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과 곰팡이(단편소설)
"너도 생각 있었다는 거잖아?"
장례식장을 빠져나와 도로에 올라섰을 때 남편이 화와 궁금증을 오래 참았는지 콧김을 내뿜으며 물었다.
대답을 망설이던 가영은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힐끗 그 모습을 본 남편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근데, 어쩔 생각이었는데?"
어이없다는 듯 천천히 되짚는 남편의 목소리에 노기가 서려 있었다.
"뭘, 어떻게? 우린 다 늙었는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어? " 가영이 들리도록 큰 소리로 한숨을 쉬었다.
"늙으면 할 일, 못할 일 구분 안 해도 된다는 거야?"
"이젠 기억해 내는 것조차 일이야. 설명은 더 힘들구."
가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신호가 바뀌자, 남편은 다시 어깨를 앞으로 기울이고 목을 움츠렸다. 눈이 어두운 그에게 폭우 속 밤길 운전은 늘 꺼리는 일이었다.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려는 것 같았다. 가영도 되도록 그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이따가 얘기해. 지금 운전에만 집중하는 게......"
남편이 마땅치 않은 한숨을 몰아쉬자, 그의 솟았던 어깨와 가슴이 내려앉는 것이 보였다.
남편에게 이해받으리란 기대는 없었다. 가영은 설명이 공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 오래전부터 알았다. 남편도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아왔으리란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가영에게 어떤 감정도 남아있지 않다는 진실보다 희준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이 마음 아팠다.
비는 무섭게 쏟아졌다. 긴장한 차들이 느릿느릿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전조등이 물기를 머금은 도로를 간신히 비추고 있었다.
늦은 밤 낯선 도시 위의 길은 가영에게 아득함을 불러일으켰다. 강원도 영월에서 나고 자란 가영에게 시댁인 남해는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젊은 시절 가영 내외는 젖먹이 아들을 안고도 명절과 제사를 빠지지 않고 찾아야 했다. 시댁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가영은 언제나 아득함을 느꼈다. 그 밤길의 아득함은 삼십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결혼기념사진에 그런 얼굴을 하고, 이젠 무슨 생각으로 연락들을, 대체 무슨 생각들이냐는 거야?"
"나는..." 가영이 맥없이 입을 열었지만, 남편의 버럭 소리에 다시 입을 닫았다.
"아이, 진짜." 남편은 제 목의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소리를 냅다 질렀다.
가영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표정을 굳혔다.
너무 늙어서, 미움도 애정도 귀찮아진 사람들, 마음속에서 미뤄뒀던 말 한 줄조차 꺼내는 데 몇 년이 걸리는 사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믿음으로 포장한 남편과의 무심함, 불신과 단절의 관계는 베란다 곰팡이처럼 소리 없이 피어났다.
차량이 급속히 줄어드는 길에 이르러 가영이 다시 말을 시작했다.
"전에 당신이 그런 말 했었지? 죽음은 모든 악을 고친다고."
"내가?" 남편은 콧웃음을 치며 어이없어했다.
"죽음으로 모든 고통과 시련을 끝낸다는 말, 이탈리아 속담이라고."
"그거야 간 사람들한테나 하는 소리고, 남은 사람에겐 쳇!" 이빨을 앙 다물며 말을 끝내지 않았다.
잠시 후 바람이 거세져 길가의 가로수가 크게 흔들렸다. 와이퍼는 분주히 움직였지만, 빗물은 와이퍼보다 빠르게 흘러내렸다. 가영이 제 손수건으로 뿌옇게 보이는 앞 유리를 닦으며 말했다. 그녀의 남편이 듣지도 않고 고개를 꺾으며 짜증을 냈다.
"아이, 제길, 하늘이 뚫렸나!" 운전대를 꽉 잡은 그가 몸을 뒤로 빼며 말했다.
"일단, 좀 쉬어가자." 남편의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몇 년 전 들렀던 휴게소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가영은 아득함이 해소되는 기분을 느꼈다. 외양이 베니스의 아웃렛을 본떠서 지었다는 남편의 설명을 기억했다.
공들여 만든 건물이지만 의외로 사람들이 북적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국밥을 먹을 때 남편은 정부 정책에 열을 올렸다. 휴게소 건물이 들어서자마자 가까운 곳으로 고속도로가 생기는 바람에 통행량이 줄어 휴게소가 텅텅 비게 생겼다고 제 일처럼 화를 냈다. 뜨거운 국물을 들이켠 남편의 얼굴이 더 벌겋게 달아올라 외면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확실히 장사가 되지 않는지, 나들이 철이었음에도 몇 개의 가게들은 아예 문을 닫은 지 오래돼 보였다. 늦은 시간과 쏟아지는 비에 대부분의 가게가 닫혀 있었지만, 아케이드가 있어 비를 피하기엔 충분했다. 가영과 남편은 휴게소 건물 가운데 화장실 표지판을 향해 차를 세웠다.
우산이 채 펴지기도 전에 둘은 달리다시피 건물 아케이드 밑으로 들어왔다. 강한 비에 계단은 강한 물줄기를 만들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미 그들의 옷뿐 아니라 신발도 다 젖어 버렸다. 아케이드에 들어서자 땅을 두드리며 튀어 올라온 비의 냄새와 건물 안에 고인 곰팡이 냄새가 가영의 코를 스쳤다. 화장실에서 나온 몇 사람이 길로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가영과 남편이 뛰어 올라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쪽으로 와요. 의자가 멀쩡해." 가영이 주변을 살펴 안쪽에 놓인 편의점 의자를 살피고 앉아 말했다. 이웃한 잔치국숫집 여자 둘이 가게 정리를 서두르는 중이었다.
"비가 어지간히 오네요." 한 여자가 말하자 옆의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여자가 물었다.
"이런 비에 어딜 그렇게 잘 차려입고 다녀오세요?" 여자가 열쇠를 만지는 저보다 젊은 여자의 눈치를 살피며 덧붙였다.
"종일 파리 날리며 사람 기다렸네요. 이런 날은 과감히 문 닫아야지. 오늘 장사가 꽝이에요." 여자는 자기가 한 소리에 웃었지만, 문을 채우던 젊은 여자는 표정을 굳혔다. 가영은 그 둘의 관계를 짐작하며 억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친 제얼굴보다 옷이 먼저 뜨인 것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여자의 말에 가영은 남편의 검푸른 정장과 자신의 검은 원피스를 훑어보았다. 보기에 따라선 제법 차려입은 폼새였다. 국숫집 여자들은 가벼이 목례를 하며 우산을 펴고 텅 빈 주차장으로 뛰어 내려갔다.
"그래서......" 낮아진 목소리로 남편이 말을 시작하다 뜸을 들였다.
"그 친구가 가서 그렇게 슬프고 서럽냐?" 남편은 울음을 참으며 말을 누르고 있었다.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그가 천장을 올려 보다가 쳇!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박하게 평했던 사촌의 죽음 앞에서 남편도 가영의 마음을 짐작한 듯했다.
"참나! 남은 사람들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들."
