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10세와 재정문제
피렌체의 마지막 영광을 구가한 로렌초 메디치는 한 때 식스토4세 교황과 대립하면서 교황의 힘이 얼마나 센 지를 실감했다. 그래서 아들 하나를 성직자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둘째 아들 조반니에게 그 역할을 맡겼다. 조반니 데 메디치는 아버지 로렌초 덕택에 13세에 추기경이 되었다. 돈의 힘은 예나 지금이나, 성속을 불문하고 막강한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세월이 지나 조반니는 교황(레오10세)이 되었다. 에라스무스는 레오 10세를 철의 시대를 황금의 시대로 변화시킨 교황으로 평가했다. 전임교황 율리오 2세의 잦은 전쟁에 지치기도 했고, 레오 시대가 최고의 예술가와 인문주의자들이 활동하던 르네상스의 최절정기라서 그런 표현을 한 것 같다. 레오 교황은 예술과 학문을 지원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보인다. 예술과 학문후원에 앞장선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르네상스를 만들어 냈고, 이런 집안에서 어릴 적부터 좋은 작품을 접하며 자란 레오 자신도 인문학과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레오는 그 피렌체의 르네상스를 로마로 가져오기만 하면 되었다. 그의 치세에 한 도시 내에서 그렇게 많은 천재들이 활동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그는 아버지 집에서 보았던 너그러운 후원을 로마에서 구현했고, 그의 모범이 수많은 다른 부자들을 자극해서 재능 있는 사람을 찾아냈다. 학문과 예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메디치가의 추방과 조반니의 고난
레오 10세(조반니 데 메디치)가 금수저로 태어났지만 저절로 승승장구한 것은 아니었다. 신은 인재에 대한 절차탁마, 즉 고난의 과정을 반드시 거치게 하는 것 같다. 아버지 로렌초 메디치가 43살의 나이로 죽은 후 조반니의 형인 피에트로가 피렌체의 국정을 맡았는데, 아버지와 비교되어서인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했다. 평시라면 도시를 그럭저럭 꾸려갈 수도 있었을 텐데 국제 정세가 험악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프랑스의 샤를 8세가 나폴리의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하지만 피에트로에게는 이러한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는 비범함이 부족했다. 아버지같이 웅대한 전략을 구상하고 그것을 과단성 있게 추진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성격이 원만하거나 사근사근하지도 않았다. 더욱이 오르시니 가문 출신인 피에트로의 부인도 성격이 오만해서 이래저래 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있었다. 거기에 이러한 위기상황을 헤쳐 나가려는 의지, 즉 자기 목숨을 바쳐서라도 위기를 막아내려는 희생정신이 부족하게 비쳐졌다.
프랑스의 대군 앞에 피에트로는 여러 불리한 협상을 했다. 아니 불리한 협상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피사를 내주고 피사근처의 요새를 할양하며 프랑스군대의 주둔비용을 지불해야했다. 피렌체 시민들은 피에트로가 너무 나약하게 대응했다며 그와 함께 메디치가를 추방했다.
민심은 너무나 야속하게 돌변했다. 조반니도 형과 함께 추방을 당했다. 분노 속에서 한동안 형을 도와서 피렌체를 되찾기 위한 활동을 했다. 메디치 가문을 장기판의 졸로 이용하려는 군주들이 군대를 빌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소규모 병력이었고, 명분도 시기도 적절치 않았다. 연거푸 세 번이나 실패를 거듭했다. 메디치 가문에 대한 악감정이 사라지지 않은 가운데 섣부른 공격은 반감만 더욱 키울 뿐이었다.
조반니의 유럽여행
조반니는 형을 떠났다. 무너지는 담벼락 밑에 함께 있을 수는 없었다.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그냥 방랑을 시작했다. 동가식서가숙하는 정치낭인 행세에 지쳤고, 이탈리아에 있으면 형과 함께 가문 복귀운동에 계속 말려들어갈 것 같았다. 부드럽고 착한 친동생 줄리아노와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로 조반니를 항상 보좌하는 사촌 줄리오를 대동하며…. 3형제는 알프스를 넘어 유럽을 여행했다. 유럽여행은 메디치 가문이 뿌려놓은 공덕과 인연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독일에서 막시밀리언 황제를 방문할 수 있었고 격려를 받기도 했다. 때때로 방문 지역에서 감금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방랑으로 꾀죄죄해진 모습인데도, 아낌없이 돈을 쓰며 그 도시의 권력자들을 찾는 모습을 사람들은 수상하게 봤을 것 같다. 영국은 풍랑 때문에 가보지 못했지만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의 주요도시를 둘러볼 수 있었다. 조반니는 교황이 되었을 때 대단히 유익한 교훈을 이 여행에서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잣집 아들의 여유 있는 유람이었고, 겉모양만 보고 왔다는 생각이 든다. 일반 백성들이 어떻게, 무엇으로 살아가는지 깊이 있게 관찰한 것 같지는 않고, 그쪽 사람들이 로마 교황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탈리아에 대해 어떤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체감하지 못했다고 본다. 레오 교황(조반니)은 독일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운동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형의 죽음과 메디치가의 부활
한편 맏형 피에트로는 프랑스 루이1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프랑스 군대에 가담했으나 1503년 전사했다. 이제 조반니가 메디치가문의 좌장이 되었다. 형이 죽고 선량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조반니가 집안의 수장이 되자 메디치 가문에 대한 평가가 호전되기 시작했다. 피렌체에서도 공화국의 실정이 거듭되고, 시민들은 이탈리아 정치에서 피렌체가 끌려만 가고 있는 현실에 분노했다.
