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시선 (단편소설)
선우는 나트 막 한 언덕 앞 공터에 차를 세우고 숨을 골랐다. 바로 내리지 않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누런 벼가 먼 곳까지 펼쳐지고, 인적은 드문 시골길이 구부러지는 지점이었다. 어제 내린 비에 먼지가 씻겨 내려가 파랗게 드러난 하늘과 벼의 색이 대비되어 시선을 사로잡았다.
선우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길게 내쉬며 천천히 창에 머리를 기댔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눈꺼풀을 올려 앞에 주차된 차들을 살펴보았다. 선우의 차 앞으로 먼저 온 이들의 차가 세대 나란히 줄지어 서 있었다. 맨 앞 낡은 트럭은 벌초 꾼의 차로 보였다. 시계를 보니 아직 아홉 시 십오 분 전이었다. 선산 돌보는 일을 진두지휘하는 종대는 아홉 시 전까지 와야 한다는 설명을 직접 전화를 걸어 장황하게 설명했었다.
계기판 위에 세워져 있던 핸드폰을 들어 희찬의 카톡을 다시 열어보았다. 어제 퇴근 후 희찬에게 받은 카톡에 선우는 가슴이 뛰었다.
‘너 맘 가는 대로! 날짜만 정해. 소은한테 말해서 날 한번 잡을게’ 멍하니 작은 글자에 시선을 두고 차에 앉아 있었다.
생각은 며칠 전 이모집에서 본 소은의 모습으로 흘러 들어갔다. 식사 전 소은이 보여준 작은 동작이 생생히 떠올랐다. 회사 앞 골목 맞은편, 이모집은 한식뷔페라는 부제목을 달고 있지만 주로 점심 장사만 했고 점심은 일신상사 직원들만 받았기에 ‘구내식당’으로 불렸다. 주택가 골목 초입이라 이용하는 사람이 기껏해야 가게 문을 잠시 닫고 오는 옆골목 부동산 사장이나 건강식품 대리점주인, 아주 간혹 큰 대로에 면한 옷 가게 점원들이 전부였다. 더러 계단 두 개를 밟고 올라선 아주머니들이 영업해요? 를 묻거나 반찬 가짓수를 확인하는 낯선 사람의 방문이 있었지만, 주인 여자는 단칼에 ‘자리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날 점심시간에 직원들이 동시에 몰린 탓에 선우와 팀장, 그리고 신참 셋은 가게 문턱을 걸치고 서 있었다. 먼저 식당 안으로 들어선 희찬과 소은이 배식판에 콩나물과 알감자조림을 담고 있었다. 사람들 너머로 소은을 살펴보는 선우의 눈높이에 덩치가 큰 현 팀장이 큰 몸을 움직이며 말할 때마다 소은이 보이다 말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시누들이 셋이라 싫다, 뭐 그런 거야?” 현 팀장이 선우 뒤의 신참에게 하던 얘기를 이어가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선우는 그들의 대화를 용이하게 해 주면서도 순서를 바꿔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둘이 이야기하도록 몸을 틀거나 고개를 돌리며 눈으로는 자리에 앉는 소은을 쫓았다.
그때 보았다. 멀찍이 떨어져 앉은 소은이 배식판을 앞에 두고 눈을 감더니 손으로 성호경을 그었다. 남들이 티슈를 깔고 수저를 놓는 정도의 무심한 동작이었다. 선우는 못 볼 것을 본 것도 아닌데 마음이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본 직후 선우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벌초와 성묘, 그리고 이를 주관하는 종대의 크고 검은 얼굴이었다.
‘벌초 후 지관의 의견을 의논하려니 모두 참석 바람. 9시까지 도착 엄수’
집안의 장손인 종대로부터 받은 메시지 내용을 곱씹던 중이었다.
밥 먹는 내내 말 없는 선우에게 팀장은 아예 말을 시키지 않았다.
