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법은 황제의 사치를 위한 도구로 변했다
1. 머리말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개혁을 주도한 여러 정치가를 만나게 된다. 그 중에 성공한 개혁도 있지만 실패한 개혁은 더 많다. 우리의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은 후자인 것 같다. 성공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하는 생각도 해보고 이런 방향으로 추진했으면 성공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긴다. 그랙서 실패한 개혁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성공한 개혁은 그 성공의 밝은 빛 때문에 그 추진과정의 어려움, 반대자의 생생한 모습을 보기 어렵다. 반면 실패한 것은 개혁에 저항한 사람들과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왕안석과 그의 개혁도 이런 이유로 수백 년간 회자되어온 것 같다. 그 평가도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가지각색이었다. 평가가 다르다는 것은 그만큼 사안이 복잡하고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애민사상, 이론과 철학이 있는 기획, 백성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업, 황제의 적극적 지원 등 정책 환경이 훌륭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안석의 개혁은 실패했다. 그러면 왜 개혁이 실패했을까?
필자는 왕안석 자신의 독선이 가장 큰 요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고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열린마음이 부족했다고 본다. 다음에서 왕안석의 등장배경, 그 개혁의 내용, 그리고 실패요인들을 심층적으로 알아보자.
2. 개혁의 배경
서기 1067년, 송나라 영종이 재위 5년 만에 사망하고 6대 황제 신종이 즉위했다. 당시 송나라는 건국 후 108년이 지나 서서히 제도의 피로증과 문제점이 누적되고 있었다. 그중 가장 큰 문제는 재정의 압박이었다.
밖으로는 요나라와 서하에 지불하고 있던 세폐가 증가하고 있었다. 송나라는 국방을 외교로 해결하고 있었다. 이전 왕조인 당나라가 군권을 장악한 안록산 등 지방 절도사의 발호로 망했기에 송나라는 극단적인 문치주의를 시행하였다. 그 결과 국방력이 약화되어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요나라와 서하에 돈을 주고 평화를 살 수 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또한 세폐와 별도로 국방비도 더불어 늘어나고 있었다. 요나라와 서하의 요구가 거세질수록 국방력의 확충이 요구되었다. 그것이 실질적인 전쟁억제나 요나라 등의 요구를 줄일 수 있는 효과가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셋째, 관리조직이 비대해지고 조직운영비용이 증가하고 있었다. 송나라 관리의 봉급수준은 역대 왕조 중 최고 수준이었고 황실 자손이 번성함에 따라 매년 관리의 수도 늘어났다. 평화가 오래 지속됨에 따라 관리들의 겉치레도 심해지고 재정지출도 늘어났다.
마지막으로 주요 행정기관간 업무협조가 잘 되지 않았다. 송나라의 행정기구는 크게 행정을 담당하는 중서성, 군사부문을 관장하는 추밀원, 재정을 주관하는 삼사(호부, 탁지, 염철)로 나뉘어져 있었다. 국가의 재정은 날로 어려워지고 있었지만 추밀원은 재정의 어려움은 고려하지 않고 국방비를 증액하고 있었고 백성들이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데도 재정기구는 세금을 쥐어짜고 있었다. 요즘말로 하면 조정기구가 없었다는 것이다. 조정기구가 없을 경우 황제가 직접 이를 중재해야하나 그 많은 일을 황제가 일일이 파악하고 조정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재정은 더욱 어려워갔다. 송 인종 황우 연간의 재정지출은 13백만 전이었으나 신종 희녕 연간에는 5천60만 전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무 살의 의욕 넘치는 새 황제 신종이 등극한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요나라와 서하에 당한 굴욕에 누구보다 가슴아파했고 악화 일로의 재정을 보면서 노심초사했다. 황제가 되자마자 부국강병을 위한 대책과 이를 추진할 인재를 애타게 찾았다. 이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발탁된 사람이 왕안석이었다.
3. 왕안석의 성장배경, 교우관계 및 애민사상
3.1. 가족과 교우관계
왕안석은 당시 아버지가 관리로 있던 강서성 임강(지금의 청강현)에서 태어났지만 왕씨 일가가 대대로 살았던 임천(강서성 임천현)을 출신지로 봤다. 그리고 그가 좋아했던 강녕에 나이들어 정착했고, 그곳에 양친과 자기 자신을 묻었다. 왕안석은 아버지 왕익과 어머니 오씨 사이에 5남3녀의 맏이였다(왕익은 오씨 부인과는 재혼이었으며 사별한 첫째부인과의 사이에 2명의 이복형을 두고 있었다). 왕안석 자신도 어머니와 같은 성씨인 오씨 부인과 2남 2녀를 두었다.
왕씨 일가에서 과거에 처음으로 급제한 사람은 조부였으며 아버지가 두 번째로 진사가 되었다. 전통적인 명문가와는 거리가 먼 신흥가문으로 토지와 재산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 왕익은 성실한 관리로 지방관을 전전했으며 강녕부 통판 재직시절에 사망했다. 46세로 한창 일 할 나이였으며 어린 자식들을 남겨두고 있었다. 아버지는 청렴한 관리여서 남겨둔 재산도 없었다. 남은 가족들은 고사리를 뜯어 배를 채울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고 한다. 이때 안석은 19세에 불과했으나 집안을 책임져야할 위치에 있었다.
다행히 안석은 22세에 과거에 합격해서 관리생활을 시작했지만 남동생들이 자립할 때까지 10명이 넘는 가족을 부양하느라 악전고투했다. 안석이 중앙근무보다 지방근무를 원한 것도 가족의 부양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지방 관리의 수입이 중앙보다는 좋았기 때문이다.
34세 때, 서주 통판의 임기가 만료되어 조정에서 집현교리라는 명예로운 관직에 그를 임명하고자 하였으나 왕안석은 완강하게 거절했다. 출세보다도 집안 노인과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정이 양보하여 군목사판관이라는 비교적 수입이 좋은 보직을 제시함으로써 왕안석은 중앙 조정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인재를 아끼는 당시 송나라 관료사회의 정직성을 엿볼수 있다.
어쨋든 왕안석의 애민사상은 이러한 생활고 속에서 백성들의 고통을 동병상련하며 싹터기 시작했다. 여기서 같은 관료출신이지만 현실생활의 고달픔을 모르는 사마광 등 고급관료들과는 다른 계급의식이 생긴 게 아닐 까? 그들을 백성의 실상을 모르거나 백성의 고혈로 부유하게 생활하는 기생충으로 봤던 것 같다.
