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미한 소리 May 03. 2024

우유에 빠진 파리, 너 이름이 뭐니?

그래픽노블 "뉴 키드"를 읽고


 그래픽노블(문학작품처럼 깊이 있고 예술성 넘치는 작가주의 만화) “뉴 키드”가 2020년 뉴베리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뉴베리 상은 미국 도서관 협회가 수여하는 미국 아동 도서를 위한 문학상인데, 거의 100년 역사상 최초로 그래픽노블이 수상했습니다. 대상 선정 이유는 “어린이 독자를 존중하며 우정, 인종, 계급, 왕따에 대하여 신선하고 유머러스하게 탐구한 작품”이었고, 책표지에 있는 소개는 이와 같았습니다.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조던 뱅크스에게 만화 그리는 것보다 더 신나는 일은 없다. 하지만 부모는 그가 꿈꾸어 온 예술학교 대신, 명문 사립학교에 들여보낸다. 조던은 백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학년 전체에서 몇 안 되는 유색인종 중 하나이다... 조던은 과연... 새로운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인종차별, 왕따, 부모와 자녀의 갈등, 빈부격차처럼 온갖 불편한 주제가 떠올라서, 책을 읽기 전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읽었더니 걱정한 것처럼 매운 마라 맛은 아니었습니다. 맛있고 적당히 매운 엽기 떡볶이 착한 맛이라고 할까요? 조미료를 잔뜩 넣은 자극적인 음식이 아니라 천연 재료로 깊은 맛을 내는 음식이라고 할까요? 책은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내용 없이도 제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주인공 조던의 친구 드류도 흑인으로 학교에서 상처를 받았지만, 함께 사는 할머니에게 그 일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할머니가 걱정하실 것이 뻔했고, 할머니는 흑인은 아무리 차별받아도 불평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드류에게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차 성공하려면 우유에 빠진 파리로 지내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저는 계속 책을 읽어 나가지 못하고 이 대목에서 한참 머물러야 했습니다. 우유는 백인, 파리는 흑인, 그런데 뭘 익숙해지라는 소리지? 불평하지 않는 일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거지? 아! 우유에 빠진 파리가 발버둥 치면 바로 발각되어서 버려질 것이 뻔한 것처럼, 흑인들이 불평하고 자신의 소리를 내면 바로 우유 같은 백인들에게 파리처럼 버려진다는 의미구나! 


 슬프고 당황스러웠습니다. 책 속에 조던과 드류도 할머니의 생각에 당황했습니다. 그러면 그 둘의 상황은 다를까요? 학교 선생님 중 한 백인 선생님이 드류를 계속 디안드레라고 부르는데, 디안드레는 다른 흑인 학생입니다. 그리고 친구들도 조던을 계속 다른 흑인 친구인 마우리라고 부르지요. 이를 불편하게 여긴 조던이 흑인 가너 선생님께 말을 하니까, 가너 선생님은 “네가 새로 와서 그럴 거야”라고 말하는데, 그때 다른 백인 선생님이 가너 선생님을 릭 코치라고 부르며 인사하고 지나갑니다. 무려 14년이나 근무한 동료 선생님을 다른 흑인 선생님으로 혼동한 것이죠. 할머니 시대와 달리 요즘 백인이 유색인종을 파리로 보지는 않겠지만, 요즘 백인 역시 할머니 시대처럼 유색인종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해주지는 않습니다. 백인에게 유색인종은 여전히 이름을 기억해야 할 만큼 가치가 있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아프고 화가 났습니다. 

   

 문득 양희은의 유행어 “너 이름이 뭐니?”가 다르게 여겨졌습니다. 전에는 무서운 선배의 강압적인 말 같았지만, 지금은 이름조차 관심을 갖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따뜻하게 여겨졌습니다. 실제로도 따뜻한 사연이라고 합니다. 개그우먼 이성미가 리포터로 활동하던 신인 시절 혼자 살면서 밥도 잘 못 먹고, 방송국 소파에서 자곤 했었는데, 그 사실을 안 양희은이 어느 날 방송국 복도에서 이성미를 만나자, “저기 쪼끄만 애, 너 이름이 뭐니?”하면서 집에 초대해 집 밥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이성미는 나중에 티브이에 나와서 그때 너무 감동이었고, 그때부터 쭉 양희은의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는다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도 우유에 빠진 파리 같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름이 잘못 불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예 이름조차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불평하지 못하고, 불평하면 안 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그들에게 가서 이렇게 물어봅시다. "너 이름이 뭐니?" 


매거진의 이전글 냉장고 속 음식이 상할 수 있는 것처럼 기억도 상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