이러한 우호적인 분위기에도 조반니는 부화뇌동하지 않았다. 피렌체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고 허세를 부리지 않으면서 누구에게나 생기있고 호감을 주는 태도로 일관했다. 군자는 편안하게 때를 기다린다(君子 居易而使命)는 이치를 깨달았을까. 우호적인 상황이 조성되면서 형의 딸인 클라리체를 피렌체에서 메디치가와 버금가는 부자가문의 수장인 필리포 스토로치에게 시집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1512년 프랑스를 몰아낸 율리오 2세는 피렌체 정부를 메디치가에 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현 피렌체 정부가 프랑스 왕에 협조해서 피사공의회 장소를 제공한데 대한 응징이었다. 교황은 메디치가를 앞세워 피렌체를 공격했다. 눈치를 보던 정부 관료들도 종신 통령인 소데리니를 내 쫓고 메디치가의 귀환을 환영했다. 피렌체 통치는 당분간 동생인 줄리아노에게 맡겼다.
조반니, 교황이 되다
때마침 로마에서 율리오 2세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조반니는 로마로 향했다. 추기경들은 율리오 2세의 전쟁 정치에 신물이 났고, 평화를 가져올 교황을 원했다. 조반니는 그런 기대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다만 37세로 너무 젊은 것이 흠이었다. 아무리 부드럽고 상냥해도 수십 년을 교황으로 있는 것은 곤란했다. 조반니는 치질 등 본인이 병이 많아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줬고, 그 전략이 먹혔는지 조반니는 교황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 그리고 8년 만에 죽어서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다.
산적한 재정문제
하지만 레오10세 앞에는 산적한 문제들이 놓여있었다. 가장 큰 문제가 재정이었다. 돈 들어갈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전임 율리오 2세 교황은 전쟁과 예술후원으로 엄청난 빚을 남기고 죽었다. 그뿐만 아니라 구 성당을 허물어버려 새 베드로 성당을 지어야 했다. 여기에는 천문학적 돈이 들어가야 했다. 그렇다고 레오 자신이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메디치가는 전통적인 귀족이 되어 더 이상 은행업, 직물업 등 생산활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예술가나 인문학자들은 부잣집 아들인 레오교황이 돈을 넉넉히 쓸 것으로 기대했고, 레오는 그들의 희망에 부응해서 많은 돈을 희사했다. 사냥을 가면 시골의 아낙네나 농부들도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항상 넉넉하게 많은 팁을 줬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제 정세는 대국들 간의 갈등으로 전쟁을 원하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여기에 개입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레오교황은 강대국과의 국제 분쟁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았다. 1515년 프랑스의 프랑수와 1세가 밀라노를 공격했을 때 볼로냐에 교황군을 진주시켰다가, 승리한 프랑스와 약삭빠르게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밀라노를 프랑스에게 넘기고, 오랫동안 다툼이 되었던 왕의 프랑스 성직자 임명제도를 프랑스 왕이 성직자 추천권한을 가지는 것으로 합의했다. 교황은 평화를 얻었고 프랑스는 종교를 국가에 종속시켰다. 왕이 종교개혁을 지원할 재정적 이유가 사라졌다.
교황국가 구상과 정복전쟁
문제는 레오10세가 알렉산데르 6세나 율리오 2세의 궤적을 따라 교황국가를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탈리아가 힘이 없으면 프랑스와 스페인 등 주변 강대국의 먹이가 될 것이라고 봤다. 레오는 전임교황들처럼 교황국가를 강화하면서 자기 가문을 더욱 위대하게 만들고 싶었다. 피렌체와 밀라노, 페라라 우르비노 등 이탈리아 중부지방을 메디치 가문에 의해 통치되는 강력한 연방체로 만들 생각을 했다. 가능하다면 결혼을 통해 나폴리왕국도 자기 가문사람이 물려받게 할 구상을 한 것 같다<문명이야기 5-2>. 이탈리아를 사실상 통합시키면 주위 강대국들의 싸움터도 되지 않을 것이고 강대국들을 오히려 좌지우지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마키아벨리도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는데, 많은 이탈리아사람들의 바램이었는지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순종하지 않는 교황령에 대한 정복을 해야 했다. 1515년 프랑수와 1세가 밀라노를 접수하기 위해 쳐들어 왔을 때 교황은 봉신인 우르비노의 공작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 1세에게 모든 병력을 거느리고 볼로냐로 오라고 명령했다. 교황은 군비를 미리 지불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공작은 이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 교황은 그가 프랑스에 협력하고 있다고 의심하며 로마로 소환했으나 만토바로 도망을 쳤다. 이에 우르비노 공작을 파문하고 추방시켰다. 그리고 형 피에로의 아들인 로렌초를 우르비노 공국의 군주로 임명했다. 그러나 1년 뒤 민심을 잃은 로렌초가 우르비노 시민들의 봉기로 쫓겨났다. 그러자 전임 군주인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가 우르비노를 다시 점령했고, 레오 10세는 로베레를 쫓아내려 군대를 동원하게 되었다. 하지만 8개월이나 걸린 재탈환과정에서 교황청의 재정을 고갈시켰다.