왕안석에게는 특정한 스승이 없었다고 한다. 부친이 돌아가신 뒤 공립학교도 오래 다니지 못했고 책이 그의 스승이었다. 타고난 재능 탓인지 舞師獨悟(스승의 도움 없이 혼자깨달음) 같은 데가 있었다. 의학서, 박물학, 소설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밤을 세워가며 읽었다고 한다. 새벽까지 책을 읽고 잠시 눈을 붙인 후 출근했기 때문에 얼굴과 머리를 제대로 씻지 않고 출근하다 상관으로부터 꾸중을 들은 적도 있었다. 왕안석의 문제점은 독학으로 배움을 얻다보니 강의나 대화 등을 통한 다양하고 폭넓은 생각을 담지 못했다. 스스로 이치를 깨닫다보니 자신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자신감도 생겼고, 큰 스승과 큰 물을 보지 못한 유아독존적인 성격도 형성 되었을 것이다. 한 예로 역사적 인물 중 왕안석의 비판을 면한 사람은 공자와 황제 정도였다. 전국시대의 4군자 중 한사람인 맹상군도 鷄鳴狗盜의 깡패집단 두목 정도로 비하했다.
교우관계도 넓지 못했다. 고대 성인들의 세계를 꿈꾸는 청년은 세속적인 출세를 구하는 동년배들과 잘 어울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뜻을 같이 하면서 서로 절차탁마할 수 있는 친구를 간절히 원했다. 친구를 선택하는 기준은 이념이었다. 이상세계를 꿈꾸거나 뜻이 맞지 않으면 벼슬을 던져 버릴 수 있는 기백과 고집스러움을 중시했고, 나이나 신분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친구 중에는 당송8대가 중 한사람인 증공이 있었는데 후배들이 자신을 추월하여 승진하여도 개의치 않는 대범한 사람이었다. 자기보다 11살 어린 가난하고 불우한 선비인 왕령도 있었고, 과거에 합격하고도 어머니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은 왕희와도 교류했다. 왕안석은 출세를 위해 무작정 관계를 넓히는 타입은 더더욱 아니었다. 술 마시고 농담하며 계집질하면서 즐기는 교제나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고 상황에 따라 미꾸라지처럼 행동하는 그런 사람을 대단히 싫어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나 사고방식이 신법 시행과정에서 타협하지 않는 독선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3.2. 애민정신
왕안석은 백성들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이를 타개하려고 노력한 정치인이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신의 가난과 오랜 지방관리 생활을 통해 백성들의 고통을 현장에서 직접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깊은 불교 신앙도 백성과 귀족의 차별을 두지 않는 애민사상을 일깨웠다.
은현지사시절에 섬에 사는 가난한 백성들이 소금을 밀조, 밀매하고 있었는데, 소금은 국가의 전매상품이라 정부는 현상금까지 내걸고 이러한 백성들을 처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금 밀매는 끊이지 않았고 백성들의 부담만 늘어가고 있었다. 왕안석은 단속을 폐지하자고 정식으로 상급관청에 요구했다. 불법적인 소금거래는 정부의 통제로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대세가 된 상황이다. 관리들은 무뢰배나 해적 등 큰 도적의 범죄는 눈감아주고 생활고 때문에 죄를 짓는 선량한 백성만 잡고 있다. 한마디로 큰 도적을 잡고 가난한 백성들의 생업인 불법 소금거래를 용인하라는 것이다. 소금밀매에 대한 그의 시(收鹽)에는 그의 애민정신이 잘 살아있다.
주의 관청에서 긴급한 문서가 연달아 날아와(州家飛符來比櫛)
해변의 소금 채취 단속은 더욱 엄중해 졌다(海中收鹽今復密)
초가집에 감금된 가난한 사람들은 한숨을 내쉬고(窮囚破屋正嗟欷)
관리들과 군인들은 배를 저으며 순회한다 (吏兵操舟去復出)
바다 위에 떠 있는 섬들은 예부터 불모의 땅으로 (海中諸島古不毛)
섬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괴롭고 (島夷爲生今獨勞)
바닷물을 끓이지 않으면 굶어 죽을 뿐이다(不煎海水餓死耳)
누가 야반도주를 않고 가만히 있겠는가!(誰肯坐守無亡逃)
최근에는 해적까지 출몰하여(爾來賊盜往往有)
상인을 살해하고 그 배를 가라앉힌다.(劫殺賈客沈其艘)
한사람이라도 백성의 목숨은 천하에서 중한 것이니(一民之生重天下)
군자가 사소한 이익을 백성과 다툴 수 있겠는가?(君子忍與爭秋毫)
사람의 생명은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위정자가 호상, 대지주들은 손대지 못하고 서민들의 사소한 이익을 뺏어려 해서야 되겠는가! 왕안석은 애민정신을 발휘하여 적극적인 민생개혁으로 백성의 고통을 완화하려 했다. 은현지사시절 저수지를 만들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는 정책도 시행했다. 신법의 기초구상은 여기서 출발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불교도 왕안석의 애민 사상에 깊은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왕안석은 독실한 불교신자로 “중생은 부처님과 다를 게 없다. 부처님은 곧 중생” 이라는 평등관이 있었다. 한나라 시대 정략결혼의 희생자로 문명의 중심인 한나라 궁정에서 흉노 수장에게 시집간 왕소군이라는 궁녀가 있었다. 그녀를 주제로 한 시는 대체로 애원을 담은 것이었으나 왕안석은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한은자천 호은심(漢恩自淺胡恩深)
한나라에서 받은 은혜는 얕으나 흉노에서 받은 은혜는 깊다는 것이다. 한나라 황제는 그녀를 막북의 흉노 땅에다 버렸다. 한나라의 은혜는 자연히 깊지 않다. 반면 흉노에서는 왕의 아내로 자식도 낳고 살아갔을 것이다. 부부간의 애정, 모자간의 애정 - 이것이 호은(胡恩)이다. 왕안석의 속마음에는 흉노사람들도 어디까지나 같은 인간이라는 평등의식이 있었다.