그건 가영이 머릿속에서 떠올려 보았던 똑같은 말이었다. 정리가 필요했다면! 진작에 그런 마음으로 인생을 살았다면! 본인부터 살펴야 했다고 그에게 항변했었던 마음속 말이었다.
잠시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편이 양복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들었다. 두 걸음 앞으로 나가 비로 채워지기 시작한 휴지통을 향해 내던졌다.
"그 사람은 갔고, 우린 아직 여기 있어." 남편이 말했다. 구겨진 명함이 물 위에 동동 뜨다 빗줄기를 맞으며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가영은 남편의 옆에 섰다. 비는 멈출 생각을 않고 차들은 빗속을 헤치고 미적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 앞, 비에 젖은 불빛들이 일그러져 지나치고 있었다.
우리도 그중 하나였다. 희미하지만 아직 꺼지지 않은 불빛. 빗물에 일그러진 불빛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부딪히고 흐트러지며 일렁였다.
이제라도 말할 수 있다면, 늦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 주변사람들 상관없이 제 멋대로 살다 간 희준이나 무슨 소용이냐며 성을 내는 남편 모두가 일그러진 불빛의 잔상과 같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 가영에게 주변의 모든 인생이 다 애처롭게 느껴졌다. 가영이 옆에 선 남편의 소매 끝을 잡으며 말했다.
"집에 가고 싶어."
가영이 오랜만에 은서를 만난 것은 작년 겨울 초였다.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영화표를 끊고 상영시간을 기다리던 가영이 화장실 거울 앞으로 다가갔을 때 손을 씻고 고개를 들던 여자 얼굴을 보았다. 매우 낯익었다. ‘누구지?’ 잠깐 사이 눈을 크게 뜬 둘은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들은 잠시 십 대 아이들처럼 잡은 손을 휘두르며 소란을 떨었다.
은서는 남편을 기다리다 일부러 지하 화장실에 들렀다고 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변한 얼굴을 확인하며, "아직도 그대로다!"는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날은 은서와 도일의 결혼기념일이었다. 은서가 남편이 회사 일로 저녁 시간이 불가능해 점심을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도일 씨 자상한 건 여전한가 보네." 가영이 은서의 옷차림을 훑으며 말했다.
은서는 부인하지 않았다. 정이 많고 따뜻한 도일은 가정에 충실했으며, 이타심과 배려가 도일의 꼬리표로 늘 따라다녔다. 젊어서도 가영은 그런 도일이 희준의 옆에 있어 참 다행이란 생각을 했었다. 희준의 집에서는 아들만큼 도일을 이뻐하고 신임했었다.
"우리 그이가 승진한 지 얼마 안 됐고 오늘은 진짜 빠질 수 없는 모임이라."
은서의 말에 자부심이 보였다.
"그 대신 원하는 것, 사준다는데 뭐, 이 나이에 더 바랄 것도 없고."
"맛있는 점심 핑계로 점심때 잠깐 데이트하기로 했어." 은서가 긴 설명을 늘어놓았을 때 가영은 얼마 전 지나간 자신의 생일날을 떠올렸다. 그날 남편은 멀리 부산에 있었고 아들은 메시지만 보냈을 뿐 친구들과 여행 중이었다. 축하와 위로는 카톡의 메시지가 다였다.
"정말, 몇 년 만이지? 우리. 교수님 정년퇴직하실 때가 마지막이었나?" 눈을 치켜뜬 은서가 말을 이었다. 가영은 가늠도 하지 못했다.
"아니네, 그 후에 교수님 댁 찾아갈 때 한 번 더 봤었구나!" 묻고 대답한 은서는 가영보다 더 정확하게 과거를 기억했다.
"점심 같이하면 좋을 텐데."
"아이, 무슨 소리야? 두 사람 결혼기념일에."
"이 건물에 꽤 좋은 중국집 있어. 트러플 짜장과 고추 유린기 정말 맛있다는데." 영화 상영시간 때문에 동석할 수 없다는 것을 은서는 매우 아쉬워했다. 영화표를 무르거나 다음에 보고 같이 점심을 하자고도 했다. 가영은 기다렸던 영화라고 재차 거절을 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곁눈질하며 준비가 안된 제 자신을 훑어보았다.
”여전히 영화 찾아다니며 보는구나!" 가영이 한사코 거절하자, 김 빠진 목소리의 은서가 전화번호를 물었다. 번호를 주고받으며 반드시 만나야 한다고 약속했다. 영화가 끝난 시간에 가영은 그들을 부딪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가도록 자리에 앉아 있었다.
사실 영화는 밍밍하고 졸렵기도 했다. 프랑스 문화원에서 희준이 이끈 영화를 볼 때와 같은 마음이었다. 심심하고 별거 없고 나른했다. 그런 중에 은서의 말 한마디에 실린 미묘한 표정이 자꾸 가영을 붙잡았다.
"가영아, 우리 그이가 얼마나 너 연락처를 알아보려고 했는지 몰라." 은서의 눈에 자신의 말을 후회하는 모습이 아주 잠깐 드러나다 사라졌다.
그 짧은 표정 변화에서 가영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도일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과거 자신의 약혼자였던 희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 직감했다.
그랬다. 서른 전 가영은 희준처럼 자신이 맞이한 인생에 도리질을 했었다. 그러나 길지 않았다. 남편은 착하고 성실했으며 까탈스럽지 않아 가영을 편하게 했다. 아이를 품에 안은 가영은 매일을 살아내고 미래를 꿈꾸었다. 과거는 너무 희미해져 희준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뿐이었다. 은서와의 재회는 단지 행복한 노년을 저울질하는 잣대들, 예를 들면 자식들의 학업, 남편의 승진이나 퇴직, 고상한 취미활동이나 노후 준비들을 비교해 보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은서가 머뭇거리고 후회한 아주 짧은 표정의 탓인지 가영은 은서의 연락을 두려워하기도 했다. 은서에게는 거의 한 달이 지나가도록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번거로운 과거의 기억들까지 소환할 필요를 은서도 느끼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가영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과거를 회상하고 지금의 은서를 보며 느낄 수 있는 심리적 거리감이 싫었다.
운명이 그들을 비켜가지 않았던 것은 고작 중국식당 때문이었다. 가영이 대학동기들과 미루던 신년 모임을 갖기 위해 시내에서 만날 장소를 물색하던 중이었다. 친구 중 한 명이 중국음식을 들먹였고 가영이 은서가 말한 그 중국식당을 떠올린 것이 빌미가 되었다. 식당에서 한참을 먹고 떠들다 나온 그들은 옆 건물의 스타벅스로 향했다. 여섯 명이 앉을만한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좁은 공간에 의자를 덧대어 6인용 좌석을 만들 생각이었다. 동기 중 한 명이 빈 의자에 팔을 걸친 도일에게 의자를 사용하고 싶다고 말을 건넸다. 천성이 다정한 도일이 의자를 그들의 자리까지 직접 나르다 가영을 본 것이다.
"아니, 이게 누구야. 가영 씨! 나, 권도일! 와아, 이렇게 볼 사람은 본다니까." 도일은 가영의 얼굴을 뜯어보며 여러 차례 포옹하듯 안았다. 다섯 친구들은 고개를 젖혀 가영과 도일을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들끼리 속삭였다.