“그 영수란 남자, 너무 고지식하더라.” 현 팀장은 음식을 입에 넣으면서도 말 대신 도리질을 했다.
”아, 자기는 어떻게 생각해? 엄마가 교회 안 다니면 결혼 반대, 그런 며느리 못 본다, 하시면?”
현 팀장의 질문에 신참이 ‘스읍’ 소리를 내며 입소리를 낼 때 선우도 대답을 생각해 보았다.
“하긴 저도 이해가 안 가요. 그 정도면 좋아하는 마음이 적은 거 아닐까요?” 신참이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며 현 팀장을 쳐다보았다.
“그니까 말야. 그 엄마 아들 장가 포기하고 데리고 살아야겠더라.” 현 팀장은 혀를 찼다.
선우는 할머니의 묘로 물이 흘러 자손들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종대의 말을 떠올렸다.
“선우 씨?”
“아, 네......”
현 팀장은 콩나물을 든 젓가락을 공중에 두고 선우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선우씬 나는 솔로 안 봐?”
“아, 네. 제대로 본 적은......”
“연애에 관심이 없는 거네. 결혼 적령기, 그거 생각보다 금방 지나가는데.”
선우가 애인이 없다는 걸 훤히 아는 현 팀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경고인지 충고인지 모를 말을 이었다.
팀장의 말에 대꾸를 쳐주지 않는 선우를 두고 현 팀장이 인상을 쓰고 입을 삐죽일 때가 많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두어 달 전 납품단가 확정에 대해 의논하러 부장실에 들어서려는데 부장 앞에 선 현 팀장의 등이 보였다.
“한두 해 겪나요, 뭐! 일 시키기 쉽지 않아요.”
선우는 자신에 대한 평이라 짐작했다.
“어! 선우 씨, 어어, 부장님과 의논할 일, 있나 보네. 나는 다 끝났어.” 당황하는 그녀의 움직임에 아무것도 못 들은 척했다. 당황한 팀장이 멀어지자, 부장도 평소와 다르게 선우를 소파로 안내하며 차를 권하고 환대했다. 말수가 적은 선우가 회사 윗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선우의 컴퓨터 다루기와 계약 성사 능력은 일신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부장도 선우의 이전 회사 경력으로 얻은 업계 관행에 대해 선우의 의견을 물을 때가 많았다.
신참의 아버지가 자신의 동향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끝없이 말을 건네는 현 팀장에게 신참은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현 팀장은 시간이 나는 대로 신참을 불러댔다. 선우의 첫해 몇 달은 선우가 그 역할을 했지만, 선우의 조용한 성품에 현 팀장의 말은 여지없이 허공에 겉돌다 사라지고 맥이 끊겼다. 서너 달 지나 선우를 부르는 일을 멈춘 현 팀장은 커피를 손에 쥐고 직원들의 책상들을 훑다가 제 검지로 인중을 톡톡 치고 자리에 앉으며 혼잣말을 했다.
“아, 일이나 해야지.” 이어 누군가를 불러 전날 이미 끝난 일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하며 팀장의 위세를 과시하곤 했다.
그날, 현 팀장의 말에 응수만 하던 신참의 대꾸에 선우는 소은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종교야 좀 맞춰주는 척해도 되지 않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친해져 격이 없어진 건지 신참은 말을 놓았다. 현 팀장이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응수했다.
“그러니까. 내 말이. 아니 진짜 좋으면 교회에 다니겠다, 하고 일단 관심은 끌고 보는 건데, 처음부터 그렇게 장막을 치면 누가 들어 오겠냐구!”
“그런데,”현 팀장은 눈을 가늘게 뜨고, 왼손 검지로 ‘아니야!’를 나타내며 말을 이었다.
