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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바구니 배!
밤에는 소주 한 잔!

(아들은 내 인생의 비타민!)

by 관돌

현재 공공기관에서 햇수로 6년 차 대리로 근무하고 있다.

정년이 보장되고 번듯한 직장이기에 내 삶에 있어 든든하고 만족되는 부분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곳 또한 나에게는 직장이라는 전쟁터이며,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되는 곳이기에 누구나 겪듯이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도 계속 다니는 이유는?


정말 간단하다.

누군가에게는 직장이 삶의 활력소라는 이유가 될 수도 있고,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훌륭한 곳이라는 이유일 수 있겠지만, 나에겐 단지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것 같다. 물론 예전에는 일을 하면서 보람도 느끼고, 도전, 성공과 같은 어떤 이상향을 그리며 활력소라는 생각도 가진 적이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직장 내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피로감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피로감을 느꼈고, 흥미도 크게 잃어가게 된 것 같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대출, 카드 값, 세금 등의 현실을 맞닥뜨리게 되면, 직장인 열에 아홉은 항상 품고 다닌다는 사표를 쉽게 꺼낼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됐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지금도 여전히 아침에 일어나 상쾌한 마음으로 출근하는 일은 한 달을 기준으로 해도 손에 꼽을 정도이다.


현재까지 마음을 다잡고 다니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어머니의 위로와 든든한 심적 지원이 아닌가 생각된다.

마흔이 넘었지만, 아직 미혼으로 지내고 있다. 여자 친구도 현재는...

누나와 형은 조카들을 키우며 알콩달콩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지내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면 아주 가끔 ‘결혼’에 대한 생각도 스쳐 지나가지만, 아직은 혼자의 삶이 더 편하고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더 크게 자리 잡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어느 순간엔 마음속 이야기를 터놓고 싶은 상대가 필요하기도 하고, 위로와 공감을 받고 싶기도 하다. 물론 친구도 좋지만, 친한 친구에게도 꺼내거나, 들키고 싶지 않은 속내도 있기에 그냥 혼자 삼키거나 아무런 내색 없이 지내기도 했지만, 어머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갖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생각도 정리가 되고 마음을 다잡는 경험이 많았다.

다른 누군가와 다른 어떤 특별한 위로를 해주신 것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마음의 안정을 많이 느껴 온 것 같다.


사실 이 전 직장은 정말 입사를 원했고, 입사 당시만 해도 평생직장으로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가질 만큼 희망과 기대감이 부푼 곳이었다. 일을 하다 보니 야근도 많고, 어쩔 수 없이 주말근무도 있어 육체적인 힘듦은 있었지만, 정신적인 피로감은 크지 않았다. 입사 2년 후엔 팀장으로 승진할 수 있어 운도 따라준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괜히 팀장을 맡았나 싶기도 했다. 왜냐하면 팀장이 된 후, 정확히 1년 후 바로 퇴사를 결심 아니, 실행했으니 말이다. 능력 부족 탓이겠지만, 준비가 덜 된 팀장인 탓에 팀원 관리도 미흡했고, 의지대로 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음을 깨달은 후에는 앞뒤 상황 재지 않고, 바로 퇴사를 결심하고 의사를 전달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지만, 무모함의 끝판왕이었던 것 같다.

'정말 그땐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그런 결정을 했을까?'

'진짜 나와서 뭔가를 해낼 자신이 있었을까?'

퇴사 의사를 밝혔지만, 다행히도 붙잡아 주기도 했고, 서로 간의 사정을 고려해 시간을 조금은 벌 수 있었고, 다행히 그 시기에 현 직장 채용공고가 우연히 눈에 띄었고 또 한 번 운이 좋았는지 단 번에 합격을 하여 퇴사할 때도 당당하게 걸어 나 올 수 있었다.


다행히 결과가 좋았기에 이렇게 글로 옮길 수 있지만, 퇴사부터 이직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을 곱씹어 보면, 맘고생도 정말 심했던 시기였다. 힘들게 공부해서 들어간 직장이었기에 가족들에게 퇴사 얘기를 꺼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단 채용공고를 보기 전, 퇴사를 결심한 순간 든 생각은)

‘퇴사하고 나면 당장 생활비는 어떻게 하지?’

‘취직 못하고 있으면 언젠가 알게 될 텐데. 그때 무슨 핑계를 대지?’

이런저런 고민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을 즈음, 채용공고를 발견하였고, 기대치도 않았던 1차 서류합격 소식에 불안하지만 작은 기대감도 생겼지만 아직 불안했기에 아무에게도 얘기는 하지 못했다. 가족들이 무섭다거나 비난이 두려워 얘기를 못 꺼낸 것보다, 스스로 준비가 안 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 더 큰 이유였던 것 같다.