"그렇지 않아도, 은서가 가영 씨 만났다고! 들었어." 동기들은 눈치껏 가영이 늘 마시던 커피를 주문했고 서서 말을 이어가는 그들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내가 가영 씨 전화번호 달라고 엄청 졸랐어. 내가 직접 연락해 보겠다고. 근데 은서가 한사코 말리네." 가영은 자신의 직감이 틀리지 않다는 확신이 들었다. 은서가 전화번호가 있지만, 한동안 아무 연락을 하지 않은 이유도 자신과 같은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차차, 친구들 기다리시네. 커피도 식을 테니 일단 오늘 말고. 날 바로 잡아 은서와 셋이 한번 만납시다." 도일이 명함을 꺼내 가영의 손에 쥐어주었다.
"은서 통해 연락할게. 보자고 할 때 꼭 나와요."
그 긴 세월 간 부딪힌 적 없는 그 둘을 두 달 만에 번갈아 마주치다니! 가영은 이상한 운명의 느낌이 들었다. 묘한 흥분과 설렘이 빠르게 마음을 휘어잡았다.
자리로 돌아온 가영은 보지도 않은 명함을 가방 속에 넣으려 핸드백을 들었다. 겉모습은 멀쩡한 것과 다른 가방의 내부가 떠올랐다. 핸드백 뒤편의 포켓 속으로 명함을 밀어 넣었다.
가영은 누구냐 묻는 친구들에게 '친구 남편'이라고 짧게 답한 후 생각에 빠져 입을 닫아버렸다. 친구들은 가영의 얼굴을 살피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들은 대화에 관심 없이 생각에 빠진 가영을 살피며 추측했다. 가영의 파혼 과정은 그들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전해 들은 희준과의 이야기는 동창들에게도 유명한 일화였다. 그 이야기에 키 큰 도일이 여러 번 등장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름만 모를 뿐 그가 도일인 것을 직감했다.
도일이 회사 동료들과 카페를 나갈 때 가영에게 다시 들렀다. 꼭 만나자고, 다짐을 받아낼 때 가영이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었다. 사실 희준과는 연인이었지만 가영에게 도일은 참 괜찮은 남자였고 오빠 같은 인연이었다. 그런 도일을 본 것이 좋았다.
다음날 은서의 전화가 걸려 왔고 가영의 짐작은 들어맞았다. 은서가 남편과의 재회를 확인하면서 한참을 웃더니 사뭇 진지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가영아 내가 바로 연락하지 않은 건......" 은서가 하던 말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제 성에 목소리가 커졌다.
"그리고, 그이가 연락해 보겠다는 것도 내가 사실 말렸어. 여러 번. 아니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냐구?" 은서가 숨을 깊게 쉬는 것이 수화기 너머로 전해졌다.
"희준 씨 많이 아파. 아니 이왕 이렇게 된 거 얘기해야겠네. 작년 구월에 췌장암 판명받았어." 작정이나 한 듯 말이 더 빨라졌다.
"지금은?" 가영이 담담하게 물었다.
"어, 지난달 그이가 만나봤다는데 차마 볼 수가 없이 말랐다더라구."
"희준 씨 지금 혼자야. 몇 년 전에 이혼했고 제 본가 식구들과 연락이 끊긴 지도 오래됐어. 작년에 우리 집에 한, 두 번 왔었고."
가영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말이 빨랐던 은서가 제 스스로 조바심을 냈다.
"아무 때나 집이고 회사고 찾아와, 술 마시자 붙들고,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서 네 전화번호 찾아보라고 소리 지르고."
말이 빨라진 은서에게서 노여움이 묻어났다. 희준의 뒤틀린 인생의 여파가 은서와 도일의 인생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웠던 탓이다. 게다가 두 남자의 본가가 한 동네라 평생을 같이 살아온 셈이다. 희준과 결혼이 무산되었을 때 도일과 은서는 가족 일처럼 슬퍼했고 당황해했다. 그들 넷은 20대 청춘을 고스란히 함께했고 미래도 같이 그려갔었다.
"솔직히 죽음 앞둔 희준 씨 가엽지." 은서가 혀를 찼다. "하지만 우리 그이 정말 희준 씨 땜에 고생 많아, 가족도 등한시하는 사람 모른 체할 수도 없고. 너도 알다시피 도일 씨 마음 약하고 정도 많아서 말이야. 만만한 그이만 찾는다니까." 은서의 심정을 모르지 않았다. 희준과 도일은 거의 형제나 다름없이 오랜 세월을 같이 한 둘도 없는 친구였다. 아마도 희준에게 가족 누구보다도 속을 나눈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통화를 마치자마자 은서에게서 바로 메시지가 날아왔다.
'미안. 나도 모르게 너무 야박했어. 아픈 희준 씨 두고. 마음 편치 않을 너에게 별말을 다 한 것 같다. 미안해.'
이어 다시 한번의 메시지가 더 왔다.
'우리 셋이 한번 보자. 곧 연락할게. 잘 지내고'
은서의 메시지를 읽고 가영은 창문을 열고 매서운 봄바람을 폐 깊숙이 들이켰다.
얼마 뒤 은서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을 때 가영은 겨울 이불과 옷들을 세탁하려고 장롱을 열어젖힌 상태였다. 가영은 장롱을 열어 옷을 뒤적이는 동안 커피는 차갑게 식어버렸고 싱크대에 쏟아버렸다. 가영은 모처럼 맘먹은 빨래를 미루고 장롱문을 닫아버렸다.
해머를 든 사나이로 유명한 건물 지하의 스페인식 식당에 먼저 도착한 것은 가영이었다. 약속시간보다 이십여 분이나 이른 시간이었다. 음식을 알아보려 메뉴판을 요청하는 찰나에 도일과 은서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다시 봐도 도일은 여전히 군살 없는 몸에 얼굴은 주름이 없이 생기가 돌았다. 오십 대 후반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가영의 말에 은서는 일화를 덧붙였다.
"작년, 스페인 갔을 때 웨이터 하나가 40대 초반으로까지 봤었다 야." 은서가 입꼬리를 올리며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은서는 도서관 사서직을 놓지 않았고 그림도 꾸준히 그린다고 말했다. 도일의 승진과 새집까지 자신에게 지금은 호시절이라는 말을 스스로 했다.
"이 사람 그림 그리게, 방 하나 완전히 작업실로 만들었지." 프사 속 이젤과 그림들이 즐비한 곳이 은서의 방임을 확인했다. 그런 그들에게 희준의 삶이 어떻게 느껴질지 순간 가늠이 되었다. 가영은 건강을 문제로 학교를 그만둔 지 칠 년이 돼 간다고 말했다. 남편은 이미 이년 전 퇴직 후 재취업으로 부산에 거주한다는 말을 보탰다. 주말부부 대한 질문이 이어질 것을 예상했지만 둘은 남편에 대해 묻지 않았다. 사실 별건 없었다. 부산의 남편은 가영에게 짐 될만한 일을 별로 만들지 않았다. 남편 근황을 묻지 않은 그들을 바라보다 자신도 남편의 부산에서의 생활을 별반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번 주도 남편은 친구들과 거제도 여행으로 서울에 상경하지 않을 것이다. 어제, 오늘 둘은 전화조차 주고받지 않았다.