이러한 관점은 중국 관료사회의 밑바닥에서 실제 행정을 담당하고 있던 서리에게까지 확대된다. 중국에서는 예부터 관료는 유교와 문학의 교양을 몸에 익혀 백성들 위에 군림할 뿐 자질구레한 실무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관료와 백성사이에서 서리가 실제 업무를 수행했고 사대부 정치는 한편으로 서리정치였다는 설도 있다. 그들은 이러한 지위를 이용하여 많은 부정을 저지르기도 했다. 문제는 그들에게는 일정한 봉급이 없었고 그때그때 수고비만 지불되고 있었다. 실질적인 일을 다하고도 사회적 지위나 대우는 낮았다. 부패를 낳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왕안석은 상부에 서리에 대한 편견을 없애야한다는 건의와 자기 밑에서 일하는 법률전문서리를 승진시켜 달라는 청원도 했다. 안석은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웠고 실질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을 존중했다. 능력도 없이 다른 사람위에 군림하거나 기생하는 인간을 대단히 싫어했다. 신법은 이러한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동정하는 애민정신과 평등의식에서 탄생했다.
4. 개혁의 내용
4.1. 신법의 주요내용
신법의 근간에는 청묘법이 있었다. 대토지 소유자들의 겸병을 막고 중농을 육성하기 위한 대책이다. 봄에 청묘가 싹틀 무렵, 춘궁기에는 가난한 농민들은 식량이 떨어지고 새로 심을 종자를 살 돈이 부족했다. 이때 부농은 6-7할의 비싼 이자로 돈을 빌려주고 수확기에 이를 수취했다. 이자가 비쌌기 때문에 빈농은 빚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농지를 부농에 넘겨줘야 했다. 결국 자작농이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빈부 차는 커져만 갔다. 청묘법은 부농을 대신하여 정부가 은행이 되어 2할 정도의 싼 이자로 가난한 백성에게 곡식이나 돈을 빌려주는 제도이다. 한마디로 정부가 은행역할 을 한 셈이다. 왕안석은 이 제도를 통해 자작농을 육성하고 정부수입도 늘릴 수 있는 1석 2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왕안석의 ‘겸병’ 이라는 시에 이러한 뜻이 잘 실려 있다.
속리는 바른 정치를 행하는 법을 알 지 못하니(俗吏不知方)
착취할 수 있으면 유능하다고 생각한다.(掊克乃爲材)
속유는 시대의 변화를 알 지 못하니(俗儒不知變)
그래서 겸병을 없앨 수 없는 것이다.(兼倂可無催)
돈 벌 구멍이 여기저기 입을 열고 있고(利孔至百出)
그 개폐를 몰래 조정하는 것이 소인이니(小人私闔開)
관리들은 그들과 서로 이익을 다툴 뿐(有司與之爭)
백성은 더욱 가련해진다.(民愈可憐哉)
다음으로 모역법(募役法)을 제안했는데 면역법(免役法)이라고도 했다.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백성에게 지방사무의 일부를 대행시키는 차역(差役)이 있었다. 그 내용은 지방관청의 창고관리, 물자운반, 세금징수, 범죄자 포박, 관료송환시 접대 등 다양했다. 농가를 재산에 따라 5등급으로 나누고, 일의 경중과 난이도에 따라 할당했는데 농민들의 큰 부담이었다. 왜냐하면 물자를 잃어버리거나 세금이 체납되면 대신 변상해야 했다. 당시 1,2등급인 부농(형세호)이 대부분을 부담했다고 하는데 농민들은 차역이 두려워 부자가 되지 않으려 했다. 집도 수리하지 않고 농지도 늘리지 않으며 가난한 척했다고 한다. 부자가 될 인센티브가 없어 농업생산력을 올릴 수 없었다. 또한 과거제도 육성차원에서 과거 합격자를 배출한 집안은 차역을 면제했는데 형세호의 자녀들은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었다. 자녀들의 과거 합격여부에 따라 일가의 부침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왕안석의 대책은 차역의 전납화(錢納化)였다. 농가의 재력에 따라 세금을 징수하고 그 재원으로 희망자에게 일을 수행하게 했다. 이 제도는 1석2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농민은 요역의 부담이 줄어서 좋고 실업자 구제 효과도 있었다. 더 나아가 그동안 요역을 면제받고 있던 관호(과거합격 관리 배출집안), 도시주민, 여자가장 집안, 사원이나 도관에게도 농민 세금의 1/2을 물렸다.
시역법(市易法)도 시행했다. 도시의 중소상인들을 부상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금융정책이다. 당시 대상인들은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물자유통과 가격을 조정했을 뿐만 아니라 중소상인에게 높은 금리로 자금을 대여해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 이에 정부는 낮은 이자로 중소상인에게 자금을 융자해주고 대상들이 단합하여 소상인이 헐값으로 물건을 팔도록 압력을 가할 때에는 정부가 대신 사주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중소기업에게 저리로 자금을 지원하는 중소기업은행을 설립하고 조달청 역할도 한 것이다.
한편, 정부의 지출을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균수법(均輸法)을 도입하였다. 재정을 다루는 관리의 권한을 늘리고, 대상인들의 이익을 배제하여 납세자의 부담을 줄이겠다는 내용이다. 수도와 전방에서 필요한 물자는 주로 지방에서 수송해 와야 했는데 이를 위해 지방에 발운사라는 조직을 두어 각지에서 올려 보내는 물자의 운반을 감독하도록 했다. 이때 발운사는 규정에 따라 매년 정해진 수량을 올려 보내며, 현지수요를 고려해서 미리 공급량을 조절하지 않았다. 결국 현지에 필요 이상으로 많은 물건이 수송되어 반값에 팔아 버릴 때도 있었다. 역으로 정부가 긴급히 필요로 하는 물자는 상인에게 비싼 값으로 사들여야 했다. 이렇게 되니 수송경비도 많이 들고 수송해온 물건을 낭비하는 많은 폐해가 발생했다. 또 관청에서는 운반비용을 고의로 늘리거나 낭비되는 비율을 미리 적용하는 방식으로 세금을 더 징수했다. 백성들의 부담이 가중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균수법은 매년 재정당국에서 정부가 필요로 하는 물자와 수량을 정확히 파악한 뒤 발운사에 통보토록 하고 발운사는 이 계획에 기초하여 가능한 서울에 가까운 원산지에서 물자를 조달하도록 했다. 만약 그 물건이 불필요하게 되면 필요한 지역으로 발운사가 수송한다. 이렇게 하면 물건의 유통과 가격결정의 기능을 정부가 갖게 되고 낭비를 줄일 수 있어 백성의 부담은 줄고 재정은 넉넉해진다고 보았다. 우리로 보면 조달청을 설립했다고 보면 되겠다.