그렇게 몰래 준비를 하던 중, 추석이 다가왔다. 솔직히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혼자 있고 싶은 생각이 컸었는데, 평소와 내 모습이 다르게 느껴지셨는지 어머니께서 대뜸 추석에 둘 만의 여행을 제안하셨다.

‘갑자기? 추석이면 아빠 차례도 지내야 되는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기일은 꼭 지내야 되지만, 추석 차례는 마음으로 해도 될 것 같다.”

"잘 모르겠지만 요즘 아들이 고민도 많아 보여서 바람이라도 쐬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떻노?

라고 하시며 기막힌 타이밍에 내 속을 훤히 꿰뚫어 봐주셨다.

‘생각정리도 할 겸 혼자 여행이나 가볼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었는데, 왠지 혼자 보단 어머니와의 여행이 더 끌렸었다. 이때가 30대 중반 즈음이었던 것 같다.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지를 검색해 보고, 여행 일정에 맞춰 연차도 미리 내놓았다.

여행지는 베트남 다낭으로 결정했는데, 사실 그 이후부터가 좀 막막했다.

솔직히 해외여행은 누나가 같이 가는 경우가 많아 준비에 대해 큰 신경을 써 본 적이 없었는데, 막상 어머니와 단 둘이... 그것도 내가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설렘도 있었지만, 긴장도 많이 됐다.

'다낭... 어디를 가야 되지? 영어도 잘 못하는데, 숙소는 잡을 수 있을까?'

혼자서 이런 고민을 하던 때, 다시 한번 어머니께서

"이번에는 둘 다 편하게 패키지로 가볼래?"

"가서 좀 편하게 다니면서, 운전 신경 안 쓰고, 니랑 내랑 술도 좀 마시면서 프리하게 갔다 오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니 생각은 어떻노?"

'아! 패키지? 근데 물건 파는데 많이 데리고 다니면서 구경도 잘 못할 수 있는데 돈만 버리는 거 아닌가?'라는 염려에 바로 대답은 못했는데, 결국에는 어머니 제안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드디어 출발 당일!

리무진에서 내려 공항 입구로 걸어가는 순간 발밑에 낯익은 무언가가 눈에 확 들어왔다.

바로 신사임당 님이 조신하게 그려진 오만 원 지폐가 쫙 펼쳐진 상태로 떨어져 있었다. 이걸 재빠르게 주우면서도 이상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티 나게 떨어져 있는데 아무도 못 보고 그냥 지나친 건가?’ 주운 돈을 들고 앞에 가는 어머니께 얼른 달려가 귓속에 대고 자랑(?)도 했다.

(주인을 찾아 주고 싶었지만, 돈에 이름이 안 적혀 있었기에...^^;;)

암튼, 공짜 돈을 주운 탓에 출발부터 기대감을 갖게 되는 여행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몇 시간 후, 어수룩한 무렵에 도착한 다낭.

동남아라 그런지 후텁지근함을 단박에 느낄 수 있었고, 날씨 탓에 ‘아! 해외에 나왔구나!’라는 생각을 절로 가질 수 있었다. 첫날은 다른 일정 없이 바로 숙소에 도착해서 방을 배정받았다. 어머니와는 국내든 해외든 항상 어딘가 가면 술 한 잔 기울이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 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번에도 어김없이 둘 만의 규칙을 충실히 수행했었다.

얼른 짐을 풀고 테이블에 올 때 가져온 팩소주와 참치, 컵라면을 꺼내 세팅을 끝냈다.

여행지에서 마시는 소주는 정말 꿀맛이라는 걸 새삼스럽지만 또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한 잔 두 잔 쭉쭉 마시다 보니 어느덧 취기도 오르고, 그 힘을 빌려 자연스럽게 그 간 있었던 일들에 대해 조심스럽게 풀어놓았다.

"퇴사? 그럼 그다음 계획은 있나?"

"아직 진행 중이긴 한데 그것도 최종 합격할 수 있을지는 모르는 상황이긴 해요. 안되면 나와서 좀 준비해 보면 안 될까 싶기도 하고... 어떻게 생각하세요?"

"결정은 니가하는데, 그래도 니가 적은 나이도 아닌데 걱정을 안 할 수 없네. 그렇다고 그렇게 힘들다 하는데 계속 있어라 할 수도 없고."

"나와서 구체적인 계획만 있으면 좋긴 한데. 그래도 난 아들 믿으니깐 어떤 결정을 해도 잘할 거라 생각해 볼게. 부담은 너무 갖지 말고, 대신에 한 번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 내리면 제일 좋겠다."