빠에야와 감바스 그리고 오징어 튀김과 문어요리가 한 상 차려졌을 때에야 화제가 바뀌었다. 도일은 익숙한 발음으로 와인을 주문했고 그들은 잔을 부딪히며 흥을 돋웠다.
곧 스페인을 여행한 경험담과 식탁 위 음식의 맛에 대한 대화가 이어졌다. 도착할 때까지 긴장과 불안을 붙들고 있었던 가영도 거리낌 없이 웃고 마셨다. 자식들의 사춘기와 학업이야기를 할 때 식사가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와인 두 잔에 가영의 불안은 사라지고 마음도 몸도 녹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식탁을 정리한 웨이터가 차를 물었을 때 도일은 차 대신 계산서를 요구했다.
"자, 자리 옮깁시다. 지난번 갔던 그 카페, 루소 좋지 않았어?"라고 물었을 때 은서는 양손의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들은 정동길로 옮아갔고 도일이 애정한다는 커피맛집 '커피루소'로 들어갔다.
도일과 가영은 에스프레소를, 은서는 카페라테를 주문하고 2층에 올랐다. 젊은 사람들로 가득한 카페는 적당한 음악 볼륨과 너른 여백으로 가영의 마음에 쏙 들었다.
가영과 도일이 잔을 마주치며 커피 맛에 흡족해했다. 남은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털어 넣은 도일이 한 모금에 잔을 비웠다.
"둘이 꼭 그렇게 에스프레소만 찾았지. 여전하네." 은서가 제 입술의 거품을 훔쳐내며 말했다.
"진짜, 오랜만에 맛있는 커피 마셔요." 가영의 말에 셋은 동시에 아현동의 화실을 떠올렸다.
희준은 일반인의 수준을 넘는 커피 애호가였다. 커피라면 여느 카페 사장들보다 전문적인 지식과 감별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커피에 대한 흥미는 자격증 취득으로 끝나지 않았다. 전문가들을 찾아 강남과 신촌, 동해와 강릉, 제주 등을 찾아다니다가 끝내 해외까지 눈을 돌렸다. 가영의 나이가 스물여섯이었다. 중학교 선생이라는 가영의 직업 하나만으로 여기저기서 중신이 들어오던 시기였다. 그녀의 부모는 희준을 사윗감으로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희준의 집이 형편이 제법 괜찮아 서울의 30평대 아파트를 준비해 줄 수 있는 재력 덕에 상견례까지는 이루어졌다. 희준과의 결혼이 뒤엎어진 것은 희준의 직업 탓이 아니었다. 희준의 엄마는 자신들의 재력에는 한 참 미치지 못하는 가영네의 경제력을 들먹여 비위를 건드렸다. 가영과 희준의 사랑은 부모들의 과신과 어리석음으로 어이없게 막을 내려야 했다.
희준은 커피를 핑계로 2년간 해외를 떠돌았고, 그 사이 가영은 중매로 남편을 만나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 이 모든 변화를 은서와 도일이 곁에서 지켜봤다.
은서와 도일의 결혼식엔 배가 부른 가영도, 해외를 떠돌던 희준도 참석하지 못했다. 이후 그들 넷 모두는 한 번도 한자리에 마주하지 않게 되었다.
커피잔을 비운 가영이 더는 못 기다리겠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어떻게 된 거예요? 희준 씨"
"길어요. 그동안을 다 말하자면, 오늘 하루로는 안 되지 싶은데." 웃음기를 거둔 도일이 말을 이어갔다.
"가영 씨 가고 녀석이 혼자 이탈리아로 떠났어요. 나갔다가 남미까지 한 2년 만인가? 아주, 못 알아보게 새까매져서 들어왔지. 그땐 우리도 육아 때문에 정신없었어요. 술 한잔 맘 놓고 못 했었어."
도일은 회상에 젖은 듯 천장을 바라보며 당시를 그려보는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었다.
"결혼식도 없이 살림을 차렸는데 오래가지도 못했고 부모 재산도 많이 탕진했고." 도일의 말에 은서가 팔짱을 끼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 거친 입하고 행색하고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은서가 얘기를 할 듯 말 듯 혼잣말로 웅얼거렸다.
"진짜 뭐, 그런 여자를! 진짜 희준 씨 너무 이해 안 되더라. 나 진짜 그때 엄청 실망했잖아." 은서가 깊은 한숨을 쉬고 가영은 멋쩍은 웃음을 띠며 왜?라는 눈으로 도일을 쳐다보았다.
"이 여자, 한두 남자랑 살아 본 사람이 아니더라고. 아마 뭐." 더는 들을 거 없다는 듯 눈을 찌푸리고 도리질하며 입을 닫았다.
도일의 얼굴이 구겨졌다. 젊어 보였던 도일의 얼굴이 급속히 나이 들어 보였다.
가영의 입꼬리가 눈에 띄게 내려앉았다. 기억조차 희미해진 과거 연인, 희준에게 몰입된 것인지 자신의 인생에 연민이 생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도일이 입을 닫으며 고개를 떨구고 제 손을 주무르자 은서가 말을 이어갔다.
"두세 달마다 술 사달라 전화가 집으로도 오곤 했는데, 작년 가을부터 딱 끊겼어. 지금은 봐줄 수 없이 심각하대." 소식을 전하기 싫어 연락을 망설였던 은서는 사라지고 없었다.
희준이 정말 더 사랑했던 걸까?
지금 가영에게 그는 그저 지나간 이름이었다. 다시 만나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의 기억 속에 자신이 그렇게 오래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이상하게도 마음을 뒤흔들었다.
다들 커피잔을 만지며 눈은 창밖을 향했다.
"걔가 죽기 전에 딱 한 번만 가영 씨 보고 싶다고 하도 졸라서 말야. 술만 마시면 전화질을 얼마나 해대는지...... 은서가 전화번호 차단하라고까지 한다니까. 언제 내가 그랬지. 이 미친놈아, 이제 와 무슨 소용이냐, 몸이나 회복하면 그때 가서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연락처 찾아본다고 말이지"
"그러면 또 이 자식, 알았다고 전화 끊었다가 얼마 뒤 또 불러내 술을 3차, 4차, 끝까지 마시려고 하니 몸이 무슨 수로 버티냐고!"
도일이 과거 시간을 되짚으며 말하는 사이 그의 얼굴이 갑자기 더 늙어 보였다.
"근데, 가영 씨. 걔 이제 두세 달도 못 산답니다. 그러니 눈감기 전에 한 번 봐줘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 거예요." 도일이 가영의 눈을 살피며 말을 마치며 제 입술을 깨물었다.
적막 속에서 그들은 다시 찻잔을 만지고 창밖을 내다봤다.
잠시 뒤 다시 말을 시작한 것은 도일이었다.
