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소녀오디세이 11화

아버지의 일기

by Ssan카르트

https://youtu.be/yRw8QYZqReE?si=OSLlw3gRDgNcbF5r

1944년 가을날의 기록

학교를 가지 않은 지 벌써 닷새째다.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는 추분즈음

어김없이 들판의 황금물결은 더욱 짙어졌고 밤이슬 맺히는 속도는 빨라졌다. 낮이면 파란 하늘 아래로 고추잠자리들이 평화로이 날아다녔지만, 그 정겨움이 오히려 잔인해 보였다.


이삭이 제법 여물어 고개를 숙이기 시작할 무렵부터, 어머니는 예전에 없던 기색으로 어두운 밤마다 나가셔 몰래 이삭을 따는 것에 정성을 쏟으셨다. 순사들의 칼날 같은 감시 속에 우리 몫의 곡식은 단 한 톨도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 어머니께서 잠든 날 조용히 깨우셨다. 영문도 모른 채 비몽사몽 일어난 나를 데리고 어머니는 뒷간 깊숙한 곳으로 향하셨다.

그곳에서 헝겊에 꽁꽁 싸여 보관 중인 오래된 나무 상자 하나를 꺼내셨는데, 고조할아버지께서 세도정치의 무도한 수탈이 들판을 휩쓸던 시절, 자손의 만석꾼 꿈을 빌며 직접 만드셨다는 철제 '반달 칼'이 들어 있었다.


백 년도 더 된 그 옛날, 민란의 불길이 치솟던 시대에 우리 조상이 살아남기 위해 상징적으로 다듬었던 그 둥근 도구가, 무서운 순사들의 눈을 피할 20세기의 유일한 병기가 될 줄이야.


어머니와 난 그 가보를 소중하게 품고

숨을 죽인 채 뒤꼍으로 난 작은 뒷문을 열고 어둠 속으로 몸을 밀어 넣자, 적막이 우리를 집어삼킬 듯 달려들었다.


어머니는 담장 그림자에 몸을 바싹 붙인 채 사방의 기척을 살피며 몇 번이고 걸음을 멈추셨다. 발밑에서 바스러지는 흙알갱이 소리조차 천둥처럼 크게 들려, 나는 어머니의 저고리 끝자락을 손가락이 하얘지도록 움켜쥐었다. 우리는 길을 버리고 풀숲 우거진 도랑을 기어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논두렁으로 스며들었다.


달빛이 구름 뒤로 몸을 숨겨주어 고마운 밤이었다. 낮 동안 들판은 뜨거운 볕과 숨 통을 죄는 시선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으나, 밤이 되니 오직 우리와 대지만의 밀담으로 가득 차는 고요한 해방구가 되었다. 논둑 너머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는 마치 우리의 발걸음을 숨겨주려는 듯 유난히 목청을 높여 울어댔다.


발등에 닿는 이슬은 제법 차가웠고, 사방에 깔린 밤안개는 우리를 지켜주는 유일한 장막이었다."석영아, 낫은 안 된다. 낫질은 자국이 남고 소리가 나거든. 이 반달 칼로 이삭만 톡톡 끊어내야 해."어머니의 낮은 속삭임을 이정표 삼아 논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달빛에 비친 반달칼은 투박했으나 그 날카로움은 수천 년 전 논농사를 시작한 첫 주인들이 고안해 낸 최고의 기구다웠다. 태고의 예리함을 간직한 그 반달칼이 이제 고조할아버지의 손때를 지나 내 손끝에서 서늘하게 살아나고 있었다.

나는 손가락 사이에 반달칼 끈을 끼우고, 어머니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벼 이삭의 목을 지그시 눌러 꺾었다.


툭, 툭….'

낫질의 시원함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소리 없는 전장과도 같은 이 논바닥에서 고조할아버지의 반달칼은 그 무엇보다 요긴한 무기였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투박한 몸체로 흔적 없이 알곡을 도려낼 때마다, 손등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은 낫질이 줄 수 없는 전율 돋는 손맛을 선사했다.

게다가 낫으로 베어낸 벼는 빈자리가 휑하니 드러나 감시원들의 눈에 금방 띄지만, 이삭만 골라 딴 자리는 다음 날 해가 떠도 그저 벼가 조금 고개를 덜 숙인 것처럼 보일 뿐이다.


반달칼의 거친 끈이 손등을 쓸려내 쓰라렸으나, 어머니가 명주천으로 끈을 씌워줘 한결 부드러웠다.


손바닥에 남은 묵직한 낱알들이 감촉은 마치 갓 태어난 새의 온기처럼 따스했다.


한 줌, 두 줌… 그렇게 전대가 묵직해질 때마다 우리는 마치 도둑이라도 된 양 가슴을 졸이며 어둠 속을 기어 다녔다.


재미있는 일은 벼 이삭을 훑는 틈틈이 손끝에 걸리는 메뚜기들을 잡아 전대 귀퉁이에 밀어 넣는 것이었다.

파르르 떨며 허벅지를 치는 미물들의 미세한 반응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의 전율처럼 내 몸으로 전해졌다.


어머니와 나는 어둠 속의 그림자처럼, 혹은 대지의 알곡을 몰래 갈무리하는 들쥐처럼 낮게 엎드려 움직였다. 우리 논의 벼를 당당하게 가마니를 채우는 수확의 기쁨은 빼앗겼지만, 우리는 이 어둠의 틈새에서 우리만의 생존을 수확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