“제사 제대로 지내는 집안에서는 쉽지 않지.” 현 팀장이 입가에 묻은 육개장 국물 자국을 티슈로 닦아내며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티슈 몇 장을 더 꺼내 신참에게 주고 선우의 입술을 흘깃 본 현 팀장이 손을 뻗다가 그만두었다. 신참도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먼저 밥을 먹은 소은과 희찬이 선우의 테이블에 지나며 인사를 할 때 현팀장이 말을 걸었다.
“소은 씨, 점점 이뻐지네.”
대답 대신 고개를 숙이는 사이 선우와 눈이 마주친 소은이 긴장한 것을 느낀 선우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신참이 밖으로 나가는 소은의 뒷모습까지 보느라 몸을 돌렸다. 현 팀장도 덩달아 고개를 돌려 소은의 뒤태를 보는 사이 선우는 숨을 고르며 어깨를 가라앉혔다.
“이쁘지? 너보다 두 살 더 많지, 아마.” 현 팀장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신참과 선우를 번갈아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여기가 현실판 나는 솔로지, 뭐!” 그러더니 어깨를 숙여 더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직 사귀는 사람은 없대. 그거야 알 수 없지만, 소문은 그래.” 현 팀장이 선우를 힐끗 쳐다보았고 신참은 밥을 크게 넣고 우물거리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말 한마디 해보지 않은 경리팀 소은에게 본능적 끌림을 느낀 것은 올해 초였다. 회의실에 그녀가 노란 원피스를 입고 들어설 때 선우의 마음은 급히 요동쳤다. 회의 시간 내내 선우는 회의 내용에 집중하기가 어려웠고 말을 조금 버벅거렸다. 구입할 원사 단가 가격 결정에 따른 동의만이 남아있는 형식적인 절차가 아니었으면 선우는 뭔가 문제가 있어 보였을 것이다. 회의는 소소한 잡담을 포함해 십여 분 만에 끝났기에 선우의 마음은 드러나지 않을 수 있었다. 선우가 메모하는 소은의 손을 훑어보며 의자를 천천히 밀어 넣을 때 희찬의 돌발적인 행동이 선우를 자극했다. 영업부 희찬이 소은의 어깨를 치며 ‘뭘 그렇게 열심히 적어?’라고 말하자, 소은은 귀엽고 환한 미소로 희찬을 올려보았다. 선우는 이 광경을 어이없이 쳐다보았다. 그녀에게 허물없이 주고받는 대화며, 거들먹거리는 희찬의 말투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었다. 희찬은 동갑내기로 입사 시기도 비슷하여 몇 번의 술자리를 했던 영업부 동료다. 일신상사에서 가장 친한 사람을 굳이 꼽으라면 선우는 희찬을 떠올릴 것이다. 영업부와 경리부가 가깝다고 여자의 어깨에 손을 얹을 수 있을까? 종일 그 생각에 그 둘의 관계에 뭔가 있는 것이 아닐까? 조바심이 일었다. 그들은 파티션을 빼면 거의 같은 공간에 있고 업무상 자주 마주쳐야 했다. 희찬과 식사자리를 만들어 확인할 수도 있었지만, 희찬의 성격이 워낙 유들유들하고, 모든 사람과 허물없이 지내는 터라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수도 있다는 염려가 들었다. 이후 선우는 이모집에서 소은을 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생각했다. 부서별 시간차를 모르는 척 먼저 가기도, 먼저 들어선 식당에서 천천히 먹으며 소은이 들어오는 모습을 기다리기도 했다. 곁눈질이 표가 나지 않도록 무심한 척 행동하는데도 갖은 요령을 다했다. 희찬과 소은이 보이면 부러 희찬에게서 시선을 두고 소은을 투명 인간 취급했다. 그렇게 하자니 희찬에게 건네는 말은 대부분 마음 없는 상투적인 것이었다.
오늘은 어묵 조림이 맛있네, 라든가, 너 좋아하는 명태조림 나왔다, 정도의 말끝에 시선이 저도 모르게 옮아가며 그녀의 모든 행동과 말에 신경을 써왔다.
