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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규 Oct 10. 2023

알렉산데르 6세 교황과 그 주변 여인들

루크레치아의 고난

 역사의 진실과 여인들    


  “여자를 아는 것은 역사의 진실을 아는 것이다. 그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여인을 연구해야 한다.”고 괴테는 말했다. 역사무대의 주인공에 남자가 많았지만 커튼 뒤의 여인이 함께 서술되지 않으면 반쪽짜리 역사밖에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에 귀족 가문의 여인들은 정략결혼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자기 가문의 안정과 발전을 위한 도구로 쓰인 셈이다. 어쩌면 이러한 여인들의 정략결혼과 희생으로 많은 평화가 이룩되었는지 모른다.  

   

  정략결혼의 희생자루크레치아 

  루크레치아 보르자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딸이다. 어머니 반노차와의 사이에 체사레, 후안의 두 오빠와 남동생 호프레가 있었다. 루크레치아는 사랑스런 얼굴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미모도 상당히 뛰어났던 것 같다. 교황은 군주이기도 해서 루크레치아는 사실상 공주였다. 그런 만큼 정략결혼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알렉산데르 6세는 교황이 된 후, 강국 밀라노와 동맹을 맺을 필요가 있었다. 사실 그가 교황이 된 것도 밀라노측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동맹을 확실히 하기 위해 루크레치아를 밀라노의 실세 일 모로의 조카이자 페사로의 영주인 조반니 스포르차와 결혼시켰다. 13살인 루크레치아는 26세의 남편 조반니를 따라 페사로에 갔다. 루크레치아 혼자 간 것이 아니라 교황은 사촌누이인 아드리아나 미라와 애인인 줄리아 파르네제를 딸려 보냈고, 루크레치아와 함께 살게 했다고 한다. 신부가 어리니 순백의 결혼을 유지하라는 지시가 아드리아나에 내려진 것이다<시오노 나나미, 르네상스의 여인들>. 프랑스 샤를 8세의 침입으로 그녀는 생각보다 오래 페루자에 머물렀다. 그녀는 1년 후에야 아버지에게로 돌아왔다. 아마 돌아오라는 언질을 받았을 것이다. 교황은 이 혼인을 무효로 만들려고 했다. 정략결혼의 유용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1494년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 때 밀라노는 반교황파였고 교황은 하마터면 폐위될 뻔한 위기를 맞았다. 그래도 교황은 밀라노와도 힘을 합쳐서 반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고 샤를 8세와 프랑스 군대를 쫓아냈다. 그러나 그 후 프랑스와 관계를 개선하려하자 프랑스의 적인 밀라노는 교황에게 장애가 되었고, 조반니 스포르차도 불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이 정략결혼을 무효로 하기는 쉽지 않았다. 교황은 조반니의 성교불능을 이유로 이혼을 주장했다. 이때 루크레치아는 그러한 주장에 동의한 것 같은데, 조반니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본인이 사내구실을 제대로 못 한다고 동의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정치적 힘에 밀리고 지참금을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솔깃해서 조반니는 자신이 ‘고자’라는데 동의했고 이혼하게 되었다<시오노 나나미, 르네상스의 여인들>. 한편 비겁한 조반니는 루크레치아가 교황과 오빠인 체사레 보르자와 근친상간을 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러한 나쁜 소문으로 루크레치아는 불멸이 되었다. 

    

  루크레치아의 두 번째 남편 알폰소와 그의 죽음

  루크레치아의 두 번째 결혼은 나폴리 아라곤 왕가의 알폰소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는 알폰소 2세의 서출로서 비셸리에 공작이었다. 교황입장에서는 지리적으로 로마와 가장 가까운 나폴리와 관계개선을 할 필요가 있었다. 루크레치아는 한 살 어린 알폰소와 재혼한 후 매우 행복했다고 한다.     

