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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채동 Jun 01. 2023

산딸기야 고마워!!

해파랑길 4코스 달리기 여행

  3코스 종점인 임랑해수욕장에서 남은 물과 연양갱 1개, 에너지젤 한 봉지를 먹어도 도무지 간에 기별도 없다. 여기서 이번 여행을 멈출 것인지 아니면 4코스를 마저 달릴 것인지 고민스러웠다. 한동안 운동을 제대로 못한 체력의 문제. 쨍쨍 내려쬐는 햇볕 아래서 달려야 하는 문제. 지난번 여행에서 중간에 먹은 삶은 계란 두 개로 인해 옆구리가 결려 제대로 뛸 수가 없어 이번엔 에너지젤로 끝까지 버텨볼 요량이었으나 첫 경험의 미숙함인지 몰라도 도무지 힘도, 허기도 무엇하나 해결되니 않는 문제. 거기다 4코스는 거리가 19km나 된다는 문제. 어찌할고...


  일단은 처음 마음먹은 대로 계속 달리기로 마음을 굳혔다. 스탬프 자리로 돌아와 바로 옆에 있는 동네 점방으로 갔다. 말 그대로 점방이다. 허름한 가계 안에서는 할머니 두 분이 앉아 계신다. 생수 500ml 1병, 팥아이스크림 1개를 2천 원 주고 쌌다. 수통에 물도 채우고, 허기진 배는 아이스크림으로 채웠다.


  QR 찍고 다시 달렸다. 몸이 굳어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월내리 중심가를 지나 고리원자력발전소 입구를 돌아 나오니 앞은 쭉뻗은 오르막 도로다. 그러나 해파랑 표식은 이번엔 도로가 아닌 옆으로 빠져 마을길로 향한다. 동해선 전철을 아래로 지나고 몇몇 전원주택을 지나면서는 리본은 나에게 산속으로 가란다. 무거운 다리를 끌고 산으로 얼마나 올랐을까. 눈앞에 산딸기가 빨갛게 익어 매달려 있지 않은가. 산딸기 가시에 종아리가 쓸리는 것도 모르고 허겁지겁 따먹었다. 손목에 와치가 운동을 멈춘 거냐며 진동을 보내건 말건 정신없이 먹었다. 산딸기도 제법 먹으니 얼요기는 되는듯하다. 남은 산딸기는 다른 나그네나 동물들이 먹게 놔두고 나는 아쉬운 발걸음을 옮겼다.


  멍한 정신에 이 생각 저 생각 온갖 망상을 하며, 몸은 산길을 걷고 마음은 딴 세상을 날고 있을 때쯤 왼발로 나무 뿌린 지 돌부린지 모를 뭔가를 사정없이 차버린 모양이다. 찌릿한 고통에 딴 세상 간 정신이 번쩍 돌아온다. 엄지발가락에 피멍이라도 들었지 싶다. 신발이 러닝화다 보니 앞축에 보호해 줄 게 없어 충격을 그대로 받았다. 이번엔 발가락이 아파 내리막길을 똑바로 내려올 수가 없다. 참 가지가지 한다 싶다. 


  발가락도 아프고, 배고 고프고, 옆으론 버스도 지나가고 '나참 환장한다.' 저 앞에 젊은 친구 두 사람이 가고 있다. 그들도 해파랑길을 걷고 있는 듯하다. 가까이서 보니 남녀커플이다. 저 사람들이 내가 뛰어가는 사람인지 걷는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사람이 있으니 뛰어진다. 참 인간은 묘한 습성이 있는 것 같다.

  바로 갈 수 있는 길을 고리원자력발전소에 막혀 돌아 돌아 다시 바다를 만나는 첫 지점이 신리항이다. 조그만 항에 조그만 배들이 쉬고 있다. 이제부터는 계속 바다가 이어지길 기대하며 발걸음을 옮겨본다.


  서생중학교를 지나면서는 간절곶 소망길과 겹친다. 소망길은 일전에 달리기 여행을 해본 곳이라 익숙한 길이기도 하다. 나사해수욕장 인근은 카페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난다. 지금도 여기저기 바다가 보이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누구나 편하게 자연을 즐긴다는 측면에서는 좋기도 하지만 우리가 자연을 즐기는 방식이 너무 단조로운 것은 아닌가 싶어 아쉬운 마음도 든다. 

  나사 해변을 벗어나며 뒤를 돌아보니 까마득히 멀리 해운대해변에 우뚝 솟은 빌딩과 고리원전의 원자로가 보인다. 

  길을 걷는다는 것, 삶을 걷는다는 것, 왔던 길을 돌아갈 수 없다는 것, 과거의 인연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걸어온 길은 꿈인듯하고, 걸어온 삶도 꿈인듯하다. 


  한번 가본 길을 가는 것은 처음 가는 길을 가는 것보다는 재미가 덜하다. 얼마쯤 가면 뭐가 나올지 알고 나니 몸에 가해지는 고통을 참아내기가 더 어려워진다. 편한 길, 지름길이 옆에 있는 것을 알고도 리본을 따라 정해진 길을 뛴다는 것에 대한 유혹의 마음이 계속 올라온다.

  언덕 위에 간절곶 등대가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석가탄신일 연휴 첫날을 이곳에서 보내고 있다. 아이들은 연을 날리고, 연인들은 잠잠히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내 얼굴을 돌아본다. 누가 시켜서 이 고생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나 즐겁자고 시작한 달리기 여행이 즐거움도 너무 많아지면 고통이 되는가 싶어 얼굴을 펴고 신나 보이게 달려본다. 

  송정리 해변 끝지점에 신랑각시바위라는 표지가 있다. 재밌는 스토리텔링을 했다. 그런데 내 눈엔 각시바위는 톰과 제리에 나오는 불독이 개집 앞에 엎드려 있는 것 같고, 신랑바위는 고양이 제리가 기회를 노리고 앉아있는 것 같이 보인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상상도 바뀐다.

  이제 정말 다 왔다보다. 저 멀리 진하해수욕장 팔각정이 보인다. 대략 2km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억지로 억지로 달려왔다. 아니 달렸다기보다는 빠르게 걸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포기하지 않으니 끝이 난다. 

  진하에 도착하면 시원한 물회 한 그릇 하리라. 메콤 새콤한 시원한 육수에 국수한 줌 말아 쭉 들이키면 그동안의 갈증과 배고픔도 다 날아가리라 이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다. 

  마지막이니 최선을 다해 달렸다. 그래도 명색이 달리기 여행인데 걸어서 종점에 도착할 수는 없지 않겠나.   

  해파랑길 4코스 임랑에서부터 진하까지 GPS 거리 18.92km, 소요시간 3시간 34분. 기록을 보니 마지막 1킬로 렙타임이 13분이다. 분명 나는 달렸는데 기록은 빠르게 걷는 정도 나왔다. 그래도 즐겁고 뿌듯하다. 이번 4코스는 '포기할까 계속 갈까'와의 싸움이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니 되기는 된다.


  팔각정 바로 앞 횟집에 들어가 주인 영감님께 '물회 한 그릇 주소' 말하고, 시원하게 한 그릇 먹고 나니 이제야 눈이 똑바로 떠진다. 즐거운 달리기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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