물끄러미 들녘의 벼를 바라보다가 핸들에서 손을 떼며 시계를 다시 보았다. 그사이 5분이 지나있었다. 집안의 대표로 참여하는 제사며 벌초에 익숙한 풍경이었다. 시선을 들녘에 두고도 소은의 미소와 희찬의 메시지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보조석 창가로 고개를 돌렸을 때 다 자란 들깨밭이 눈에 들어왔다. 올해 들어 선산 관리를 하는 장손, 종대는 자신의 위치를 유감없이 드러내며 수시로 아쉬운 소리를 했다. 그가 허리춤에 손을 얹고 지시를 할 때 보여주는 특유의 표정과 동작 앞에 선우가 거스른 적은 없었다.
선우가 차에서 내리자, 예초기 작업 소리가 윙윙 들려왔다. 언덕이 시작되는 샛길에 들어섰을 때 조상의 땅으로 도지를 주고 있는 들깨밭이 펼쳐졌다. 들깨밭으로 발을 옮기자, 벌초작업 소리가 더 크게 허공을 가득 메웠다. 선우의 옷자락을 스친 들깻잎이 특유의 향을 뿜어냈다. 맑은 하늘에 선선한 공기, 그리고 들깨 향에 선우는 낯선 곳에서 혼자라면 좋겠다, 는 생각을 했다. 산소에 이를 길을 놔두고 밭으로 더 들어가 보았다. 밭의 중간쯤까지 허리춤에 이른 들깨밭을 헤치며 들어서서 언덕 위를 올려다보았다. 언덕 위에 선 몇몇 사람들의 상체가 움직였다. 언덕 가장자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붉은 모자를 쓴 이가 눈에 들어왔다. 체구를 보니 큰 집 둘째 종희였다.
선우가 가벼운 미소를 띠었는데, 그가 선우를 보았는지 손을 높이 들어 흔들었다.
“올라오지, 거긴 왜 들어가?” 내지르는 소리에 잠시 제초기 작업 소리가 멈췄다.
종희의 소리를 들은 사촌들 몇이 선우를 보기 위해 언덕의 가장자리로 다가서고 있었다.
선우가 들깨밭을 나와 언덕 밑, 작은 샛길로 걸어갔다. 야트막한 언덕으로 걸어 오르자 묘지 앞, 발치 끝에서 종희가 손을 내밀어 잡아끌었다. 허리춤에 손을 얹은 이들, 팔짱을 낀 이들, 한담을 나누던 이들이 선우에게 목례나 손짓으로 인사를 했다. 모자로 해를 가린 집안 여자들이 갸웃하며 인사를 건넸다. 막내 작은 집을 제외한 두 집은 다 온 것 같았다. 풀냄새가 코안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선우의 누이가 뛰어가려는 다섯 살 조카를 제지하며 팔을 붙들고 있었다.
“어서 와. 일찍 출발했겠네”
“오느라 고생 많았어.”
“왔어?”라는 말들이 들리는 사이로 밀짚모자를 쓴 벌초꾼이 목에 걸친 수건으로 땀을 닦는 모습이 보였다. 선우는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했다. 일꾼은 시큰둥한 얼굴로 다시 예초기를 돌렸다.
“다 해간다.” 둘째 집 큰 누이가 옆으로 다가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둘러보니 입구의 막내 작은 아버지 묘 일부만 남기고 위의 봉분들은 모두 일을 마친 상태였다.
예초기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 형들의 걱정 섞인 말에, 선우는 괜찮다는 듯 조용히 손짓했다. 벌초 후 쌓인 잔디들을 정리하던 조카들 사이 다른 일꾼이 갈고리를 들고 산소 옆 쌓인 풀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동남아 사람이었다. 그들을 진두지휘하는 굳은 얼굴의 종대가 보였다. 개량한복을 입은 그가 선우의 목례에 일신상사 현 팀장과 같은 낯으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 됐어, 그 정도면.’ 하고 흡족함을 감추고 마지못해 결재 도장을 누르는 식의 표정과 고갯짓, 그리고 꽉 다문 입술이 현 팀장과 영락없이 같았다.