"언제든......" 도일은 하던 말을 멈춘 채 가영의 낯을 살폈다. 가영과 눈이 마주치자 망설였던 깊은 한숨과 함께 읊조리듯 말했다. "생각 있으면 은서 통해 말만 해요." 도일 옆에 말없이 앉아있던 은서는 제 남편의 말에 마지못한 고갯짓을 보였다. 도일의 낮은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미련이 엿보였다. 가영은 애꿎은 냅킨을 접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가영이 속으로 "이제와 만나봐야 무슨 소용이......"라고 말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죽어가는 사람 소원이니까."도일은 다시 뜸을 들였지만 어려운 말을 다 했다는 심정에 한결 가벼운 표정을 띠었다.
도일이 측은한 표정으로 가영을 그윽하게 쳐다보았다. 가영은 오랜만에 넷이 함께 갔었던 해안가와 계곡 산장 그리고 기차와 터미널 등의 장면들을 기억해 냈다. 여자들의 배낭을 앞뒤로 메고 힘자랑을 하던 도일과 희준의 모습과 맥주병을 크로스하며 애정공세를 퍼붓던 치기 어린 이십 대를 기억했다.
도일이 계산을 하는 동안 은서가 가영에게 빠른 말로 속삭였다.
"가영아, 너무 부담 갖지 마. 이이야 뭐, 제 평생 친구니까 이해해 주라. 나는 그래. 네가 이제 와서 왜 그 딱한 모습을 봐야 하냐고. 좋지도 않은 기억을 뭐 하러 만들어? 안 그래?"
은서가 가영을 손을 잡으며 당부했다.
"가영아, 살아 보니 측은지심도 이해되지만, 뭐 하러 안 좋은 기억을 굳이 만들어?" 그러자 은서의 말을 들은 도일도 덩달아 입꼬리를 올리고 안색을 바꾸며 덧붙였다.
"그래, 이 사람 말이 더 맞지. 가영 씨! 가영 씨 봐서 참, 좋다. 삼십 년 전 우리로 돌아간 것만 같아. 이제 우리, 이렇게 가끔 보고 삽시다. 그 자식 빼고 우리끼리라도"
그들은 가볍게 포옹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광화문 나오면 연락하기! 은서 없이도 언제든 점심 살 수 있어. 다음엔 더 맛있는 것 사줄게요." 도일의 말에 가영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또 봐! 가영아." 은서가 제 남편의 팔짱을 끼며 매달릴 때 가영은 옅은 웃음을 띠었다. 150 센티미터를 간신히 넘긴 키의 은서에 비해 187 센티미터의 도일의 키가 너무 커서 언제나 그들은 '매달린다'라고 말했었다. 그 둘이 덕수궁 쪽으로 향하며 여러 번 뒤를 돌아 손을 흔들었고 가영은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며 돌담길에 서있었다. 광화문 쪽으로 돌아 나오는 길에 가영은 안국역 쪽으로 한참을 걸었다. 곳곳에서 희준과의 추억이 회상되긴 아주 오랜만이었다.
가영이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 교통카드를 찍자마자 메시지가 떴다. 버스에 앉자 이어 남편의 사진이 도착했다. 소주잔을 든 모습에, 가영은 피식 웃었다. 버스 자리에 앉자마자 아들에게서도 카톡이 왔다. 너무 늦을 것 같아 가까운 친구 오피스텔에서 자고 오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들 넷도 그랬다. 신촌으로 향하는 길목의 은서 화실은 집이 멀다는 핑계로, 늦은 귀가를 핑계로, 해야 할 과제를 핑계로 모이고 머물렀다. 언제나 넷 중 누구나 미리 와 제집처럼 음악을 듣고 술을 마셨다. 담배를 입에 물고 볼륨을 높여 노래를 부르며 시도 때도 없이 춤을 췄다. 청춘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버거웠고 허세와 치기로 가득했다. 특별한 일 없이 감정의 요동만으로도 통곡하기도 등을 토닥이고 안으며 서둘러 뜨거워지기도 했다.
이후에 가영은 수시로 창밖으로 눈을 주고 길어진 해를 넋 놓고 살폈다. 해는 그들 넷이 만났던 이주 전보다 훨씬 길어졌다. ‘한 번이야 어떠냐?’는 도일의 말이 소 되새김질하듯 가영의 하루에 수도 없이 떠올랐다. 은서의 충고도 이해가 갔다.
가영은 타인의 슬픔에 공감이 빠른 편이었다. 하지만 희준에 대한 어떤 감정이 스스로 설명되지 않았다. 그를 보고 본인의 지금 생활이 흔들릴 거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재작년 이웃 친구의 카페에 일손이 급해 몇 시간 도와줄 때조차 다양한 커피이름 앞에서도 그가 떠오르지 않았다. 전해 들은 희준의 엉킨 인생이 실타래와 찢어진 천의 콜라주로 눈앞에 머물다 사라졌다. 대체 누구와 어떤 사랑을 했던 걸까? 그가 붙들고 있는 집착은 대체 뭘까? 대체 그는 어떤 인생을 산 것인가? 하는 의구심과 안타까운 질문이 수시로 떠올랐다.
그럼에도 자신의 판단과는 다르게 골똘하게 생각하거나 멍 때리기를 번갈아 가며 봄을 보내고 있었다. 티비를 보고도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하지 못할 때도 많았다.
"아니, 왜 전화를 안 받아? 핸드폰 어디 딴 데 둔 거 아니야?" 요란한 집 전화 소리에 놀란 가영에게 남편은 버럭, 소리부터 질렀다.
"엄마, 내 회색 쟈켓 찾아왔어? 뭐? 이번 주 입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아직도요? 아이참, 그렇게 부탁했는데."
남편의 호통과 아들의 투정이 번갈아 넋이 나간 가영을 흔들어 깨웠다.
4월이 오며 가영은 이웃 친구들과 벚꽃 나들이에 바빠졌다. 산수유를 놓쳤으니 벚꽃이라도 제대로 보자는 추임에 가방을 추리고 단장을 했다. 남편은 부산에 있을 동안 남부 지역 산을 다 돌아볼 거라며 집에 올라오지 않는 주말이 많았다. 주말을 건너뛰는 남편의 선택을 가영은 반겼다. 가영을 아는 이웃들도 남편의 외지 생활에 집안일이 거의 없는 가영을 부러워했다.
봄이 지나도록 은서와 도일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평소에 잘 들여다보지 않던 달력의 날짜들을 무심코 바라보는 일이 잦았다. 매일 새벽, 커튼을 제치며 희준의 마지막 하루가 오늘일까 하는 두려움을 느꼈다. 가영이 집안일에 마음을 둘 수 없어, 할 일들은 미뤄지고 있었다. 장마가 오기 전 해치워야 할 일은 겨울옷 세탁뿐이 아니었다. 베란다 천장과 벽 모서리의 검은곰팡이가 그녀의 신경을 긁었다. 가영은 베란다 구석을 수시로 바라보았다. 벽 모서리마다 검은곰팡이가 더 진하고 넓게 퍼져 있었다. 한때 하얗던 벽은 얼룩져 있었고, 창문을 열 때마다 눅눅한 냄새가 안으로 퍼져왔다. 가영이 손에 버릴 걸레를 들고 곰팡이 자국을 문질러보다 이내 손을 거두었다. 집안 구석구석 스며든 그 냄새처럼, 마음속에도 지우지 못한 무력감이 퍼져 가고 있었다.