  그러나 국제정치의 장이 바뀌고 있었다. 나폴리의 아라곤 왕가를 몰아내려는 프랑스에 교황이 협력하는 상황이 되고 있었다. 체사레는 루이12세의 사촌누이인 샤를로트 달브레와 결혼했고, 교황청과 프랑스는 급속하게 가까워졌다. 알폰소는 갑자기 교황궁에 프랑스 사람들의 방문이 늘어나는 모습에 불안했는지, 아니면 이러한 국제 정세의 변화를 전달하려 했는지, 나폴리로 도망을 쳤다. 나폴리왕은 이럴수록 교황청과의 유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돌아온 알폰소를 다시 로마로 보냈다. 알폰소가 돌아오자 루크레치아는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으나 체사레는 그렇지 않았다. 알폰소를 자신들의 일을 방해하는 훼방꾼 또는 스파이로 보지 않았나 생각된다. 체사레가 루크레치아의 알폰소에 대한 사랑을 시기해서 알폰소를 미워하게 되었다는 소문이 있으나, 말 그대로 소문이었을 것이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체사레를 너무 낮춰보는  이야기다.      

  어느 날 알폰소는 귀가 길에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온몸에 상처를 입고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체사레가 부하들을 시켜 공격하게 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알폰소의 하인이 복수를 위해 정원을 산책하는 체사레에게 화살을 쏘았다. 이 일로 격분한 체사레는 부하들을 시켜 회복 중이던 알폰소를 교살했다. 교황과 체사레에게 알폰소는 성가신 존재였다. 교황은 나폴리를 요구하는 프랑스의 루이 12세와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이미 아라곤 왕가와는 적이 되어 있었다. 다만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루크레치아는 그의 죽음을 무척 애통해하였다. 루크레치아와 아라곤의 알폰소 사이에서 태어난 로드리고는 1512년 8월에 파리에서 죽었다고 한다.      

  국제정치의 냉혹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한 사건이다. 1494년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 때 아라곤왕가는 사실상 망했으나,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의 반프랑스 동맹을 통해 샤를 8세와 프랑스군을 몰아냈다. 그 결과 아라곤 왕가도 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다. 어쩌면 교황이 아라곤 왕가를 살려줬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체사레의 배필로 아라곤 왕의 정실 딸을 원했을 때 거절당하자 교황은 대단히 서운했고 배신감까지 느꼈으리라. 체사레 또한 나폴리왕과 왕녀가 신랑감으로 자신을 거절한 데 대해 서운한 감정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감정의 골이 알폰소의 죽음과 아라곤 왕가의 멸망원인을 제공한 것 같다.      

  상심한 딸을 위해 알렉산데르 6세는 그녀의 세 번째 결혼을 주선했는데, 신랑감은 페라라의 왕위계승권자인 알폰소 데스테(페라라의 공작)였다. 페라라의 에스테 가문은 수백 년간 현명한 통치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사려 깊은 외교정책과 정략결혼을 통해 사방에 우군을 심어두고 있었다. 체사레는 로마냐를 정복하더라도 페라라는 쉽사리 점령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결혼정책으로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페라라측은 처음에는 각종 핑계를 대며 청혼을 거절하려 했으나 페라라가 교회의 봉토였으므로 교황의 심기를 건드리면 나라를 통째로 빼앗길 우려가 있었다. 당시 오빠 체사레는 교황령을 정복하고 있었고 교황은 프랑스와의 동맹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아라곤 왕가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페라라는 교황의 청혼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신 연공금 납부액을 줄이는 등 최대한 지참금을 많이 받아낼 궁리를 했다. 교황도 루크레치아에게 미안했든지 페라라의 모든 요구를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루크레치아의 결혼은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페라라는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이 죽고 보르자 가문이 급속하게 몰락하는 과정에도 루크레치아를 보호해서 그녀가 훌륭하고 뛰어난 르네상스 시대 귀부인으로 인정받는 터전을 제공하였다.     


