 시간표라도 찍으려 핸드폰을 찾으니 폰이 없다. 전철을 타기 전에라도 알게 된 것을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나 어쨌든 대략 난감이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가 핸드폰을 찾아 역으로 다시 돌아오니 시간은 벌써 8시 40분이다. 한 시간 정도를 까먹어 버린 것이다. 8시 55분발 전철을 타고 부산 벡스코 역에서 내려, 다시 지하철 2호선으로 갈아타고 경성대. 부경대역에서 내려, 이번엔 131번 버스를 타고 오륙도해파랑길 관광안내소에 도착하니 시간은 이미 11시가 다 되어간다. 아침 식사로 7시 이전에 간단하게 양배추 샐러드와 삶은 계란 두 개를 먹은 게 전부인데 달리기 출발 시간 자체가 이렇게 많이 늦어 버렸으니 배고픔을 어떻게 해결하나 싶어 초보 러너는 걱정이다.
그래도 경치는 참 좋다. 울산 바로 옆이 부산임에도 게다가 부산에 그렇게 많이 왔었으면서 이곳 오륙도엔 처음이다. 사람도 많고, 바람도 너무 거세다. 같이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 '여기만 오면 바람이 이렇게 많이 분다'라고 하는 말을 들으니 원래 이곳은 바람이 엄청난가 보다.
해파랑길 인증 QR스탬프를 찾을 수가 없다. 길은 하나인데 이름이 몇 가지가 되니 해파랑길 QR을 찾기란 더 어렵다. 스카이워크 아래쪽에 '코리아둘레길 해파랑길, 남파랑길 시작시점'이란 간판은 떡하니 있으나 이곳 QR은 해파랑길도 남파랑길도 아닌 갈맷길 QR이다. 한참을 보물 찾기라도 하듯 여기저기 찾아 해매 다녔지만 못 찾아 포기하고 출발하던 중 오륙도해파랑길 관광안내소 윗편 주차장 입구 한편에 서 있는 안내판, 그것도 옆 귀퉁이에 QR이 있다. 이것도 그나마 어떤 중노인 양반이 그 앞에서 핸드폰으로 뭔가를 찍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찾지 못했을 것이다.
울산에서 나고 지금껏 살아온 나에게 바다는 그리 생소한 풍경은 아니다. 그러나 이곳 오륙도공원에서 바라본 오륙도, 거센 파도를 온몸으로 견뎌온 바위섬들이 보여주는 담대함은 지금까지 본 울산의 바다와는 사뭇 다르다. 오랜 세월 파도와 바람을 견디느라 살은 온데 없이 사라지고 뼈만 남은 바위섬은 삶은 사는 거라 말하는 듯하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오륙도를 뒤로하고 길을 재촉하려니 나그네 발걸음이 쉬 떨어지질 않는다.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이기대공원까지 연결되는 구간은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쭉 이어져 있어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에 밀려 달린다는 것은 생각을 할 수도 없다. 그보다 이 아름다운 경치를 휙휙 지나친다는 것은 자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싶다.
이렇게 지척인 곳을 이제야 온 나의 무심함과 함께하지 못한 아내에게 다시금 미안한 마음이 밀려든다. 쉰이 넘은 동생 걱정에 하루가 짧은 큰누나에게라도 이곳을 보여줘야겠다.
이제 제법 왔나 보다. 저 멀리 광안대교와 해운대 해변을 차지한 고층건물들이 보인다. 내 눈엔 저 높은 건물들이 탐욕의 상징 같아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마음이 늘 불편했다. 특히 이곳 이기대에서 바라보는 저 건물은 더욱 흉물스럽게 느껴진다. 저곳에서 아름다운 해안가 풍광을 독점하고 사는 사람은 과연 행복할까?.
