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 없는 그리움, 아네모이아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by 희다


“지나온 적 없는 어제의 세계들에 대한 근원적 노스탤지어”. 이동진 평론가가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그에게 있어서 흔치 않은 별 다섯 개 영화) 내린 평론이다. 프로이트의 말을 인용하자면, 판타지란 진리라는 잉어를 낚아올리는 허구적 미끼이다. 그리고 판타지는 우리 무의식을 이끌어내는 표현방식이다. 알게 모르게 누르고 있는 무의식과 꿈의 세계를 반영해내는 것이 판타지기에, 우리는 판타지 영화를 보고 경험해본 적도 없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게 된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마법과 마술이 난무한 해리포터 같은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세계에 있을 법한 판타지로 그런 느낌을 더 자극한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포스터>

웨스 앤더슨 감독은 본인만의 독자적인 영화세계를 가지고 있다. 적은 카메라 워킹과 원근법을 적극 활용한 화면, 강렬한 색감과 소름 돋을 정도로 철저한 좌우대칭 구도까지. 그의 영화들을 보고 있으면 왠지 한 편의 동화를 보는 기분이 든다. 그 중에서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잔혹동화'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동화들의 원곡에는 잔혹한 부분도 있다. 본 영화에도 잔인한 장면들이 생각보다 자주 등장한다. (15세 관람가임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어 손가락이 잘린다던가, 잘린 머리를 몇 초 동안 그대로 보여준다던가 하는데 그 중 가장 압권인 장면은 주인공과 죄수 일행이 탈옥을 하던 중 간수들에게 들켰을 때, 한 명이 희생하여 간수들을 모두 잔인하게 살해하고 자신도 싸움 도중 죽는 장면일 것이다. 텍스트로만 보았을 땐 마냥 잔혹해 보이지만, 영화에선 웨스 앤더슨 감독 특유의 우스꽝스럽고 익살스러운 연출로 그리 잔인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더 동화적인 영화이다. 또한 아이들을 위한 동화에다가 결말에 약간의 냉정함과 그리움을 더했다.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라는 결말에 마냥 행복해할 수 없는, 주인공의 죽음에 마냥 슬퍼하지 않고 그 죽음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단순한 일을 이제는 마냥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어른들을 위한 영화이자 동화이다. 존재한 적 없는 어제에 대하여 알 수 없는 그리움을 느끼게 하고, 관객들이 ‘어, 이 장면은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이 분명해!’라고 느끼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색이 진하게 묻어나오는 수작이라 생각한다. 그럼 지금부터 이 영화를 면밀히 들여다보도록 하자.


1. 미장센


미장센이란 화면에서의 등장인물의 배치나 역할, 무대장치, 조명 따위에 관한 시각적인 총체적 연출을 일컫는다. 영화에서 미장센 요소는 카메라 구도, 움직임, 조명, 색깔, 세트 등이 있다. 그리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하면 아름답고 완벽한 미장센이다. 과연 어떤 미장센이 숨어있을까?


(1) 색

영화의 동화적 분위기에는 색(color)이 톡톡히 한몫 했다. 전체적으로 밝은 조명과 일반 영화에서 자주 사용하지 않는 강렬한 색과 채도로 영화의 분위기를 증폭시켰다. 또한 밝은 장면과 어두운 장면의 색대비를 극대화하여 그 장면의 분위기를 극대화시켰다. 예를 들어 남녀 주인공이 서로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이라거나, 호텔의 처음 등장 장면 등에서는 빨강색, 분홍색, 노란색(밝음) 등의 강렬한 원색이, 주인공들이 악당에게 쫒길 때나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에는 흰색, 파란색, 검은색(어두움)이 쓰였으며,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색들도 채도를 높여 사용해 이 영화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영화 내 옛 이야기의 결말에서는 전부 흑백으로 연출하여 현실의 냉혹함을 드러냈다. (앤더슨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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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카메라

본 영화의 카메라 연출법에는 감동이 있다. 거의 모든 화면이 정적으로 대칭을 이루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평면적인 화면에서 오묘한 깊이감이 느껴진다. 인물들이나 공간 등을 밋밋할 수 있는 평면적 구조의 비대칭적 요소로 활용하거나, 하나의 소실점을 중심으로 투시를 통해 깊은 원근감을 조성하면서 말이다. 또한, 유난히 인물들이 정면을 바라보는 장면이 많은데, 심지어 그 인물을 중심으로 양 배경은 서로 대칭을 이루기까지 한다. (실제로 영화에 측면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마치 동화책에서 ‘이 인물을 소개합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처럼. (앤더슨 만세!)

또한 영화를 촬영할 때 등장인물들의 동선을 좌우보다는 상하 중심으로 설정하였다. 카메라 워킹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더 나아가 굉장한 팬을 넣지 않고 주로 틸트, 줌업을 사용해 단순하지만 감각적인 연출을 해냈다.