방전균세법(方田均稅法)도 도입했다. 당시 관료이자 지주인 사람들이 수많은 토지를 겸병하며 농지와 사람 수를 은폐했다. 왕안석은 모든 토지를 관부에 사실대로 등기하도록 해서 세금을 징수하게 했다. 방전균세법은 토지면적을 조사하는 문제와 세금을 고루 징수하는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 위해 만든 법이다. 이 결과 새로 등기된 방전이 전국 납세 토지의 반 이상을 차지했다고 한다.
농업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수리시설을 확충하는 농전수리법(農田水利法) 도 신법의 하나였다. 수리시설을 확충하는 경비는 수익자 부담원칙을 적용하여 이 시설로부터 이익을 받는 사람이 부담하도록 하였다. 이 법을 시행한지 7년쯤 되었을 때, 확충된 시설은 1만 793곳이었으며 36만 가구 이상이 혜택을 받았다고 한다.
하창법이 실시되었다. 수도변경은 수로로 지방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강변에는 지방에서 운반해온 물자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 이 관리를 서리가 맡고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고정된 월급이 없었으므로 부정이 많았다. 그들에게 봉급을 지급하는 대신 범죄를 저지를 경우 엄벌에 처하는 것이 하창법이다. 그 결과 서리의 부정이 크게 감소했다.
보갑법과 보마법도 실시되었다. 10집을 보(保), 5보를 대보 등으로 묶어 향촌을 조직하고 도적 등 외적의 침입을 막고자 한 것이다. 매일 밤 지역을 순찰하고 농한기에는 군사훈련도 실시했는데 일부지역에서는 민병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보갑법의 배후에는 농민이 곧 병사가 되는 병농일여(兵農一如)사상과 송대의 모병제가 초래한 병졸 약체화란 현실이 있었다. 전체 농민이 군인이 되는 일종의 징병제였는데 비판이 많았다. 사마광은 “지금 농민들로부터 곡식과 명주를 세금으로 징수해서 정규군을 지원하고 있는데 농민들 스스로 군인도 되어야 하기 때문에 한 가정에 두 가지 일 을 맡기는 셈이라”고했다. 한마디로 농민의 추가적인 부담만 늘었다는 것이다. 군제개혁의 일환으로 보마법(保馬法)도 실시되었는데 군마를 민간에 위탁하여 기르도록 하고 말이 죽으면 백성들이 변상하게 하는 대신 몇 가지 세금과 의무가 면제되는 특전이 부여되었다. 국가는 이러한 방식으로 사육비를 절감했지만 왕안석의 은퇴 후에는 호마법(戶馬法)으로 이름을 바꿔 부유한 농민들에게 강제로 할당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신법을 지지했던 양계초조차 이법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4.2. 과거제도 및 학교개혁
과거제도 개혁은 3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경전의 암기정도를 기준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명경과를 폐지했다. 이렇게 선발된 사람은 경전의 뜻만 알 뿐 정책을 기획하거나 집행하는 능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왕안석은 실제로 정부 일에 도움이 되는 실무능력을 중시했다.
둘째, 진사과의 수험과목 중 시부 ․ 첩경묵의(帖經墨義, 경전암기)를 폐지하고 경의(經義,경전해석) ․ 논(論, 역사적 사실․경전내용에 주관적 견해를 덧붙여 설명) ․ 책(策, 시사문제에 대한 대책논의)으로 했다. 단순 암기나 행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 시작(詩作) 보다는 실제 업무에 필요한 기획능력과 판단력을 test하기 위한 것이다.
셋째, 전시(展試, 천자가 출제하는 최종시험)에는 종래의 시 ․ 부 ․ 논 3제를 폐지하고 1제(1,000자)로 한다. 명 ․ 청대에도 계승된 이 과거개혁에는 학문과 현실을 일치시키고 관리들의 실무능력을 향상시키려는 의도가 반영되어있다.
과거제도와 함께 학교 제도도 개혁했다. 당시 관학은 중앙과 지방을 불문하고 유명무실했고 국가의 인재양성 역할을 못하고 있었다. 삼사법(三舍法)을 입안하였는데 삼사란 태학 과정에 있는 외사(外舍, 교양과정), 내사(內舍, 전문과정), 상사(上舍, 대학원과정) 세단계를 말하며 엄격한 정기 시험을 통해 진급을 시키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과거를 통하지 않고 곧바로 관리로 임명할 수 있게 하였다. 학교제도 개혁은 관리선발과 양성의 통일하기 위한 것으로 단기간의 시험만으로 인간의 재능과 인격을 판별하기 힘들다고 생각한 것 같다. 공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해 내신 성적을 강화하거나 사법시험제도를 Law School로 대체하는 등 우리 정부의 최근 정책과 비슷한 것 같다. 왕안석의 최종구상은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학교에서 관리양성과 선발을 모두 책임지는 것이었다. 그의 상주문에는 “고대에는 인재 선발을 학교가 전담했습니다” 라고 적고있다. 학교에서는 왕학을 가르쳤는데 주자학에 자리를 내주기까지 학계와 정계의 정통 커리큘럼이었다.
또한 왕안석은 태학에 법과와 의학과를 설치하고자했는데 전문가, 기술자를 양성하는 코스로 실학을 중시하는 그의 면모가 잘 드러난다.