다가온 사람들 사이 몇 미터를 두고 멀찍이 수건을 깔고 앉은 누이 가족이 보였다. 선우는 손바닥을 들어 올리며 아는 척을 했다.
“이제 막내 집만 오면 다 오는 건데, 어디쯤 오나 전화 좀 걸어봐라.” 장손인 종대가 선산의 맨 위쪽에 자리한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 앞에서 낮고 굵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종대의 바로 아래 동생인 종희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거의 다 왔다네. 십여 분 정도 걸릴 거래” 종희가 할아버지 묘소 앞으로 걸어 올라간 제 형에게 큰 소리로 말하자 종대는 다들 모이라는 말 대신 손을 흔들어 모두 올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막내가 십여 분 만에? 온다, 안 온다? 난 아니다에 한 표! 하하” 큰 집과 작은 집의 형수들이 수군대며 제 짐가방을 그늘로 옮겼다. 종희의 처가 상에 올릴 제수용품 준비에 잠을 못 잤다고 투덜대다 선우와 눈이 마주치자 입을 다물었다. 정작 종대의 처는 가벼운 핸드백과 서류봉투만 들고 걸어 올랐다. 선우는 아버지의 묘 앞을 살폈다. 모두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 앞으로 옮아가자, 벌초도 마무리되어갔다.
집안 여자들이 각기 준비한 음식을 견주며 얘기하는 사이 남자들은 해를 마주하고 들깨밭을 내려다보며 도지 받는 이웃의 처지에 혀를 찼다.
“어떻게든 버텨보지, 가진 것도 없이 고향으로 무작정 돌아왔으니, 참!”
“나 같으면 창피해서 못 돌아오지. 여기 어디 비빌 데도 없는데 굳이.”
“그 처는 아직도 거동이 불편하다던데.”
형을 살고 나온 남자가 아내와 다시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선우는 기억했다.
“도짓 값은 제대로 내긴 하는 건가?” 둘쨋집 막내 종서가 혼잣말하다 큰소리로 물었다.
“형님, 들깨밭 도짓값은 제대로 들어와요?” 그러자 종희가 팔을 치며 종서의 입을 막았다. 종서가 무슨 사정인지 몰라 난처한 내색을 하는 사이 종대의 얼굴이 더욱 굳고 있었다.
“삼춘, 다시는 도지 값 얘기하지도 말아요. 형이 요즘 그 집 일 처리로 경찰서까지 다니며 골머리 썩어요.” 종대 처가 입술을 앙다물며 짜증을 냈다. 모두 시침을 떼고 땅을 내려다보았다. 가장자리에 선 선우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손으로 해를 가렸다. 주머니에서 다시 핸드폰을 꺼내 희찬의 메시지를 읽었다. 이미 소은을 만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들깨밭을 일구는 이의 처가 교회에 미쳐 전세금을 들고나갔고 아내를 찾아 주먹을 휘두른 그는 형을 살다 왔다는 소문은 사촌들의 입으로 자세히 전달되었다. 선우는 종교에 미쳐 가정을 버린 한 여자와 그 여자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감옥에 있었던 남자의 틀어진 인생을 상상했다. 교회에 전 재산을 가져다 바친 여자의 믿음과 신념이 궁금했다. 도지를 주네, 마네 말이 많았지만, 종대는 사촌들의 입을 막고 그를 믿어보겠다고 했다. 고향 마을에서 종대의 결정은 이목을 끌었고 박수를 받았다. 이후 종대는 개량 한복을 입고 수시로 허리 뒷짐을 지고 걷기 시작했다. 선우는 그가 종대의 중학교 동창이란 이유가 다가 아니라는 짐작을 했다.