  루크레치아에 대한 악평 

  루크레치아는 세간의 악평을 한 몸에 받았다. 첫째 남편 조반니가 이혼하면서 루크레치아가 근친상간을 했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 가장 치명적이었다. 루크레치아는 어릴 적부터 교황의 누이와 같은 집에서 살았으며, 교황의 연인으로 알려졌던 줄리아 파르네제와도 함께 살았다. 교황의 연인과 같은 집에 살다 보니 오해를 받게 된 것 같다. 조반니의 교황에 대한 불만이 루크레치아에게 비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혼 후 수녀원에 들어가 있던 루크레치아가 시종 페로토와 연애를 했고, 이때 '인판테 로마노'(로마의 아들)로 알려진 지오반니 보르지아를 낳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보르지아 저택에서 유모가 어떤 아이를 보살피고 있는 것을 자주 보았다는 것이다. 루크레치아는 아이가 태어난 해에 아라곤의 알폰소와 결혼했다. 현실적으로 아이를 낳은 해에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는 게 적절치 않아 보인다. 루크레치아가 결혼 직전에 아버지 없는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아라곤 왕가에서 결혼을 승낙했을까? 그래서 체사레 보르자의 아들이라고 설명이 되었다.      

  1501년에 조반니 보르지아와 관련하여 두 개의 교황 칙령이 발표되었다. 하나는 지오반니 보르지아는 루크레치아의 오빠인 체사레 보르지아가 결혼 전에 어떤 여인과 관계를 가져 태어난 아이라고 밝힌 것이고, 두번째 칙령은 그 아이가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Wikipedia, Lucrezia Borgia>. 루크레치아의 이름은 두 개의 교황 칙령에 한번도 언급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두번째 칙령은 몇 년 동안이나 비밀로 감추어져 있었다. 그래서 지오반니 보르지아는 체사레의 아들로 인식되었으나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사후에는 조반니는 페라라에서 루크레치아의 이복 동생으로 인정을 받으며 지냈다. 현대 사학계에서는 지오반니가 루크레치아의 아들이 아닌 이복동생이라는 것이 정설이다<나무위키>. 교황이 어떤 여인과 관계해서 태어난 아이인데 당시의 정치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체사레의 아들로 위장시켰을 것이다. 시종 페레토와 하녀 판타실레아의 시체가 테베레 강가에서 발견되었는데<위키백과>, 교황의 비밀을 아는 자를 영원히 입막음한 게 아닐까.      

  루크레치아의 말년

  루크레치아는 로마에서 보르지아 가문에 대한 모든 험담과 나쁜 소문을 뒤집어썼지만 페라라에서는 여성적인 미덕의 모범으로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남편인 알폰소는 알렉산데르 교황이 죽고 나서 어려운 지경에 빠진 루크레치아를 끝까지 보호했다. 그리고 자신이 여행 등으로 자리를 비울 때 루크레치아를 믿고 섭정을 맡겼다. 루크레치아는 그 일을 훌륭히 해냈기 때문에 페라라 사람들은 교황이 언젠가 바티칸의 책임을 그녀에게 맡겼던 일을 용서하려 했다. 남은 생애동안 자녀 교육에 헌신하고 자선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39살에 일곱째 아이를 낳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자신의 잘못 보다는 아버지와 오빠의 잘못으로 고통 받았다. 그래도 마지막에 페라라에서 평화를 찾았다.      

