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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출내기 Apr 14. 2023

능력과 자격

외국 생활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TV 와 멀어지게 된다. 틀어놓아 봐야 알아 들을수 없기 때문이고, 국가/대륙 마다 방송 송출 방식이 달라서 한국에서 이용하던 TV 로는 전파를 수신할 수 없어서 그렇다. 덕분에 보통 거실 한복판에 가장 상석을 차지하고 있는 TV 가, 우리집에서는 안방의 한쪽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별로 바라볼일이 없었던 TV 를 요새는 종종 틀어보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OTT 에서 방송되는 프로그램들 덕분이다. "이 프로그램은 방송심위위원회의 규정을 준수합니다" 라는 틀에 박힌 문구의 틀 안에서 비슷한 소재와 내용을 다루었던 예전과 달리, 요새 OTT 에서 방영되는 프로그램들은 가히 반전과 충격의 비빔밥이라고나 할까. 판타지, 로맨스, 스릴러, 유머, 역사, 미래를 어쩌면 그리도 잘 섞어서 강렬한 연기와 함께 선사하는지... 그정도 작품들이라면 그 배우와 그 작가분들에게는 당연히 그정도는 드려야 하는것이 맞다.  결정적인 순간에 늘 다음편을 이어서 볼 수 밖에 만드는 그 치밀한 구성과 IT 기술덕분에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한 두달에 한편만 엄선해서 보고 있다. 방송, 드라마 이런쪽에는 문외한인 터라 주로 아내의 제안에 따라가고 있는데 선구안이 아주 훌륭하다. 


얼마전에도 한편을 순식간에 봐 버렸다. 글로리. 워낙 유명하고 화제가 된 작품이니 굳이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 더 보탤필요는 없겠고, 내가 주목하게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자격과 능력에 대한 부분이다. 이 작품에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가해자로 등장하고, 그 능력을 바탕으로 그들은 다른 사람을 짓밟아도 되는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주인공은 끊임없는 자기 부정의 환경과 고통속에서도 한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포기하지 않고, 결국 능력을 키운다. 하지만 아무리 능력을 개발한들, 이미 저 만치 앞서간 그들에게 복수를 하기에는 한 없이 부족하다. 여기에서 주인공은 묘한 부분을 건드리기 시작하는데, 결국 가해자들은 그 방아쇠를 스스로 당기며 자기 자신에게, 다른 가해자에게 복수를 선사한다. 


능력과 자격은 일치될 수 있을까? 아니 질문을 좀 바꿔서 일치해야 하는 것일까? 지금 나는 내가 가진 능력에 걸맞는 자격을 대우를 받고 있을까? 과거에는 매우 협소한 환경과 네트워크 속에서 가야 할 길이 정해져 있었지만, 요즘과 같이 무한한 세계와 가능성이 펼쳐진 시대에서 광야 한가운데 서 있는 각 개인은 그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는것 같다. 문제는 별것 아닌 - 나보다 능력도 없는 사람이 화려하고 멋진 자격/자리를 과시하고 있다는 것이고, 나는 늘 내가 가진 능력보다 보잘것 없는 대우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어딜 감히, 겨우 고작. 능력과 자격의 괴리는 그림자처럼 뒤돌아 보면 어느새 내 바로 곁에 있다. 내가 바라보는 광원에 따라 커졌다가 작아졌다가를 반복하며.


작품속에서 가해자들은 더 많은 것을 원한다. 이미 능력에 넘치는 것들을 가지고 있지만 더 가지기 원한다. 다른 사람을 짓밟을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보다 못해 보이는 자격 없는 사람이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분노하고, 더 가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간다. 멈출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 등장하지만, 결국 멈추지 않고 파멸하고 만다. 반대로 작품속에는 아무 능력이 없고, 자격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냉정하고 험난한 세상속에서, 용기와 희망이 숱하게 꺾이고, 좌절을 안겨주는 일들은 차고 넘친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보지만, 여지 없이 그 기대는 실망으로 변한다. 하지만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순간과 행동들 속에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된다. 무엇이 그 순간 순간에 이것을 가능하게 하였을까?


학대 받아도 되는 사람은 없다. 좌절과 시련속에서 죽어서 이 세상에 사라져 버려도 되는 사람은 없다. 그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도 타인을 모욕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은 그 자체로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부모의 죄를 아이에게 물을 수 없다. 상처 받은 사람에게는 진심어린 위로가 필요하다. 아무리 풍족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결핍이 있다. 모든 상처는 회복될 수 있다. 어떤 상처가 있더라도 사랑 받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 

너무도 당연하고도 상식적인 그 진리가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된다.  나에게 있는 그 가장 기본적인 자격이 타인에게도 있다는 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그들에게 소박한 구원이 찾아온다. 사실 우리 모두에게는 이미 충분히 자격이 있고, 능력이 있다. 누가 뭐라고 하든.


피해자가 당한 고통을 보면, 가해자들이 맞이한 최후를 보면 글로리는 충분히 잔인한 작품이다. 하지만 복수 끝에 따뜻함과 희망이 있다. 나에게도 충분한 자격이 있음을, 다른 사람을 지켜줄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음을.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그들은 더욱더 자격과 능력의 괴리속에 목말라 하다가 파멸해 갈 것을. 능력과 자격은 항상 이렇게 저렇게 늘고, 줄고, 교차되겠지만, 더 능력있고 자격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포기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미 나와 너는 충분히 자격이 있고 능력이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 

엄중한 현실과 다른 나이브한 드라마적 희망론일 수도 있겠지만 받았던 사랑에 고맙고, 전했던 따뜻함이 대견하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길 바라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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