5. 개혁의 반대자
개혁 반대자의 선봉에 사마광이 있었는데, 편년체 역사책인 ‘자치통감’ 의 저자이기도 하다. 신종 사후 반대당의 영수로서 권력을 장악했을 때 신법을 모두 폐기했기 때문에 개혁반대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가 신법을 반대하는 구법당의 중심에 있었지만 백성들의 신망을 받고 있던 고매한 인격과 실력의 사람이었다. 또한 필요한 경우에는 개혁도 시행한 사람이었다. 서북변경지역을 지키는 것이 어려워졌을 때 사마광은 그 지역에 방어용 성루를 쌓고 농민을 모집해 인근 농지를 개간함으로써 쌀값의 안정과 국방을 강화하기도 했다. 신법 초창기에 사마광은 왕안석에게 신법의 무리한 점과 성급함을 편지로 지적하며 정책의 수정을 건의하였다. 그에 대해서 골수 반동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며 점진적 개혁주의자라고 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왕안석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첫째, 명문관료집안 출신으로 신흥가문 출신의 왕안석과는 출신 성분이 달랐다. 아버지가 관리로 있던 하남성 광산현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고향은 산서성 하현이었다. 아버지는 통판 유수사, 어사대 시어사, 탁지부사, 염철 부사를 역임하는 등 산서성 명문가 출신이었다. 상층 가문으로 정부의 요직에 있었던 사람이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하기 힘들다. 기존 정책이 자기나 자기 선배들이 만든 것이므로 급진적 개혁은 누워서 침 뱉기가 된다. 당시 관료사회의 서열로 보나 그간의 평가로 볼 때 왕안석 보다 계속 앞서가고 있었다.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이긴 했지만 한참 아래 서열의 왕안석이 정책을 주도하는 환경에서 경쟁의식도 작용했을 것이고, 왕안석을 아무것도 모르는 몽상주의자로 봤을 가능성도 있다
둘째, 사마광은 제도보다도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을 더 중시했다. 유가의 기본 이념인 덕치를 강조했으며 법률과 제도를 중시하는 왕안석을 법가사상가로 의심했다. 국가제도의 변혁이라는 것이 대단히 위험하다고 생각했고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그 운용이 잘못될 경우 득 보다는 실이 큼을 지적했다.
“나라가 장차 망하려면 반드시 많은 제도가 만들어진다. .....(중략).... 법률과 제도가 번잡하지 않으면 천하는 잘 다스려진다. 그 이유는 근본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나라가 쇠퇴할 때에는 수많은 관리를 임용하지만 사람을 가려 뽑지 못하고, 금지하는 법령은 더욱 많아지고, 방지하는 조치는 더욱 촘촘해져서 공로를 세운 사람이라도 글을 잘 쓰지 못하면 상을 받지 못하고, 간사한 사람이라도 법을 교묘하게 다루어서 목 베임을 면하게 된다. 위아래 사람들이 수고하고 시끄러워져서 천하에 큰 혼란이 온다. 그렇게 되는 까닭이 무엇인가? 그 지엽적인 부분만을 좇기 때문이다.”
사람이 중요하며 제도나 규칙은 지엽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제도나 규칙을 잘 못 만들면 국리민복에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다. 백보를 양보하여 신법의 내용이 좋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시행하는 사람이 올바른 사람이 아니라면 도리어 역효과가 나온다고 봤다.
셋째, 사마광은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이상주의자인 왕안석과 정책을 보는 관점이 달랐다. 오랜 기간 주요정책의 결정과 집행을 주도 해온 사마광의 눈에는 과감한 개혁은 계획상으로는 훌륭해 보여도 실제 집행에 들어가면 선결되어야할 많은 문제점들이 보였다. 서두르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으며, 과거 역사에서도 성공한 개혁은 점진적인 개선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왕안석, 여혜경 등 신법을 주장한 사람들은 한직에 있었거나 개발이 부진한 지역 출신이 많았으며 실제 정치 사회문제를 해결해 본 경험이 적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복잡한 현실을 잘 모르기 때문에 문제를 단순하거나 쉽게 생각하며 이상론에 빠지기 쉽다. 따라서 업적을 빨리 거양하려는 경향이 있다. 특히 왕안석은 맹자의 혁명사상을 신봉한 이상주의자였고 앞서 언급했듯이 거의 독학으로 이치를 체득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이기만 하면분명 긍정적인 효과로 이어진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설령 현세 사람들이 나를 몰라주더라도 후세사람들은 반드시 그를 알아 줄 것이다.”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
반면, 사마광은 신법을 주장한 이러한 사람들이 이상주의에 편승하여 당장 뭔가를 이루려하지만 현실이 얼마나 복잡하고 제도 변혁이 어떻게 어려운가를 잘 모르는 사람들로 보았다. 사마광은 예혜경과의 청묘법에 관한 토론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적한다.
“ 평민들에게 돈을 쓰고 이자를 내게 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듯 하는 일입니다. 하물며 정부가 독촉하며 책임을 지우는 위엄을 가졌으니 어떠하겠습니까?” 여혜경이 대답하였다. "청묘법에서는 돈을 꾸기를 원하면 꾸어주고, 원치 않으면 억지로 꾸어주지 않습니다. “ 이에 대해 사마광은 ” 어리석은 백성들은 돈을 빌려 쓰는 이로움을 알고 있지만 나중에 이자를 쳐서 갚을 때의 해로움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부에서 강제로 하지 않고, 부자들이 억지로 돈을 꾸어주지 않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옛날 태종때 하동(河東)의 관청에서 곡식을 사들이는 적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쌀 한말에 10전이었는데 백성들은 기꺼이 관청에 쌀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그뒤 쌀값이 비싸지자 관청의 쌀을 풀지 않아서 하동지역의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
제도가 현실적으로 원하는 대로 작동하지 않아 문제가 된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농업생산력 향상을 위해 막대한 예산을 농민에게 지원한 결과 농가부채만 몇 십조 늘려 놓은 한국의 현실정을 볼 때도 사마광의 지적은 상당한 일리가 있다.
넷째, 사마광은 재정 적자를 지출을 줄여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점에서 재정수입 확대 방안을 내놓은 왕안석과 입장을 달리했다. 요새 말로 왕안석은 케인지안, 사마광은 밀튼 프리드먼과 같이 신고전파라고 할 수 있겠다. 사마광은 왕안석의 정책이 좋게 말해 '재정수입 증대'지 사실상 백성에 대한 착취라고 보았다. 국민생산액이 고정되어 있다고 볼 때, 정부의 창고가 채워지면 상대적으로 백성들의 부담이 가벼워지는 것이다.
송사 ‘식화지’에 따르면 신법 초기에 사마광은 신종에게 이렇게 말했다.