  루크레치아의 어머니 반노차

  로드리고 보르자 추기경은 교황 비오 2세를 수행하여 만토바 회의에 참석했는데, 그곳에서 ⌜반노차 카타네이⌟란 시골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이 순박한 여자와의 사랑은 30년 이상 지속되었고, 3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로드리고 추기경은 반노차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을 자기 자식이라고 선언했는데, 아마 자랑스러워서 그랬을 것이다. 체사레는 피사대학의 우등생이었고 무술과 말타기 등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훗날 레오10세가 되는 조반니 메디치와 피사대학 동창생이었는데 체사레보다 훨씬 뒤떨어졌던 것 같다. 차남 후안은 교황을 닮아서인지 최고의 미남 소리를 들었다. 루크레치아는 미인이기도 했고 대단히 사려 깊었다. 교황이 2번 바티칸을 비우는 동안 루크레치아에게 자신의 방을 책임지게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스플레토의 집정관을 맡기기도 했다. 아버지가 딸의 능력을 믿지 않았다면 이런 일을 맡길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훌륭한 자녀들을 조카라고 한다면 아버지 입장에서 억울하지 않겠는가. 반노차와의 애정을 이어준 것은 이러한 훌륭한 자식들이란 생각이든다. 

  반노차 자신도 훌륭한 처신을 했다. 추기경 때나 교황의 치세에서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고, 보르자의 궁전 근처에 처소를 마련해서, 그늘의 여자로서 조용히 로드리고 보르자를 기다렸다. 때때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며, 자녀들의 교육에 힘을 쏟았으며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삶을 살았다. 반노차가 교황 율리오 2세의 젊은 시절에 연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반노차를 놓고 젊은 시절 미래의 두 교황이 경쟁했는지도 모른다.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종사하는 여인이니 만큼 돈을 잘 써는 고위성직자에게 다 잘 대해줬을 것이다. 

  중년에 든 반노차는 호텔업 등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알렉산데르 교황이 많이 도와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자선사업도 많이 한 것 같다. 로마시민들이 알렉산데르 교황의 타락상을 욕하면서도 반노차와의 관계를 비난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오히려 반노차는 여자문제에 자유분방한 로드리고의 탈선을 막는 역할을 했다고 본다. 이것이 아름다움이 시들어가고 있었고 비천한 집안출신이었던 한 여인이 출세 가도를 달리던 남자와의 관계를 30년 이상 지속한 비결이 아닐까.     

  반노차는 결혼을 해야 로드리고 추기경과의 관계를 숨길 수 있고, 유부녀가 행동의 자유가 많다고 생각해서 도메니코 다리다노란 남자와 결혼했다. 이 형식상의 남편은 체사레가 추기경이 될 때 공식문서에 아버지로 등재되기도 했다. 성직자의 사생아는 추기경이 될 수 없어 이런 편법을 동원한 것 같다.      

  반노차는 76세의 나이로 1518년 로마에서 숨을 거두었고, 죽기 전에 자신의 중요한 재산을 교회에 기부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여했다고 하는데 그녀가 주변사람들의 신망을 얻고 있었던 증거로 보인다. 교황 레오 10세도 자신의 의전관을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시켰는데, 반노차를 알렉산더 6세의 미망인이나 페라라 공작부인의 어머니로 인정한 것이다. 

불교에서 전륜성왕의 첫 번째 보배는 부인이라고 한다. 알렉산데르 교황에게는 사실상 아내인 반노차가 그 역할을 한 것 같다   

  

  줄리아 파르네제 

  반노차가 나이가 들자 로드리고 추기경은 줄리아 파르네제라는 새로운 애인을 구했다. 나이가 40년이나 어려서 딸 같은 애인이었다. 길게 풀어헤친 아름다운 금발머리로 유명했는데, 귀족출신이었고 공식행사 등에서 화려하게 각광을 받았다. 반노차와는 달리 줄리아에 대해서는 말이 좀 많았던 것 같다. 그녀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불렀으니…. 1492년에는 교황의 딸인 ‘라우라’를 낳았다. 더욱이 그녀의 오빠인 알렉산드로 파르네제가 젊은 나이에 추기경이 되었는데, 애인이 추기경 인사에까지 개입했다는 비난을 받은 것 같다. 그런데 이 파르네제 추기경은 나중에 바오로 3세 교황이 되어 종교개혁 시기에 교회의 개혁과 쇄신을 위해 노력했다. 역량이 떨어지는 엉뚱한 인물을 발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드리아나 미라