재정난만 악화시킨 우르비노 전쟁
교황청은 1515~1516년 약 2년간 전쟁 등에 80만 두카트를 탕진했다고 한다. 재정난 타개를 위해 31명의 추기경을 한꺼번에 서임해서 50만 두카트를 벌었고, 1,353개의 직위를 만들어 팔아 88만 9천 두카트의 수입을 확보했다고 한다<문명이야기5-2>. 우르비노는 안 해도 될 전쟁이었다. 레오 10세가 사망한 해인 1521년 로베레에게 우르비노 공작위를 다시 빼앗긴다. 남의 나라를 탈취하려면 체사레 보르자처럼 단숨에 점령하고 점령한 다음에는 엄정하고 공정한 통치를 통해 민심을 돌려놓아야 했다. 레오교황이 메디치가를 통한 거창한 교황국가를 꿈꿨지만 인물도 부족했고 치밀하지도 못했다. 식스토 4세 이래로 내려온 족벌이 통치하는 교황국가를 꿈꾸었고 가문의 이익을 교회의 이익에 앞세운 대의명분이 없는 전쟁이었다.
교황암살사건
무리한 정책에 따른 비난이 일어났고, 교황이 사적인 이익을 앞세우자 분파적 이해관계가 지배층 사이에 퍼졌다. 페트루치 추기경이 주도한 암살음모사건이 일어났다. 교황이 시에나에서 페트루치 가문을 밀어낸데 대한 불만에서 시작된 사건으로 주치의가 관련되었다. 교황은 안전 통행권을 발행하여 로마 바깥에 있는 페트루치를 불러들였고, 약속을 어기고 체포했다. 그후 의사 등 직접적인 관련자와 함께 죽였다. 그리고 모의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추기경등 많은 관련자들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돈을 받고 사면했다. 돈이 부족해서 벌금형으로 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레오교황은 돈이 부족했다. 예술가, 작가, 음악가에 대한 선물과 사치스런 궁정 유지비, 그리고 하마처럼 돈을 빨아들이는 성베드로 대성당이 레오교황을 파산지경으로 몰고 갔다. 레오교황의 장례식은 초라했다. 초를 살 돈이 없어 다른 추기경의 장례식 때 쓰다가 남은 것을 사용할 정도였다.
레오의 죽음과 황금시대의 종식
레오의 시대가 황금시대인 것은 맞았지만, 위대한 시대는 아니었다. 그는 너무나 안락을 좋아했고,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을 사랑했던 것 같다. 위대한 예술이 아름다운 겉면 속에 감추고 있는 깊은 뜻을 발견해내지 못했다는 느낌이다<문명이야기 5-2>. 시스티나 경당의 미켈란젤로의 천장화, 서명의 방에 그려진 라파엘로의 작품도 레오교황이 아닌 전임 율리오 2세 시대의 산물이었다.
인기로 권력을 유지한 메디치 가문의 특징 때문인지, 돈을 받으며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도 행복해 했다. 자신들의 개인재산을 풀어 예술가와 시민들을 즐겁게 했고 항상 가난한 사람을 지원하는데 앞장섰던 메디치 조상들처럼…. 하지만 레오교황은 더 이상 자기 가문으로부터 후원을 받을 수 없었다. 가면극 등 축제도 로마시민들은 즐거워했지만 알프스 북부의 사람들은 사치로 봤고, 점점 유럽 국가들로부터 돈을 거두기 힘들어 졌다. 이탈리아의 황금기는 레오시대로 막을 내렸다.
레오교황의 황금시대는 거품으로 이룬 신기루란 생각이 든다. 레오 자신은 스스로 돈을 벌어본 적이 없었고, 교황청의 개혁과 절약보다는 면죄부 판매와 성직매매 등 편법으로 전쟁과 예술을 후원했다. 종교개혁이 시작되고 있었다.
예산규모 확대는 경계해야
24년도 예산안에 대해 R&D예산을 너무 많이 삭감했다. 국방부예산도 늘지 않았다는 둥 말들이 많다. 폭발적으로 증가해온 예산규모를 최대한 줄여서 편성했다고 한다. 국회에서 일부 불가피한 사항은 수정을 하더라도 예산규모는 더 늘리지 않았으면 한다. 예산을 아껴 쓰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종교개혁도 결국 재정문제로 시작됐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