“국가의 재정이 부족한 것은 씀씀이가 너무 헤펐기 때문입니다. 상을 너무 많이 주고, 종실이 너무 많으며, 쓸데없는 관직이 늘고 군대 관리가 엉성합니다......(중략)...... 폐하께서는 병폐를 줄이기 위한 대책을 숙고하셔야 합니다. 충분한 시간과 노력이 뒤따라야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결코 저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하루아침에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실제로 변법 시행이후 신종이 새로 설치한 서른두 곳의 창고에는 형형색색의 비단이 넘쳐나 창고를 새로 지어야할 지경이었다. 이러한 재물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닐 테고 사마광의 지적처럼 백성들을 쥐어짜서 확보한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마광은 신분 차별과 빈부차를 불가피한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그 당시는 신분사회였고 유교에서도 사람의 능력과 신분의 차이를 인정하고 있다. 사마광도 그러한 생각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능력과 노력의 차이를 인정한다면 가난의 원인을 부자의 탓으로만 돌려서는 곤란하며 농민의 게으름에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왕안석은 평등사상의 입장에서 겸병가를 배제하고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여 천하의 부를 일단 황제에게 모은 다음, 다시 백성에게 균등하게 나누어 주고자 했다.
왕안석의 ‘창고를 열다’라는 시에는 이러한 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옛 선왕에게는 변하지 않는 법도가 있었는데(先王有經制)
부의 분배는 천자의 일이었다.(頒賚上所行)
후세에는 옛 법도가 회복되지 않아(後世不復古)
가난한 사람들은 토지를 겸병한 대지주를 주인으로
우러러게 되었다.(貧窮主兼倂)
백성뿐만 아니라(非民獨如此)
나라를 다스리는 데도 대지주의 힘을 빌려야 했다.(爲國賴以成)
국가는 부자 미망인을 위해 누각을 세워 경의를 표하고(築臺尊寡婦)
부호는 곡물을 상납하여 고급관료가 된다.(入栗至公卿)
6. 개혁이 실패한 이유
6.1. 포용의 부족
왕안석이 반대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한 것이 실패의 주요인으로 보인다. 왕안석의 이상주의와 도덕적 우월감, 그리고 독선적 성격이 그렇게 만든 것 같다. 반대파인 사마광을 경쟁자로 지나치게 의식한 것도 포용 실패의 원인이라 생각된다.
왕안석은 당송팔대가의 한사람으로 꼽힐 만큼 문장력이 뛰어났고 맹자와 주례를 집주할 만큼 학문이 깊었다. 게다가 당시 일반적인 풍조였던 첩도 두지 않았으며 뇌물을 받지 않고 청렴한 생활을 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도덕적 우월감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왕안석은 당시 구법당(옛 정책을 지지하는 세력)의 인사들이 대토지를 소유한 기득권자이며 대상인들과 결탁하고 있으며, 그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무조건 반대만 하는 타락한 집단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 있는 ‘겸병’과 ‘창고를 열다’라는 시에서 보았듯이 시대의 문제가 대토지 소유자들의 겸병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과 음으로 양으로 연결된 구법당의 관료들을 개혁의 대상으로 보고, 이들과의 타협을 개혁의 후퇴로 생각했을 것이다. 이들의 의견을 무시한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 아닐까? 마치 최근 강남 사람들을 악의 축으로 생각하고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려는 것처럼…….
이러한 생각에 대해서 소동파의 동생이며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소철은 왕안석이 백성들을 화합시키지 못하고 가난한 자와 부자사이를 이간시키고 있다고 비난했다.
“부유한 사람이 부를 이용해서 횡포를 부리지 않게 하고 가난한 사람은 결핍되지 않게 한다.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서로 의지하고 도우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천하는 안정된다. 왕안석은 작은 인물이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깊은 정으로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고 하지만 부유한 사람을 깊이 증오하는 그것이 잘못된 방법이라 걸 모른다.”
당시 정호(정명도, 양명학의 선구자)는 도학자로서 드물게 정치적 감각과 다른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넓은 아량을 지녔었다. 처음에는 신법의 입안에도 참가했고 신법에 대해서 무조건 반대하지도 않았다. 청묘법이 구체적으로 실시되었을 때 물질적인 이익만 강조하고 도덕적인 이상을 결여한 것을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청묘법은 일실(一失)에 불과하니 이를 고쳐서 다른 개혁이 방해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주희는 신종이 정호를 등용하여 신법을 추진했다면 성공을 했을 거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왕안석이 조금만 물러서서 시범실시 등으로 유연하게 대처했다면 온건한 반대파를 포섭하고 신법도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왕안석은 여기서 물러나면 신법을 더 이상 추진하지 못할 거라는 강박관념을 가졌고 그대로 밀어붙이는 경직적 대응을 하고 말았다.
6.2. 언론을 적으로
왕안석은 성격상 어느 곳에서든지 우두머리 역할을 하려 했으며 승부욕도 강했다. 남의 비판을 참고 수용하지 못했고, 초년 관료시절에도 동료들과 여러 차례 다투고 일들을 망가뜨리기도 했었다. 그는 규칙들을 마구 바꾸고 자기방식대로 일을 처리하고 싶어 했다. 신법실시 때에도 그의 이러한 성격이 드러났다. 그는 일체의 실리주의자들을 배척하면서, 과거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한유와 여공저 마저 잃었다.
그 당시 정계를 경악시킨 사건은 바로 왕안석이 대간(臺諫)을 제거해 버린 사건이었다. 대간의 임무는 요즘의 언론처럼 일반 백성을 대신해서 현정권의 정책과 관리들의 비행을 조사하고 비판하는것이었다. 훌륭한 정부가 집권하고 있을 때에는 이러한 자유로운 비평이 언제나 수시로 황제의 귀로 전해져 공의가 정책에 반영되었다. 언론의 feed back 역할인 것이다.
간관의 역할에 대해서는 소동파의 상소문에도 잘 나타나 있다. “역대 중국왕조의 문제는 중앙과 지방의 권한불균형에서 발생하였다. 주(周)와 당(唐)대에는 권한을 분산시킨 결과 지방 세력의 반란을 초래 하였고 진(秦)과 위(魏)는 권한을 중앙에 집중시켰으나 몇몇 간신이나 환관이 황제를 기만하고 권력을 전횡하는 폐단이 있었다. 따라서 이를 균형 있게 하는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왔다. 송왕조는 지방절도사들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중앙의 권한을 강화한 체제였기에, 과도한 중앙집권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하여 대간 제도를 확립하였는바 송조개국이래 간관들을 심하게 처벌한 예가 없었다. 이는 권력집중형 정부가 갖고 있는 고유의 위험성을 예방하고 간신들의 권력장악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간관의 비평에 절대적인 자유와 책임성이 부여 되어야 한다. 간신이 권력을 장악하기 전에 대간이 그들을 미연에 제지하여야한다. 간신의 지위가 일단 확고해지고나면 군대를 동원해도 그들을 쫓아내기 어려워 진다. 정부의 기강을 세우는 데 이 기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중앙집권형 국가에서 간관은 필수불가결한 존재라는 주장이다.