“야야, 다했다.” 벌초꾼이 종대를 향해 소리를 지르자, 종대가 인상을 쓰며 서둘러 그들 곁으로 내려갔다.
“저 형, 야자 하지 말래도 또 저러네, 형한테 한 소리 듣겠는데.” 종희가 거드는 소리에 종대의 처도 혀를 찼다.
선우는 오늘도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하고 있었다. 지난번 전화를 한 종대가 지관을 부르는 일이며 이장 비용을 언급하다가 도지 준 땅들에서 그 값을 제대로 받지 못해 자신이 전혀 덕을 본 적이 없다며 묻지 않은 말을 했었다.
사례비를 건네는 종대의 팔을 툭툭 치며 친근함을 보인 벌초 꾼과는 다르게 옆에 선 젊은이가 고개를 깊이 숙여 종대에게 인사를 하자, 종대가 군기침을 하며 인사를 받았다.
“갑니다.” 사례비를 주머니에 찔러 넣은 벌초 꾼이 젊은 일꾼의 머리를 누르며 소리를 내지르자, 가족들도 다 같이 목례했다.
이십 대에 접어든 큰 집의 조카들이 쌓아둔 풀을 야산이 이어지는 골짜기로 나르고 모든 일이 정돈되었을 때까지 막내 작은 집 가족들은 도착하지 않았다.
해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선우가 시계를 보니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종대가 풀을 정리한 조카들과 함께 할아버지 묘소 앞으로 올라올 때까지 선우는 희찬에게 보낼 답을 생각하고 있었다. 음식이 상할까 그늘을 찾아, 서 있던 여자들을 부르는 손짓에 모두가 할아버지 묘소 앞으로 몰려왔다.
“자, 상 차리기 전에 먼저 여기 좀 봐라.” 종대가 할머니 봉분의 뒤편을 가리키며 둘레석 옆으로 올라섰고 일행 모두 몸을 틀었다. 선우와 종희, 그리고 몇은 알고 있는 이야기라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거기 이끼가 보이네.” 종서가 제 아내를 끌어 보라, 하며 말했다.
“그건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 않았나?” 둘째 작은 집 큰 누이가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둘러선 이 모두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고 종대는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지관의 말이 할머니 묘 밑으로 물이 흐른답니다. 조상신 중에 할머니께서 우리들을 살펴주시는데, 우리가 너무 무관심하다고 그러시더라, 저기 보다시피 이끼가 좀 더 심해진 거 보이잖아. 이 물길 때문에 자손들의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거지.”
취업으로 고전하는 큰아들과 삼수에도 대입에 실패한 아들로 마음고생이 큰 종희의 아내가 고개를 돌리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모두 입꼬리를 내리고 싸늘한 얼굴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선우 엄마도 선우의 빈번한 맞선 실패에 조상을 탓한 적이 있다. 선우의 엄마는 선우를 붙잡고 제사에 네 몫을 해야 한다고 늘 일렀다. 선우도 자신과 누이의 삶을 한 번 되짚어 보았다. 육십 중반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짧은 생은 조상 덕이 부족해서였을까?
“아시겠지만, 지관 한 번 부르는 것도 다 돈이에요” 종대의 아내가 눈을 찌푸리며 생색을 냈다. 종대가 눈짓으로 그만하라면서도 ‘용한 사람’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래서 우리가 한 번 모인 김에 지관이 제안하는 방법을 찾아볼 것인지, 지관 말대로 할머니 산소를 손 본다면, 비용은 어떻게 할 것인지, 매년 벌초비는 어찌할 것인지 의논하려 모두 모이라고 한 거지.” 종대가 뒷짐을 지고 천천히 근엄하게 말을 이었다. 둘러선 여자들은 모두 자신의 신발을 내려다보거나 옷매무시를 만지며 딴청을 했다. 이끼를 보라고 말한 종대의 말에도 누구 하나 뒤돌아가 자세히 보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근데, 얘네는 왜 아직도 안 와? 십 분이라더니. 장손 말을 우습게 아는데요. 형” 종희가 짜증을 내며 툴툴거렸다. 시간 엄수를 요구한 종대가 인상을 썼다.