이기대를 지나면서부터는 도로길을 통해 광안리해수욕장과 수영만 그리고 해운대까지 이어진다. 평소 차로 다닐 땐 광안대교를 통해 질러가던 길을 돌아 돌아가려니 벌써부터 힘이 빠지는 듯하다. 바닷바람이 많이 불어 그런가 차량에서 뿜어내는 매연은 그렇게 많이 느껴지지 않아 그나마 달리는데 큰 불편은 없다.
광안리해수욕장이다. 옛날 대학생 때 친구들이랑 없는 돈 긁어모아 이곳 광안리해수욕장을 찾았던 적이 있다. 포장마차에서 옆자리 중년의 아저씨들이 살아있는 새우를 큰 양푼이에 담아놓고 한 마리씩 산채로 허리를 꺾어 먹는 걸 놀란 눈으로 쳐다봤던 기억이 난다.
지금의 광인리해변은 젊음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거리의 카페는 동남아의 노천카페를 보는 듯하고, 상점을 가득 매우고 있는 청춘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활기가 느껴진다.
복잡한 광안리 해변을 벗어나 다시 지루한 도로길 주루를 한다. 자연의 길은 이리로 구불 저리로 구불한데 인간의 길은 곧게 쭉뻗은 직선이다. 깨끗하게 정비된 모습이 말끔은 하나 재미는 없다. 민락교를 넘으니 크고 작은 요트들이 정박해 있는 수영만 요트장이 보인다. 그 요트들 뒤로는 유리성과 같은 모습으로 하늘을 찌르고 있는 빌딩들, 여기서부터는 남의 세상이다. 같은 시대, 같은 나라를 살고 있으나 서로 다른 세상이다. 방파제엔 영화의 거리라며 몇몇 조형물을 세워뒀으나 아무런 감흥이 없다. 그냥 묵묵히 달렸다. 최대한 빠르게.
가로등에 간간히 메어져 있는 해파랑길 리본을 따라 지루한 도로길을 한참을 달려 조그마한 다리를 넘어서니 슬슬 오르막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길은 숲으로 향한다. 동백나무가 숲길 옆을 빽빽이 채우고 있은 것으로 보아 여기가 동백공원인가 보다.
공원 입구에 여성 한 분이 아파트 분양 홍보를 하고 있다. 그분이 보기에 다들 유원지에 놀러 온 사람인데 반해 여기서 달리는 놈은 분명 이 동네 사람이라 생각한듯하다. 자본주의 미소를 보이며 내게 전단과 물티슈 같은 선물을 내민다. 그리곤 이내 알아차렸다. 혀를 한자나 내 물고, 허위적 허위적 올라가는 저 놈에겐 이걸 받을 힘조차 없다는 것을.
잘 조성된 숲길에 감탄하며 모퉁이를 돌아서니 한눈에도 알아볼 멋진 건물이 벼랑 끝에 서 있다. 여기가 APEC하우스란다. 멋지다. 그런데 APEC하우스가 왜 여기 있지?, 제주도 아니었던가?. 다시금 나의 무신경에 웃음이 난다.
한적한 숲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어라? 좀 전에 그분이 저기 서 있다. 그냥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온 것이다. 아마도 중간에 빠지는 길을 놓친 것 같다. 그럭저럭 백사장을 찾아 달려가니 해운대다. 드디어 1구간 종착점에 다 왔다.
해운대는 좀 전의 광안리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탁 트인 바다와 넓고 긴 백사장의 규모는 단연 해운대가 좋으나, 왠지 모를 황량함이 있다. 광안리의 아기자기함과 백사장과 상점가를 분리시켜 주는 도로, 그리고 상점가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자유로움은 광안리가 단연 돋보인다. 나라면 해운대보단 광안리에서 더 자유로움을 느낄 것 같다.
해운대 관광센터 입구에 마련된 인증표에서 QR인증을 하고 이렇게 나의 첫 해파랑길 달리기 여행 그 첫 번째, 1구간을 무사히 마쳤다. 안내에는 총 거리 16.9km라고 되어있으나 내 폰은 총 거리 16.54km, 소요시간 2시간 17분을 가리킨다.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음 종착점인 대변항으로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