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쓰러졌단 소식에 과로로 인한 실신이라고 생각하며 병원으로 온 동생은, 언니가 죽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엄마, 아빠 대신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일기장마다 붙어있는 스티커는 말하자면 중환자실 출입증이란다. 환자 한 명당 총 면회시간은 20분, 한 번에 한 사람씩 들어간다.네 명이서 5분씩, 나오면 얼른 스티커를 떼어서 다음사람에게 붙여줬다고 했다. 다음 차례는 손소독하고 대기하고 있다가 재빨리 스티커를 받아서 들어간다.
그 안에서 나에게 무슨 말들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눈은 감고 있어도 중환자실의 기억이 다 남아있는 사람도 있다던데, 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안 들렸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기억을 못 하는 것인지조차 모른다.그 시절의 기록은 그저 동생의 일기로만 남아있다.
2018년 11월 28일 <오늘은 언니가 푹 자는 날>
내가 우리 언니를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보다가, 언니 잠시 쉬는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얘기해주려고 기록을 남겨놓기로 했어.
오전에 엄마가 언니 보고왔는데 많이 부어있었대. 근데 그게 정상적 치료과정이라고 하더라구. 근데 정말 신기하게 오후 되니까 부기가 많이 가라앉았더래. 회복이 빠른거라고 하더라.
내일은 언니를 슬슬 잠에서 깨운대. 언니 그동안 못 쉬어서 조금 더 쉬고 싶겠지만, 우리를 위해서 힘내줬으면 좋겠어. 조급해하지 않을게. 그러니 꼭 돌아만 와. 알겠지?
너무 보고싶어. 그래서 언니 잘 나온 폴라로이드 사진 내가 꽁쳤어. 괜찮지? 보고싶을 때마다 보고, 마음 굳게 다잡을게.
언니,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꼭 힘내줘. 제발. 사랑해♡
2018년 11월 30일 <수술 4일째, 혼수상태인 언니가 눈물을 흘렸다>
저녁 면회 때 언니가 엄마, 아빠 다 울렸어. 왜냐구? 언니가 엄마 목소리 듣고 눈물을 흘렸거든. 그리고 저녁 면회 때 간호사님이 말해주셨는데, 작게나마 자가호흡도 하고 있대! 그래서 너무 고마웠어. 잘 이겨내주고 버텨주고 있는 것 같아서. 기다릴 테니까 조금씩, 천천히 우리 곁으로 와줘 언니.
2018년 12월 2일 <언니가 눈을 떴어>
오전 면회에 다녀왔는데 엄마가 막 울면서 나오는 거야.
아, 알았지. 좋은 일이구나.
언니가 엄마한테 선물을 줬더라구. 힘든데 눈도 뜨고, 손도 들었다 내리고. 나 갈 때는 안반겨(?)주더니 아빠 오니까 눈 뜨더라! 언니가 마치 반응한 것 같아서 너무 기뻐서 나 엄마 아빠 앞에서 처음 울었어. 언니, 기뻐서 우는건 괜찮지?
2018년 12월 4일 <언니가 점점 의식을 되찾기 시작했다>
오늘은 언니가 날 더 알아보기 시작했어. '언니 내 목소리 들리면 손 잡아봐.' 하니까 왼손을 가만히 쥐더라. 어제보다 눈 떴다 감았다 하는 속도도 빨라졌어. 우리 언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고 얼마나 무서울까. 내가 다 안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공감하면 좀 더 마음을 놓을까? 언니 손 20분밖에 못 잡아줘서 너무 미안해.
2018년 12월 5일 <목에 호스 떼고 산소호흡기 쓰다>
저녁 면회 때는 입에 호스 빼고 산소마스크 달았대. 언니 진짜 회복속도가 기적이래.. 그래도 우리 시간 많으니까 서두르지 말고 꼼꼼하게 한발 한발 나가자♡ 내가 지켜줄 거야 언니. 걱정하지 말고 나만 믿어. 내가 언니 다시 만들어줄 거야 옛날처럼. 못하는 건 없어. 난 의사 말 안 믿어.
2018년 12월 6일
저녁 면회 때는 언니 기운이 조금 없어 보였어ㅠ 그래도 나 눈 맞춰주려고 노력하고 손잡아줘서 힘이 났어. 그리고 웃겼던건ㅋㅋㅋ 내가 오늘 언니 손에 뽀뽀해도 되냐고ㅋㅋㅋ 물어보니까 조용히 손등 들어줬어. 공주님이야?ㅋㅋㅋ
2018년 12월 8일 <중환자실 나와서 일반병동 첫날>
나는 지금까지 언니가 말하는거 못 들었는데, 중환자실 간호사 선생님이 '잘 나아서 놀러 와야 해~?' 하니까 언니가 '네'했어. 우와- 신기하다 했지.아직은 언니가 말을 잘 못하거든. 어제 간호사 선생님이 언니한테 나 누구냐고 물어봤는데 내 이름 못 말했어.. 그래도 괜찮아!
2018년 12월 9일 <내 이름 불러준 날>
아침에 내 이름 불러달라구 재롱부리니까 '현정' 해줬어. 그래서 넘 행복했다ㅎ
2018년 12월 10일
언니가 중환자실에서 혼자 콧줄 뺐다고 해서 왼손에 장갑 씌우고 침대 난간에 팔을 묶어놨어. 마음이 아파. 팔도 마음대로 못하고ㅠ 그래도 언니 회복 좋아져서 아침 회진 때 가슴 쪽 주사는 다 뺐대. 대신 하나만 팔로 들어가더라.
2018년 12월 19일 <세브란스 외래진료>
언니 침대에 묶어서 세우는 연습했어(기립기). 45도로 세워도 엄청 힘들어했었는데, 지금은 얼추 꼿꼿이 세워놔도 잘 버티더라구.
세브란스에 언니 뇌사진 가지고 입원상담하러 갔는데, 보더니 당연하게 "의식은 없겠네요." 하더라. 내가 당당하게 의식 있다고, 다 알아본다 하니까 엄청 놀라시면서 진짜 다행이고 잘된 일이라 하시더라.
2018년 12월 21일 <두개골 복원술한 날>
오늘 언니 두개골 복원술 하는 날. 머리뼈를 덮었어. 언니가 막 벌벌 떨면서 아파해서 무섭다가도, 잘 버텨줘서 너무 고마웠어.
나와 동생은 생일이 같다.
쌍둥이는 아니고, 내가 태어난 날로부터 정확히 4년 후 같은 날 동생이 태어났다. 둘 다 자연분만이고 어떠한 인위적 개입 없는 결과이다. 태어난 시간도 10분 차이다.
그 덕인가, 제법 터울이 있는 때문인가. 동생과 나의 사이는 퍽 가까웠다.
그래도 나의 뇌출혈 이후 동생이 보여준 '헌신'은 그저 사이가 좋았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동생은 바로 학교 앞 자취방을 정리하고 내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엄마와 교대로 병원에서 나를 간병했으며, 기본 위생이며 뒤처리를 도맡았다.(차마 적지 못할 만큼 더러운 것도 모두)
부모님을 대신해 재활병원을 답사하고 다녔고, 인터넷이건 주변 지인이건 다 뒤져 나를 보살필 최적의 방법을 탐색했다. 그리고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의 상태, 내게 필요한 것, 재활운동방법 등을 꼼꼼히 기록했다.빼곡히 기록한 것이 노트 두 권 분량에 달한다.
내가 쓰러진 지 1년째 되고 맞은 우리들의 생일날, 그렇게 적어온 일기(편지)를 선물이라며 주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