볼썽사나운 검은곰팡이의 생명력에 가영의 기력이 달리는 느낌도 받았다. 벚꽃은 시들고 져도 곰팡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약을 치고 충분히 환기해야 할 곰팡이 제거는 여름이 오기 전에 해야 할 일이었다. 이전이라면 남편이 가영의 성화에 못 이겨 속옷차림으로 덤빈 일이었지만 올해는 달랐다. 곰팡이에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편이 주말을 건너뛴다는 통보를 할 때 곰팡이타령을 했지만 남편은 귓등으로 들었다. 가영도 더워지기 전에 부산으로 내려와 멍게 비빔밥을 같이 먹자는 남편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 들었다. 사실 날씨도 가영을 거들었다. 4월 말이 되도록 기온은 원만하게 오르고 봄은 지속될 것 같았다.
아들이 친구들과 여행을 간다고 집에 들어오지 않은 토요일 새벽, 가영은 꿈속의 낯선 사람에게 소리를 내지르며 이불을 걷어찼다. 목덜미가 축축했다.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있었다. 계절이 지난 이불이 더 무겁게 가영을 짓눌렀다. 가영이 끄응 소리를 내며 일어서 몸을 추슬렀다. '봄이 다 가기 전에, 장마가 오기 전에 겨울옷들과 이불을 세탁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이불을 걷어냈다. 세탁기를 돌리기엔 너무 이른, 새벽 네시였다. 이불을 세탁기 앞으로 던져 놓았다. 창문을 여니 아직 새벽바람은 추워 카디건을 어깨에 걸치고 양말을 신었다. 악몽 탓인지 앓고 난 사람처럼 기운이 없었다. 가영이 한동안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상부장 깊은 곳에 박혀 있던 스테인리스 모카포트를 꺼냈다. 한때는 매일 아침 치글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커피를 내렸지만, 이제는 먼지와 마른풀 냄새만 남아 있었다. 희준과 함께했던 그 시절, 네 사람이 모여 커피를 나누던 시간이 불현듯 떠올랐다. 모카포트의 묵직한 감촉이 손끝에 남았다. 비알리띠 모카포트도 잘 모르던 시절, 가영과 희준 그리고 은서와 도일 넷이 한자리에 모여 커피가 치글치글 올라오는 소리를 반색하고 맛과 향을 음미했었다. 은서의 화실엔 언제나 커피 향과 유화 오일의 냄새가 뒤섞여 진동했었다. 동이 트기를 기다려 가영은 커피를 갈았다.
5월 초에 이르러 날씨는 갑자기 30도를 치달았다. 티브이에는 예년보다 한 달이나 빠른 무더위를 예고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편성되었다. 뉴스에는 기후 전문가가 패널로 나와 이른 장마와 지구의 이상기후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중 한 사람은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바람을 읽는 것은 너무나 어려워 인간의 무기력이 느껴진다고도 말했다. 더위와 함께 가영은 조바심을 느꼈다.
여느 해보다 한 달이나 빠른 장마예보에 정부에서는 다양한 대비책을 내놓았고 티비엔 장말철 유의사항이 어린아이도 이해할 만한 수준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수시로 방송되었다.
때 이른 장마에 가영뿐 아니라 이웃과 지인들도 허둥댔다. 어린이날 큰 비 소식에 행사를 앞둔 구청에서는 행사 연기를 발표하며 구민들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아파트 관리 사무실에서는 단지 내 물길과 안전주차에 대한 당부가 두 차례 발표되었다. 동네 친구들과의 드라이브는 취소되었다. 기약 없이 봐서 하자는 말로 마무리되었다. 가영은 심란하기도 했고 늘어지는 수다를 경계하는 터라 미뤄진 만남소식이 싫지 않았다. 남편도 주말에 가져갈 빨래의 양과 범위를 물으며 두 차례 연락을 했다. 여름을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가영과 같은 다급함이 느껴졌다.
손이 많이 가는 겨울옷들을 다 빨기도 전에 하늘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은 무겁고 습했다. 금요일 오후였다. 빨래를 하나 가득 널어놓은 뒤 내다본 하늘엔 검고 두터운 먹구름이 가득했다. 점심을 먹고 난 오후에, 남편은 빨래거리를 싣고 부산을 출발했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평소라면 남편은 오후 여섯 시쯤 집에 도착할 것이다. 남편이 올라오는 주말이면, 가영은 주말 내내 먹을 반찬을 준비해야 했다. 장을 보러 나서자, 목을 휘감는 습도에 가영은 인상을 썼다. 입고 나온 바지가 다리에 감겼다. 장을 보고 들어오자 등은 땀으로 얼룩이 졌다. 하늘은 무거운 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물 폭탄을 터트리기 직전이었다.
장 봐온 재료를 손질하다가 비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거실 창문을 닫으며 내려다본 거리에 사람들의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비가 쏟아지기 전 장을 봐 온 것이 천만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앞 베란다로 향했다. 건조대 위엔 겨울 니트 하나만이 긴 팔을 늘어뜨린 채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에 무게 균형을 잃은 겨울옷들이 베란다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가영은 화를 참으며 건조대에 아무렇게나 빨래들을 올려놓았다. 떨어진 빨래들과 곰팡이까지 가영의 마음을 헤집어 놓았다. 지친 가영이 소파에 앉았을 때 핸드폰에 메시지가 뜨는 것이 보였다.
"엄마 왜 전화 안 받아? 오늘 아빠 올라오시지? 난 성준이네서 자고 가려구. 아빠한테는 엄마가 잘 말해줘! 그리고 밖에 나가봐 내가 배달시킨 거 지금 도착했다고 연락 왔네. 내가 집 가서 해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미간을 찌푸리며 긴 메시지를 읽었다. 가영이 미간의 주름을 펴고 입꼬리를 올렸다. 재작년 자신의 용돈으로 생일케이크를 사들고 들어와 초를 밝힌 날이 떠올랐다. 배달된 물건은 곰팡이 제거재였다. 가영의 마음을 읽은 아들의 배려에 행복감을 느꼈다.
전국적으로 내리는 비에 남편이 도착할 시간은 더 늦어질 것이다. 가영은 주방을 정리하고 티비 앞에 앉았다. 뉴스 채널에서 전국의 날씨 예보 중이었다. 전국의 강수량을 알리는 기상 캐스터의 노란 우비가 시선을 끌었다.
채널을 돌리는 사이 집 전화가 울렸다. 집 전화가 울리는 사이 번개가 쳤고 전화를 받으러 가는 사이 천둥이 울렸다. 예기치 않은 소리에 놀란 가영이 인상을 쓰며 혼잣말로 화를 냈다. 받으니 남편이었다.
"야, 어떡하냐! 경열이 형이 죽었단다." 빗소리와 먼 곳에서 울려오는 천둥소리에 남편의 소리가 정확하게 들리지 않았지만 ‘경열’이라는 이름만으로 상황이 파악되었다. 남편의 사촌 형인 경열은 일 년이 넘게 간암과 후두암으로 투병 중이었다.