간관들 여러 명이 연서하고 왕안석을 탄핵하며, 퇴임을 요구했다. 왕안석은 노발대발하여 그들을 감옥에 가두려고 했고, 이에 사마광과 범순인이 반대하여 강등과 좌천으로 사건이 종결되었다. 그 후부터 범순인은 왕안석에 대한 반대 공격을 시작했다. 비록 자신이 먼저 면직되었지만……. 그 후에도 왕안석은 자기에 반대하는 간관들을 제거하여 총 14명을 면직하였다. 이들을 면직한 후 왕안석은 자기생각대로 조종할 수 있고 아첨 잘하는 사람들로 간관을 교체했다.
6.3. 인사의 실패
구법당의 인사들은 문장이 뛰어난 사람들이 많아 사회여론을 이끄는 힘이 있었다. 반면 신법당에는 인재가 부족했다. 왕안석의 포용력 부족에서 초래된 당연한 결과였다. 출신성분과 평판이 나쁜 인사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겉치레 성과에 집착해서 무리하게 일을 집행했으며 반대파를 몰아내고 자리를 차지하는데 앞장섰다.
왕안석도 그 사람의 됨됨이나 덕성보다는 실무능력을 높이 평가함으로써 반대파를 배려하고 설득할 수 있는 인재를 확보하지 못했다. 왕안석 자신의 명령에 단순히 순종하는 행동대원들만 그의 주변에 남게 되었다. 여혜경, 한강, 등관 등은 국가를 위한 정책의 입안과 집행보다는 자리차지하기를 우선했다. 왕안석이 재상 직에서 잠시 물러나 있을 때에는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위해 싸웠고, 신종이 왕안석을 다시 기용하려 했을때 여혜경은 이를 방해하기까지 했다. 여혜경은 등관과 공모하여 왕안석을 산동성 친왕(親王)의 반란 연루설을 퍼뜨리기도 했다. 당시 여혜경에게 밀리고 있던 재상 한강(韓絳)은 왕안석이 빨리 돌아와 여혜경을 견제해주기를 바라며 왕안석에게 SOS를 보냈고, 왕안석은 7일간의 여행 끝에 수도에 와서 다시 재상직을 맡았다. 여혜경은 권좌에서 밀려나 탄핵을 받게 되자 왕안석과의 비밀 서신을 공개하여 왕안석을 위협하였다. 왕안석의 편지에 “이 사실을 황제가 모르시게 하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여혜경은 이 편지를 황제께 바치면서 왕안석이 모반했노라고 고하였다. 그 후 왕안석도 부하들의 배반, 아들의 죽음 등 정치와 인생에 환멸감을 느껴 재상직에서 다시 물러났고 죽을 때까지 강녕에 머물렀다.
6.4. 신법(新法) 자체의 결함
6.4.1. 균수법, 시역법, 청묘법의 문제
왕안석의 신법 자체에 대한 평가도 복잡하다. 그 취지가 좋았고 상업적인 수단을 활용한 근대적인 제도라는 평도 있다. 그러나 현대 경제학적 입장에서 보면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는 정부가 일반 기업과 경쟁했을 때 사기업의 영역을 축소시키는 Crowding Out Effect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특히 관료제도를 확대하면 그 특성상 부정부패의 온상이 될 뿐만 아니라 비효율적이 된다.
균수법을 시행한 발운사아문(發運使衙門, 지방의 물자를 중앙으로 운송하는 관청)은 최대 국영 독점기구로 변질되어 갔다. 물자를 구입할 때는 까다로운 조건이 따랐다. 시중물가보다 비싸게 사들이기 때문에 이 거래에서 상인들의 이익이 얼마인지 관리들은 계산했고, 이 초과이윤을 나누어 가지고 싶어했다. 뇌물을 바쳐야 거래가 가능해진 것이다. 또 관리들은 손해보면 감사에서 지적받는 걸 잘 알고 있어 쌀 때 사고 비쌀때 파는 리스크 테이킹을 못했다. 그 결과 물가안정기능도 재정절감 효과도 크지 않았으며 정작 필요한 것을 구매하지 못해 정부조달 기능이 약해졌다.
또한 농민들은 세금납부 방식의 변경에 따라 부담이 가중되었다. 과거에는 곡식이나 특산물로 세금을 납부했으나 균수법 시행에 따라 수도에서 먼 지역은 동전으로 납부하게 되었다. 문제는 농산물을 동전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추가부담이 들었다. 동전에 대한 수요가 커지니 동전 값이 치솟고 상대적으로 농산물 값은 떨어져 농민들 부담이 늘어나게 되었다. 한편, 수도근교에서는 정부가 동전으로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니 당해 물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 비싼 가격으로 물품을 구입해야했다. 화폐의 공급이나 물자의 유통이 원활하지 않았던 시대라 균수법은 시기상조였다.
시역법은 상업 및 물류 유통을 국가가 직접 통제하려 했던 정책이다. 당시 수도였던 카이펑(개봉)에 '시역무(市易務)'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물건이 흔하여 가격이 낮을 때 정부 자금으로 대량 매입했다가 물건이 귀해져 가격이 오를 때 비축해둔 물건을 풀어 가격을 낮추려했다. 당시 대형 상인들이 물건을 사재기하여 시장 가격을 조작하고 폭리를 취하는 것을 막고, 국가가 직접 가격을 안정시키고자 했으며, 국가가 직접 물건을 사고 팔아 남긴 이익으로 국방비와 행정 비용을 충당하려 했다. 영세 상인들에게 정부가 저리로 자금이나 물건을 빌려주는 대신, 그들의 물건을 담보로 맡기게하여 상업 활동 전반을 정부가 통제했다.