“누나야나 형아도 있으니깐 물어보고 같이 얘기해 보는 것도 방법인 것 같네.”

"화이팅! 이번에 엄마가 여행 얘기 잘 꺼낸 것 같네? 며칠이라도 스트레스받지 말고 편하게 지내다 가자!"

‘어떤 계획이나 확신도 못 드렸는데... 그걸 아시면서도 그냥 믿어준다는 말...’

다른 어떤 말보다 허전했던 나의 마음 빈 구석을 꽉 채워주는 한 마디였었다.

그 순간 죄송하면서도 한 편으론, 백만 대군보다 더 든든한 지원군이 항상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지만 다시 한번 느껴 볼 수 있었다.


둘째 날 아침!

패키지여행은 시간 약속이 무엇보다 중요했기에 정해진 장소에 항상 10분 전 도착해 있었다.

첫 번째 코스는 코코넛 나뭇잎으로 만든 배를 타러 떠났다. 생긴 모양이 바구니와 같이 생겨서 ‘바구니 배’라고 가이드도 소개해 주셨다.

바닥이 둥근 편이라 서있는 것도 힘든데, 현지 뱃사공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서서 노를 저었다. 두세 명 정도가 탈 수 있는 작은 사이즈라 흔들거림도 심했는데 워낙 베테랑이기에 오히려 우리를 겁주기 위해 더 요란하게 흔들기도 했었다.

다낭의 햇볕은 얼마나 쨍쨍한지 정수리 바로 위쪽에 태양이 앉아 있는 것처럼 따갑고 눈이 부셨지만, 짜증보다는 ‘깔깔깔’ 거리는 웃음소리만 주변에 가득했다. 반환점에 다다르자, 잠시 배가 멈추더니, 예고도 없이 뱃사공은 현란한 퍼포먼스를 시작했다.

웬만한 아이돌 춤보다 더 격렬하고 화끈한 춤사위로 펼쳐 보였는데, 재미도 있었지만 그 순간에는 빠지지 않을까 하는 공포감이 더 크게 느껴졌었던 것 같았다.

한국말, 영어 할 것 없이 "멈추세요!", 'stop"을 크게 연발해 보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듯 더 격렬하게 요동치며 마치 나를 놀리는 듯한 모습도 보여주곤 했다.

'휴~ 돈 내고 이런 공포감까지 맛봐야 되나? ㅋㅋㅋ 두 번은 못 탈것 같다...'

그렇게 격렬한 배에서 내리는 순간 땅멀미라 해야 되나? 어질어질~

옆에 계신 어머니는 싱글벙글 웃으시며 나보다 더 생생하셨는데, 그 모습을 보니 민망하기도 했다.


점심 식사 후에는 '바나힐'이라는 곳으로 이동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케이블을 탔는데, 위쪽으로 이동할수록 마치 구름을 뚫고 어딘지 모를 하늘 위로 계속해서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도착한 '바나힐'

이리저리 둘러보다 보니 다양한 스님들의 형상을 지닌 조각을 볼 수 있었다. 왠지 근엄한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여기선 술을 들고 있는 스님, 배가 뽈록하게 튀어나온 스님 등 우스꽝스럽지만 친근한 모습들을 구경해 볼 수 있었다.

"아들아! 저 중에서 지금 젤 마음에 드는 모습이 어떤 스님이고? 한 번 골라봐라!"

오래 생각하고 결정할 것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신중하게 고르게 되었다.

뚱뚱한 술병을 든 스님을 골랐는데, "아마 지금 니 모습이 아닌가 싶네. 머리도 아프고 고민도 많고 술도 생각나고... 그래서 한 번 골라보라 해 본 거다."

'그런가? 다시 생각해 보니 지금 내랑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어머니는 표정만 봐도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귀신처럼 맞추시는 걸 보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걷다 보니 호박마차도 보였고, 옆에선 금발의 외국인 아저씨가 덩치에 비해 앙증맞은 악기를 들고 흥겹게 노래도 부르셨는데,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밝은 미소를 짓는 어머니 모습도 한 컷 남길 수 있었다.

저녁 식사 후에는 다낭의 랜드마크로 불린다는 '용다리‘를 보러 갔다. 크루즈(중간 사이즈의 유람선 사이즈?) 여행이었는데, 어머니와 선상에서 분위기 맥주를 마셔보려고 했는데, 바람이 어찌나 강한지 실내에서 한 잔을 마시며 오늘의 여행을 마무리했다.


셋째 날!

어제는 뭔가 신나게 활동을 했다면, 오늘은 정반대로 정적인 프로그램이 많았다.