“벌써 해가 뜨거운데 시간 좀 지키지. 형님 막내네 오면 한 마디 해버려요.”
“그게 될 것 같으면. 평생 제사 시간 한 번 못 지키는 위인인데.” 둘째 집 큰누나가 이죽거렸다. 선우는 제 누나와 매형을 눈으로 찾았다. 응석 부리는 조카를 데리고 멀리 떨어진 밤나무 아래 떨어진 밤을 찾는 것 같았다.
“저희 왔습니다.” 언덕 아래서 내지르는 기척이 들렸다. 종대는 턱짓으로 준비를 지시했다. 모두 일사불란하게 자신이 준비한 음식 중 일부를 꺼내기 시작했다. 종대 처의 지시를 받은 종희 딸이 물티슈로 상석을 닦았다. 그 옆에서 얼마 전, 시집온 둘째 집 작은 형수가 제기로 쓸 접시들을 마른 수건으로 닦아 올렸다.
“아니, 말은 바로 하라고. 장손이라고 남편은 남편대로 ‘오라 가라,’ 하구 저는 교회 권사라고 음식 하나 장만 없이 찬송가만 들고 온다는 게 말이 되냐구요.” 선우는 누나 가족을 부르러 밤나무 아래로 옮기다 종대 처를 비난하는 여자들의 궁시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진짜 이제 각각 알아서 하자고 해야지. 원!” 둘째네 가족들도 모두 종희 처에게 응수하는 고갯짓을 연신 하며 가방 속에서 전과 과일 등 제수용품을 꺼내 들었다.
선우는 듣고도 못 들은 척했다. 선우와 눈이 마주친 종희 처가 입에 검지를 갖다 대며 콧등을 찌푸려 웃었다.
“어이구! 다했네요.” 막내 작은아버지의 외아들 종구가 호들갑을 떨었고 뒤에서는 눈치를 보며 오르는 그의 처가 유명 베이커리 봉투와 커피를 들고 올라섰다.
“또, 또, 저 빵 몇 개로.” 큰 집 누이가 못마땅한 소리를 했다.
“아이, 차가 너무 막혀요.” 볼멘소리를 하며 눈으로는 부지런히 종대를 찾았다.
어서 오라 반기는 소리가 없어 싸늘한 분위기를 깨는 종희의 한 마디에 모두 얼음에서 풀린 것만 같았다.
“야, 조상 덕 젤 많이 본 사람은 너야. 할아버지 할머니 뵙는데 시간은 좀 지켜라.”
가까이 서 있던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며 입술을 달싹였다.
막내 작은 아버지가 땅을 잘 놀려 종잣돈이 된 것을 두고 한 소리였다.
그제야 떨어져 있던 종서가 한 마디를 보탰다.
“야, 다들 벌초할 때 와서 여적, 기다렸다. 난 새벽 동트기 전에 출발했어.”
그러나 종대는 뒷짐을 진 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종구로부터 선산을 돌보는 일에 이런저런 명목으로 돈을 대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종구가 종대를 찾아 눈을 맞추자, 입꼬리를 씰룩거리다 말았다.
이어 어색해진 분위기를 깨려는 큰집 누나가 나서서 빵이 든 쇼핑백을 건네받았다.
“이 빵은 또 그 잠실 맛집인가 보네!”
“잠실 아니고 뭐라더라, 프랑스 사람들 모여 사는 무슨 마을이라 안 했어?” 누군가 물었다.
“네, 서래마을이요.” 그제야 얼굴에 미소를 지은 종구 처가 입을 뗐다.