"아니 왜? 조금 나아져 음식을 드신다더니?." 남편은 가영의 말로 제대로 듣지 않고 조급하게 말했다.
"여하튼 집에 가자마자 옷 입고 바로 가려구. 내일 공항에 나가봐야 하고 오후엔 그 사람들하고 어떻게 약속이 잡힐지 모르거든. 아무래도, 오늘 바로 다녀오는 게 낫지 싶어."
"주말에도 바이오 대접 일을 해야 하는 거야?"
"그럴려구 나 채용한 회산데, 뭘. "
쉽지 않은 재취업에 남편의 중국어 능력과 중국 출장 경험은 큰 빌미가 돼주었다.
"장례식장이 어딘데?"
"일산 쪽이야. 일단 그렇게 알고, 끊어. 비가 오기 시작하네."
전화를 끊으며 ‘같이 가자고’ 남편이 말했을 때 가영은 그동안 남편과 자신이 부부 동반으로 집안 행사에 다녀온 지가 꽤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편의 사촌은 술을 좋아해, 모임마다 술병과 잔을 들고 다녔다. 이혼과 병세로 자리를 비우자 모두가 금세 눈치챘다. 요양원에 들어가던 때 그의 몸무게가 50킬로가 안 되었다며 남편은 그가 ‘다 살았다’는 자조적인 말을 스스럼없이 했다. 이어 그의 성실치 못한 인생을 비난했다.
부재중 전화 목록을 보니 아들의 두 번 전화 사이 남편의 부재중 전화가 보였다. 가영은 생각지도 않은 장례 소식에 희준이 떠올랐지만 장롱을 열어 옷을 추리며 도리질을 했다. 남편의 퇴직 전 마지막 맞춘 여름정장과 오래된 검은 여름 원피스를 내놓았다.
가영은 만들려던 반찬의 재료들을 모두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수시로 시계를 바라보다가 원피스를 입고 조의금을 챙겼다.
가영의 마음은 심란했다.
남편의 빗길 운전도, 아들의 잦은 외박도.
거기에 시아주버니의 죽음과, 끝내 외면한 희준의 소식까지 겹쳐 있었다.
남편이 집에 도착한 것은 밤 일곱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남편은 들어서자마자 앉지도 못한 채 옷을 갈아입었다. 선 채 물 한 컵을 마신 남편이 시장기를 느낀다며 서둘러가서 저녁부터 해결하자고 말했다. 말은 어떡하냐 혀를 차면서도 시장기를 어쩌지 못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감정 없이 쳐다보았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남편은 곧장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때, 가영의 손 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은서의 이름이 떴고, 메시지는 곧 사라졌다. 읽는 게 두려웠다. 등줄기로 한기가 스며들며, 그녀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손에 쥔 우산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사이 아파트 현관을 향한 자동차의 전조등이 가영을 비추었다. 가영이 핸드폰을 열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잘 지내니? 오늘 희준 씨 부모님 곁에 누웠어. 이제는 더 아프지 않을 거야. 도일 씨가 지난달, 네가 잘 지내고 있다고 전해줬어. 희준 씨… 마지막까지 너를 찾았대. 의식이 흐릿해질 때도, 너를 찾았대. 이제 남은 우리라도 잘 지내자. 건강하고, 다시 만나자. 연락할게!
가영의 얼굴이 굳어진 채 막대기처럼 제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필이면 지금 하필이면 오늘, 가영은 가슴속에서 소리를 내질렀다.
남편이 의아한 듯 가볍게 클락션을 누르며 가영을 재촉했다.
"뭐야? 서두르자니까." 면박 주는 소리에 가영은 아무 내색을 하지 않았고 남편은 운전을 시작했다.
"나오다 말고 서서 뭘 한 거야? 왜?" 남편이 핸들을 우측으로 돌리며 가영을 힐끗 보고 못마땅하게 물었다. 가영은 대답 대신 비가 너무 온다는 말을 했다.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동안 빗줄기가 강해지기 시작했다.
장례식장 지하엔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호실을 알리는 전광판에 경열의 사진이 보였다. 오래전 젊어서의 사진이었다. 죽은 이의 사진들이 걸린 복도의 형광등은 너무 밝아 사람들의 얼굴이 푸르러 보였다. 입구 부조함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경열의 두 딸이 일어서며 그들을 맞았다. 아버지의 지병이 오래된 탓인지 딸들의 얼굴은 비통하게 보였지만 차분했다. 누나인 지혜와 그녀의 남편이 경열의 가족을 대신해 장례식 절차를 의논하는지 가영과 남편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았다.
가영과 남편을 반갑게 맞이한 사람들은 가영의 시댁 식구들인 남편의 형과 누나의 가족들이었다. 영정 앞에는 경열의 두 사위가 뻘쭘하게 서 있었다. 가영과 남편이 영정 앞으로 가 절을 올렸다. 절을 하러 고개를 숙인 가영이 울음을 참았다. 절을 마친 남편이 사위의 손을 잡으며 위로와 당부를 하는 사이 가영은 영정사진을 흘끗 보다가 희준을 떠올렸다.
너무 늦어서, 감정도 관계도 회복이 안 되더라. 그냥 내 인생 정리하고 싶었어.
미안해. 희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맴돌았다.
지혜가 가영 내외에게 다가와 가영의 손을 잡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쟤, 오래 고생했어. 고생 그만하고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들더라구. 진짜 봐줄 수가......"지혜의 말에 가영이 눌렀던 울음을 터뜨렸다. 가영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꺽꺽 울음을 터트리자, 지혜가 가영을 안았다. 가영의 시댁 식구들은 모두 일제히 그 둘을 쳐다보았다. 남편은 뒤에 서서 들썩이는 가영의 어깨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멀찍이서 이들을 보던 가족들이 잠시 젓가락질을 멈추고 난감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가까운 이의 죽음 앞에서 음식을 먹으며 한담을 나누던 그들이 모두 정적 속에 빠지자 가영의 흐느끼는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공간을 감돌았다.
지혜가 가영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올케 그만 울어. 우리 형제도 우는 사람이 없는데."
그리고 가영의 남편을 향해 난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다들 저녁 안 했을 텐데. 너는 부산에서 올라오느라 고생 많았지?"
"희준 씨… 마지막까지 너를 찾았대. 의식이 흐릿해질 때도, 너를 찾았대."
은서의 메시지가 소리로 들린다는 착각을 했다. 가영이 고개를 흔들었다.
식탁으로 옮겨가는 동안에 가영이 훌쩍거리자 남편은 얼굴을 찌푸렸다.
"화장실 가서 얼굴 좀 보고와. 뭘 그렇게 울고 그래? 왜 그래? 대체." 작은 소리로 면박을 주는 사이 상이 차려졌다. 가영이 화장실에 간 사이 그녀의 울움소리에 시선을 주던 남편의 친누나가 그의 팔을 잡으며 다급히 물었다.
"선우 엄마 무슨 일 있는 거야? 왜 우는 거야?"