'미케 비치 해변'이라는 곳으로 이동했는데, 가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참! 한국이 가을이었지. 여기는 아직 더운데 왜 사람들이 없었을까?’ 갑자기 왜 그 그곳에 사람들이 많지 않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떠오른다. 거의 10년이 지난 시점에...

해변 모래사장을 거닐며, 특별한 얘기를 나눈 건 아니었지만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했었다.

길을 걷다 보니 모래사장 가운데 어제 탔었던 바구니 배 한 척이 있었는데, 옆에 있던 노를 젓는 시늉을 하는 천진난만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니 내 기분이 다 좋아졌다.

저녁 즈음에는 '투본강'으로 이동해 또 배를 타는 일정을 소화했다. 어제와는 달리 안정된 속도로 달리는 배 위에서 석양을 바라보니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었다.

강 위에는 여행객들이 띄운 다양한 색상의 '소원 등'이 하늘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건 글로도 표현을 다 할 수 없을 만큼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은 것 같았다.


배에서 내려 우리를 마주한 곳은 ‘호이안 야시장’이었다. 다낭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낸 장소였다. 외국에 나오면 신기하게도 백화점이나 화려한 관광지보다 시장 같은 곳이 내 마음을 더 들뜨게 만드는 장소인 것 같았다(촌스러운가?). 그냥 현지인들과 더불어 다양한 여행객들을 한눈에 볼 수 있어 그런 것 같다. 그리고 야시장 또 하나의 묘미는.

한국에서 먹을 수 없는 독특한 음식도 맛볼 수 있어 더 좋은 것 같다.

2시간 동안의 자유시간에 어머니와 함께 시장을 둘러보며, 기념품도 구입할 생각이었다.

가이드분께서 알려주신 팁은 무조건 처음 부르는 가격에는 절대 사지 말라는 것이었다.

싸움은 말리는 대신 흥정은 붙이라는 말처럼 물건을 살 때 어디에서돈 허용되는 디스카운트!

그 얘길 듣고 기념품을 살 때도, 음식을 먹을 때도 재미가 들른 탓에 깎고 또 깎고...

그렇게 가족들 선물도 사고, 숙소에서 먹을 음식까지 같이 구입해서 돌아왔다.

다낭에서의 마지막 밤을 그냥 보내기 아쉬워서 남은 소주를 마시며 밤을 떠나보냈다. 숙소가 15층 높이였는데, 용다리가 반짝이는 야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어 좋았지만, 내일이면 다시 일상으로 복귀해야 된다는 아쉬움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날 따라 유독 다낭의 밤하늘이 더 아름답게 다가왔던 것 같았다.


‘하루만 더 있었으면 좋을 텐데....’

‘돌아가면 또 출근이네. 앞으로 또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라며 다시 저 아래 어디쯤 꼭꼭 숨겨져 있었던 고민이라는 녀석도 돌아가는 일정을 알고 있었는 듯 조심스럽게 얼굴을 드러내려고 준비하는 것 같았다.

그냥 답답함이 옥죄어 오는 순간이었는데,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어김없이,

"자! 한 잔해라! 이제 또 일상으로 돌아가면 거기에 부딪히면서 또 잘 지내야지!"

라며 내 머릿속을 샅샅이 들여다보신 것 마냥 절묘한 타이밍에 마음을 어루만져주셨다.

덕분에 '그래. 또 해보자!'라는 다짐과 함께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아쉽지만 의미 있는 다낭에서의 마지막 밤도 흘려보냈다.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의 여행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어머니는 여전히 절대 헤어짐에 대한 고민이 필요 없는 최고의 여자 친구 역할을 해주고 계신다. 고민거리가 생기면 혼자 머리를 싸매고 고민도 해 본 후엔 어김없이 어머니께 조언을 구하고 있는 편이다.

나이가 들면 보통 부모님과는 대화도 줄어들고, 함께 공유할 거리가 없어 대면대면한 관계가 되기 쉽다고 하는데, 오히려 어렸을 때 보다 얘기할 거리도 많아지고, 오히려 어머니와 함께 더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설렘도 느껴지곤 한다.


지금은 어머니께서 누나랑 같이 살고 계신데, 한 번씩 보러 찾아가면 꼬맹이 조카들이 꼭 하는 말이 있다.

“외할머니! 작외(작은 외삼촌을 줄여서 부르는 말,,,^^;) 비타민 오셨어요!”

이런 말을 듣고 나면, 나 역시도 어머니께 어느 정도 삶의 활력소 같은 역할이 되어 드리고 있구나 싶어 안심이 되기도 한다.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나에게 있어 그 대상이 어머니라는 것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물론 부모 자식 간의 관계라면 대부분이 그러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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