또한 미니어처 촬영이 상당히 많이 사용된 영화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전경이 가장 대표적인 미니어처이고, 하늘 역시 그림이다. 중후반부의 스키 추격 장면 역시 대부분 미니어처로 촬영되었다. 이 때문에 굉장히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동화같은 느낌을 주지만, 노골적으로 허술한 티를 내서 우스꽝스럽고, 더욱 판타지처럼 느껴진다. (앤더슨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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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번외 – 화면비

본 영화 화면 비율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 방법하면, 시대에 따라 비율을 다르게 하는 것이다. 현실 파트와 1980년대는 1.85:1 비율을 사용한 반면, 1968년 시퀀스에선 2.40:1을 사용하였고 주된 이야기가 펼쳐지는 1930년대 부분은 ‘아카데미 비율’이라고 불리는 1.37:1을 사용하였다. 이들은 해당 장면이 배경으로 하는 시대에 주로 쓰이던 화면비율이다. (앤더슨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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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토리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앤더슨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동시에 심오하며 탄탄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또한 상당히 복잡한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 현재 시점 – 1985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라는 책의 작가의 인터뷰 – 1968년 젊었던 시절 작가가 늙은 제로의 이야기를 듣는 장면- 1932년 젊은 제로와 구스타브의 이야기 의 형식이다. 이 예쁜 동화는 현실을 묻어두었다. 그렇기에 이것들이 허구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우선 두 주인공 ‘제로’와 ‘구스타브’는 각각 상징하는 의미가 다르다. 이 영화의 공식 줄거리를 살펴보자.


“1932년 전쟁이 한창이던 어느 날, 세계 최고 부호 ‘마담 D.’가‘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다녀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의 살인을 당한다. 마담 D.는 유언을 통해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명화 ‘사과를 든 소년’을 전설적인 호텔 지배인이자 연인 ‘구스타브’ 앞으로 남긴다. 마담 D.의 유산을 노리고 있던 그의 아들 ‘드미트리’는 구스타브를 졸지에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구스타브는 충실한 호텔 로비보이 ‘제로’와 함께 누명을 벗기기 위한 기상천외한 모험을 시작한다. 한편, 드미트리는 마담 D.의 유품과 함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까지 차지하기 위해 무자비한 킬러 ‘조플링’을 고용하기에 이르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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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스토리에서 ‘제로’는 전쟁에서 희생당한 아픔을 가지고 타국으로 떠난 디아스포라를 상징하고, ‘구스타브’는 품위있고 젠틀하지만 천박하고 우스꽝스러운 구시대를 상징한다. 제로의 가족은 전쟁 중 몰살당하고 제로는 혼자서 살 길을 찾기 위해 주브로브카 공화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이 사실은 구스타브가 제로에게 화를 내는 장면에서 밝혀지는데, 영화는 그가 자신의 무례에 대해 정중히 사과하는 모습으로 전쟁 피해자들에게 잔잔한 위로를 전한다.

CigIjolXAAA0w8y.jpg 구스타브(왼)와 제로(오)


구스타브는 찬란했던 구시대를 상징하는데, 영화 초반부에서는 기차에서 제로를 무시하고 체포하려고 하는 군인들에게 구스타브가 항의하며 덤비자 군인들이 순순히 물러났지만, 후반부에 같은 상황에서는 총에 맞아 죽게 된다. 더 이상 구시대의 정의가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된 것을 구스타브의 죽음으로 상징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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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가 호텔을 인수한 것은 구스타브가 그리웠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구스타브의 '시대'를 동경했다. 제로를 인터뷰한 작가는 제로의 시대를 동경했으며, 그 이야기를 책으로 써낸 작가의 시대를 어떤 독자는 또 동경했다.

그저 동경과 동경의 연속, 그리움과 그리움의 연속체지만 동시에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워하는 자 그 누구도 그 시대를 살아본 적 없다. 당신도 아마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2000년대 이후에 태어났고, 신원호 pd의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를 봤다면 말이다. 겪어본 적 없지만 그 시대를 회상하는 것처럼 그리워할 수 있지 않은가?

그리움이, 동경이 꼭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네모이아(Anemoia)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시절의 분위기와 문화요소 등에 그리움을 느끼는 감정을 뜻한다. 당신은 어떤 아네모이아를 느껴본 적 있는가?


특별하다고 하지 못할 스토리에 캐릭터는 선과 악의 구분이 확실하고 흐름의 개연성도 분명했다.

그러나 그 어떤 영화보다 매력적이다. 알 수 없는 몰입감과 보고 난 후 남는 은은한 후유증까지.

한 낮의 채도 높은 꿈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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