"그러게 나도 몰라." 화가 난 남편이 못마땅하게 퉁퉁거렸다.
"갱년기라 그런가? 근데, 너는 부주 얼마나 해?" 라는 질문에 남편은 그제야 부조금 생각을 했다.
"아! 내가 집사람한테 이십 준비하라고 했는데." 핸드백을 뒤져 봉투를 꺼낼 때 봉투에 딸려 나온 명함 하나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이게 뭐지?" 남편은 봉투를 누나 손에 맡기고 명함의 이름을 보았다.
권도일! 남편은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누구나 알만한 회계법인의 이름과 직함을 보고 단번에 기억했다.
남편은 명함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권도일'이라는 이름에 미세하게 눈썹이 떨렸다.
결혼식 사진이 떠올랐다. 가영의 친구 중 유일한 남자, 키 큰 그를 남편은 기억했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인가? 이 사람 명함을 왜?
그의 의아한 표정에 누나는 "뭐야?"라고 물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리고는 "나는 십만 원만 했어"라는 그녀에게 그 정도면 되지,라는 말로 마음의 짐을 덜어주었다. 가영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붉은 기름이 둥둥 뜬 육개장에 밥을 말았다. 둥둥 뜬 기름을 휘젓는 순간 아파트 주차장에서 본 아내의 행동이 떠올랐다. 밥을 먹는 동안 사촌 형제들은 남편에게 다가와 가영의 안부를 묻거나 더 가져다 줄 반찬을 물었다. 그중엔 경열만큼 술을 좋아하는 사촌도 있었다. 도일의 명함과 아내의 미심쩍은 행동이 머릿속에 이런저런 상상을 하는 사이 소주병과 잔을 든 사촌 동생이 건너왔다.
권도일? 남편은 회계사라는 남자의 이름을 결혼사진을 보며 가영에게 질문한 적이 있었다. 신부인 가영 쪽에 유일한 남자친구였고 다들 웃는 사진 속 그만이 침울한 표정이었다.
"형, 이제 음주시대는 끝났네. 경열이 형도 없고, 다들 운전 땜에 한 모금도 안 하고, 어이구! 세상 재미가 없네." 경열보다 한 살이 적은 사촌 동생의 잔을 채우며 밥을 다 먹도록 가영은 제자리로 들어오지 않았다. 남편은 권도일에 대해 어떻게 물을 것인가만 생각하느라 사촌 동생의 잔을 살피지 않았다.
"아이, 형! 잔 비었어. 아니, 형수는 경열이 형한테 무슨 억한 감정 있어? 왜 그렇게 우는 거야?" 빈 잔을 채우라 성화를 하던 사촌이 붉어진 얼굴로 농을 시작할 때 가영이 자리로 돌아왔다. 멀리서 그들의 테이블을 지켜보던 친척들은 가영의 동태를 살피며 뒷말을 주고받았다.
눈이 부은 채 돌아온 가영을 향해 남편은 노기를 감추며 물었다.
"뭐야 대체?" 질문이 아니라 나무람이었다. 이상한 행동 그만하라는 신호를 가영이 모르지 않았다. 남편의 훈계 섞인 목소리에, 가영은 문득 장례식장에 오기 전, 빗속을 달리던 차 안의 침묵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도, 누구도 가영의 마음을 묻지 않았다.
남편은 사촌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잊은 채 계속 권도일을 떠올렸다.
밝은 형광등 불빛 아래 남편의 주름과 가영의 부은 눈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남편의 가족들은 그들 곁으로 오지 않았다. 경열의 사위들 쪽 조문객들이 몰려오기 시작할 때 남편은 토요일의 일정을 핑계로 일찍 일어났다.
장례식장 표지판이 빗줄기 속에 흐릿한 주차장으로 걸어 나올 때 강한 빗줄기에 우산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차에 오르자마자 남편은 투덜거렸다.
"지하주차장도 없고, 원." 양복 어깨까지 튄 빗방울을 떨어내며 혼잣말을 했다. 가영의 원피스가 젖어 다리에 들러붙었다.
"권도일 씨 언제 만난 거야?" 벨트를 매자마자 남편이 물었다. 남편이 주머니 속 명함을 가영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2월에."
"왜?"
"우연히, 은서와 같이 우연하게, 만나서 밥 한 끼 먹은 거야." 가영이 우연히,라는 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가영이 다시 울먹였다.
"근데 울긴 왜 우는 건데? 경열이 형 장례식에 니가 왜 울어?"
"아까 현관 나올 때 무슨 메시지 보고 서 있었잖아. 뭐였어, 그거?"
"죽었대. 우리가 아는 친구가." 가영이 맥없이 죽음을 들먹이자 남편이 눈을 치켜뜨며 가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죽어? 우리 누구?" 남편이 노기를 가라앉혔다.
남편은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말을 멈췄다.
남편은 운전대를 잡은 손으로 창밖을 두드렸다. 가영이 말을 꺼내려다 입을 다물자, 차 안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신호가 바뀌자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어깨를 움츠리고, 가영은 뒷 차의 빛을 반사한 백미러를 주시했다. 차 안에 두 사람 사이 다 말하지 못한 감정이 가라앉아 있었다.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은 남편도 같았다. 피로로 물든 몸에 젖은 옷이 무게를 더해 아무 데나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차창에 흩어지는 비가 다시 헤드라이트를 가렸다.
비는 여전히 같았지만, 차 안의 공기는 전혀 달라졌다.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 남편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남편이 묵묵히 와이퍼 속도를 올리자, 유리에 번지던 불빛이 처음 그 폭우 속 밤길을 떠올리게 했다.
가영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이는 것은 없었다.
헤트라이트를 받은 빗속 시야가 빠르게 뒤로 빠지며 긴 어둠 속에 아득함을 느꼈다. 가영의 뒤 어둠이 차가 앞으로 나간다는 느낌까지 지워버렸다.
"지금 운전에만 집중해요."
처음에 그 말을 꺼냈던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음을 깨닫는 데까지 단 한 번의 눈 깜박임이면 충분했다.
남편은 미동도 없이 도로만 바라봤다. 핸들 위 두 손이 힘을 주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가영은 그 손이 희미하게 떨리던 비슷한 옛 기억을 떠올렸다.
"그 사람 얘긴, 다 지난 거잖아"
남편이 과거를 봉인하던 오래전 밤을 기억해 냈다.
결국, 그 밤도 오늘처럼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또다시 같은 빗속에서 남편은 말이 없었고 가영은 말할 수 없었다.
그때와 달라진 것은 단 하나였다.
희준이 더는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뿐.
가영은 조용히 가방을 만지작거리다, 작게 숨을 들이켰다.
"선우아빠, 나 조금만 기다려줄래요?"
남편이 깊은 한숨을 쉬며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표정은 읽히지 않았지만, 그것으로 모든 시작과 끝이 다시 한 점으로 모였다.
차는 여전히 빗속을 헤치고 나아갔고, 전조등이 비추는 물기 머금은 도로 위에는 처음과 같은, 그러나 분명히 달라진 두 사람의 침묵이 깔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