  로드리고 추기경의 사랑행각을 돕고 그 허물을 감추어 준 한 여인이 있었다. 그의 사촌누이인 아드리아나 미라였는데, 갈리스토 교황시절에 스페인에서 함께 로마로 온 듯하다. 스페인 성직자들은 로마에서 이방인이었고 이탈리아 사람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기 주변 사람들을 스페인 사람들로 채운 것 같다. 더욱이 성직자의 여성편력은 금기 사항이다. 남모르게 밀회를 주선해야 하므로 비밀을 철저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가까운 친척이라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우선 아드리아나는 반노차와 로드리고 보르자 사이에 태어난 체사레, 후안, 루크레치아, 호프레 4형제를 양육했다. 애인인 반노차가 아이들을 직접 키우면 성직자가 가정을 이룬 모양새가 되므로 이를 피하려고 아드리아나에게 맡긴 것 같다. 아이들에게 스페인어와 고향문화를 가르치기 위해서도 누이가 필요했다. 다른 성직자들도 자식을 친척들에게 맡기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식스토 4세의 외조카인 지롤라모가 교황의 아들이라는 말이 많았는데 여동생이 자기 아들처럼 몰래 키웠을지 모른다. 


  문제는 알렉산데르 6세의 새 연인 줄리아 파르네제도 이 집에 함께 살았다는 점이다. 줄리아는 알렉산데르 6세의 권유로 아드리아나의 아들인 ‘오르시노 오르시니’와 형식상으로 결혼해서 사촌누이의 며느리가 되었다. 교황의 애인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다. 알렉산데르 교황은 사촌 누이 집을 자주 들락거리는 것도 남보기에 신경 쓰였든지, 루크레치아까지 이 집에서 살 게 했다. 딸을 보러 간다면 누이집 방문이 더욱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막전술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내막을 잘 알았던 것 같다. 혹자는 줄리아를 교황의 첩이라고 했고 루크레치아가 이 집에서 줄리아와 같이 살다보니 근친상간 등 온갖 나쁜 소문에 시달렸다. 다만 루크레치아도 줄리아와 친구처럼 잘 지냈던 것 같다. 루크레치아의 친화력과 사려깊음을 느끼게 한다.

  알렉산데르 교황을 두고 “귀족적, 이것이야말로 로드리고와 보르자 가문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나 그는 ‘자연’ 이었다<시오노 나나미 르네상스의 여인>.”고 시오노 나나미 여사는 말했지만, 틀렸다는 생각이 든다. 알렉산데르 6세가 솔직하고 위선을 싫어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자신의 사촌 누이 집을 밀회장소로 만들어 자신의 애정행각을 숨기려 했던 위선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한사람의 뛰어난 정치인을 만들기 위해 많은 여인들의 헌신과 배려, 희생이 있었고 남자들의 모든 허물을 여자들이 뒤집어썼다는 생각도 든다. 루크레치아는 13살의 어린 나이에 정략결혼을 하고, 강제 이혼, 남편의 살해를 경험했다. 게다가 교황과 오빠 체사레에 대한 온갖 불만이 가짜뉴스로 변환되어 루크레치아를 덮어씌웠다. 자녀를 낳을 수 없는 성직자가 딸을 정략결혼으로 활용했으니 비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교황의 아들보다 교황의 딸이 더욱 거짓 비방으로 고통을 받은 것 같다.      

  가짜뉴스 정치

  정쟁이 심해지다 보니 우리 정치에도 가짜뉴스가 난무하고 있다. 가짜뉴스는 진실을 호도해서 정치를 혼돈으로 몰아가고 관련된 사람들에게 명예와 마음에 상처를 준다. 가짜 뉴스에 대한 처벌이 신속히 이루어져서 당사자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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