“서울에 마을이라 불리는 곳도 있네. 하하” 누군가 웃는 소리에 어색한 적막이 사라졌다.
그 둘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올라섰고 종대는 제 앞섶을 매만지며 손짓으로 줄을 세웠다.
큰 돗자리 위로 신발을 벗고 올라선 남자들 뒤로 한 줄의 남자들이 더 늘어서고 돗자리 끝으로 선우가 섰다. 모두 조용히 절을 올렸다. 선우의 조카가 자기가 절할 자리가 없다고 칭얼거리자, 종대의 처가 아이의 손을 끌며 말했다.
“절 안 해도 돼. 우리도 안 하잖아.”그러자 아이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리둥절한 조카가 제 엄마를 살폈다. 선우의 누이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선우는 피식 웃으며 소은의 성호경을 떠올렸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다 이해하셔. 절은 옛날 사람이나 하는 거야.” 작은 소리로 말했지만, 두 번의 절을 마친 남자들이 반절을 마치자 일제히 종대 처를 돌아보았다. 적막한 사위에 새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들이 제 신발에 발을 세워 넣고 돗자리에서 걸어 나오고 뒷줄에 섰던 이들이 돗자리 위에 올라섰다. 선우는 조카의 손을 잡고 여전히 밖에 서서 신발을 벗지 않았다. 누이가 옆구리를 툭 쳤지만 돌아보지도 않았다. 선우는 선 채로 고개만 가볍게 숙였다.
내리쬐는 해에 흙과 풀냄새가 더 강하게 올라오고 채워졌다. 오랜만에 맡는 자연의 냄새에 선우는 제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각기 제 부모 묘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종대는 제 아내의 찬송가를 받아 들고 입을 뻥긋거렸다. 익숙한 멜로디의 찬송가가 각각의 음정으로 허공에 잠시 흐르다 말았다. 선우는 아버지 묘소 앞에서 절을 하려는 조카에게 자리를 내주고 큰댁 식구들의 찬송가를 듣는 동안 아버지를 회상했다. 그리고 뜬금없이 찬송가 선정은 누가 하는 것인지, 혹은 경우나 장소에 따른 찬송가가 정해져 있는지 궁금했다. 누이는 엄마의 부탁대로 사과와 배, 그리고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소주와 포를 상석에 올렸다. 선우와 매형, 그리고 조카가 같이 절을 올렸다. 다섯 살 조카는 여러 번 절을 하며 즐거워했다. 선우의 누나가 제지했지만, 장난으로 알고 더 여러 번을 구르다시피 하며 절을 했다.
“놔둬. 뭘 그래?” 매형과 선우가 동시에 똑같이 말해 다 같이 소리 내 웃었다. 잠시 후 찬송가를 마친 사람들이 일제히 선 채로 기도 하고 있었다.
종대네가 찬송가에 이어 기도 하는 사이 둘째 집 식구들도 절을 하고, 막내 작은 집 아들과 며느리는 빵과 커피를 들고 묘를 훑어보며 한담을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선우는 이 광경이 우스워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종대의 엄수! 에 음정도 제각각인 찬송가가 어이없다는 마음이 들었다. 장손이라는 이름으로 엄수! 를 명하고 지관을 불러 이장을 논의하던 종대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그 옆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그의 처를 보며 선우는 다짐했다. 빨리 소은을 만나보리라. 선우의 마음속에 무언가 정리되는 기분을 느꼈다. 소은과의 만남을 위해 서울에 돌아가 바로 희찬에게 전화를 걸어볼 마음을 먹었다.
성묘 후 차로 돌아오는 들깨밭 옆으로 선우는 매형과 조카의 양손을 붙잡고 공중으로 띄우며 비행기를 태웠다. 아이의 까르르 웃는 소리에 더 높이 아이를 들어 올렸다. 아이의 다른 쪽 손을 소은이 잡고 같이 흔드는 상상을 했다. 선우의 마음이 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