시역법은 국가 재정 확충과 물가안정이라는 취지는 좋았으나, 현실에서는 심대한 부작용을 낳았다. 국가가 거대 상인이 되면서, 운영하는 관리들이 권력을 이용해 일반 상인들을 압박하거나 뇌물을 받는 등 부정부패가 만연해졌다. 둘째 국가가 물건을 강제로 상인들에게 떠넘기거나, 억지로 사게 하는 등 시장 질서를 오히려 교란했다. 결과적으로 이 정책은 상인들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위축시켰고,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전가되고 말았다. 당시 사마광을 비롯한 '구법당'은 국가가 시장에 직접 개입하여 사익을 추구하는 행태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소동파의 동생인 소철은 "정부가 무역을 직접 하게 되면 사기업체들은 경쟁에서 불리해지고 자유상기업이 쇠퇴해져 국고에 보탬이 되지 못한다. 개인 기업은 기 확립된 신용 계통을 통해 거래하지만, 국가는 이러한 편의체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래가 수요와 공급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고 개인적인 친분관계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아울러 관료들의 무능력으로 물품의 구입가격이 일반 상인에 비해 높아질 것이므로 정부는 수익을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비판했다(임어당, 쾌활한 천재, p135).
“상거래와 무역은 민간에 맡겨 두어야 한다.”는 구법당의 주장이 옳았다. 국가가 시장의 거대 독점 자본이 되어 경제를 통제하려 했던 실험은, 운영 과정에서 관료의 권력 남용으로 민생을 어렵개 하고 말았다.
가장 논란이 많았던 개혁법이 청묘법이었다.
첫째, 대출절차가 까다로웠다. 과거 대지주들이 농민들에게 대출할 때에는 양측이 구두로 조건을 협상하면 바로 거래가 성사되었다. 현대의 사채시장처럼 이자는 높았지만 절차는 간편했다. 정부가 대출을 할 때는 신청서류와 결제절차가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우선 농민들의 신용상태를 잘 모르고 거래에서 생기는 위험을 안으려 하지 않으며 관료들의 부정을 막기 위해 까다로운 규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잡한 서류와 번거로운 절차를 쉽게 통과하는 길은 뇌물공세이다. 결재과정에서 지불하는 뇌물이 늘어나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현상이 생기기도 했다. 생계유지만도 벅찬 농민들에게 이처럼 부당한 착취는 견딜 수 없는 곤욕이었다. 게다가 담보가 부족한 농민들을 위해 여유 있는 이웃에 연대보증을 서게 함으로써 보증인이 빚을 갚아야하는 사태도 발생했다.
‘산촌’이라는 소동파의 시에 대출의 어려움이 잘 나타나 있다.
명아주를 지팡이로 삼고 밥을 싸들고 부지런히 다녔다
정신을 차려보니 청전(靑錢)은 내 손을 떠나 헛되고
남은 것은 투박하던 아이의 말투가 고운 도회지말로 바뀌었을 뿐
1년의 태반을 성중(城中)에 있었구나
청묘전을 빌리기 위해 서류를 만들어 관리들에게 설명하느라 도회지로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청묘전은 이런저런 비용에 충당되고 아이 말씨만 도회지 말이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대출이 강제적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왕안석은 이 청묘법이 성과를 내고 있으며 백성들에게 환영받고 있다는 사실을 황제에게 조속히 보이고 싶어 했다. 그는 대출이 원활하지 않다는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았고 농민 대출이 목표에 미달했다는 보고를 들으면 화를 냈다. 대출실적이 좋은 관리는 승진시켜주고 부진한 관리들은 처벌했다. 관리들은 출세하기 위해 높은 실적을 올려야 했고 대출은 강제적으로 시행되게 되었다.
셋째, 청묘법의 대출금리가 낮은 것도 아니었다. 공식적으로 2할의 이자가 책정되었지만 봄에 일차적으로 대출을 해주고 반년 후에 2할의 이자를 덧붙여 회수한 다음, 가을에 또 한 번 대출을 하고 반년 후에 다시 이자 2할을 쳐서 거두는 식이었다. 결과적으로 1년을 기준으로 하면 4할이 되는 셈이었다. 농민들의 이익을 배려하기위한 저금리대출제도가 정부독점 고리대금으로 변질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지역별로 가중치까지 적용했다. 일부지역에서는 왕안석이 정한 기준치의 35배에 육박하는 고금리가 적용되기고 하였다(이중텐, 제국의 슬픔, 85쪽). 정부가 세입을 확대하려 할수록 이러한 경향은 가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 백성들은 강제적인 대출과 불어나는 이자를 갚을 길이 없어 처자를 팔거나 온 가족이 도망하였다. 대출보증을 섰던 이웃들도 함께 도망하거나 재물을 팔든지 저당 잡혔다. 감옥은 늘 만원이었고 군현마다 수천 건의 저당물과 몰수한 재산으로 가득했으며 관청에는 소송사건이 그치지 않았다.
6.4.2. 면역법, 보갑법, 보마법, 방전균세법
최근 학자들은 면역법이 가장 시대에 앞선 획기적인 제도로 평가하고 있다. 갖가지 요역을 없애고 이것을 돈으로 내게 한 것은 합리적이다. 소동파 같은 이도 면역법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면역법만 보면 이 제도는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다. 그러나 보갑법을 같이 시행했을 때는 사정이 달라졌다. 면역법을 통해 요역의무를 없앴지만 보갑법을 통해 병역이라는 사실상의 요역을 추가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정부의 관심은 세금 확충에만 있다고 오해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과거 요역의무가 없던 사람들에게도 면역전을 부과했는데 관호(과거합격자 배출집안)에 부과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과부나 자식이 없는 가정, 아직 징집대상연령이 안된 자식이 있는 가정, 남녀 승려들도 세금을 내도록 강요받았다. 이들에 대한 세금은 일반가정에 비해 1/2수준이지만 과거 안내던 것을 내게 되니 조세저항이 컸다. 더욱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세금을 납부할 수 없는 때를 미리 대비한다는 명목아래, 할당된 세금에 20%를 더 부과했다.
정부는 한쪽 손으로는 백성들로부터 면역전을 받고 창고관리, 물자운반, 범죄자 포박 등 요역부담을 덜어주었으나 다른 쪽 손으로는 백성들에게 병역의무를 추가 부담시킨 것이다. 병역외에 다른 요역도 사실상 줄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관료송환 등은 면역전으로 거둔 수입으로 충분히 보전할 수 없는 음성적인 돈이 많이 드는 데 이를 모두 양성화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세금만 늘어났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원성이 크진 것도 사실이다.
보마법도 군마사육비를 절감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기르는 과정에서 말이 죽거나 하면 이것을 변상할 의무가 있었다. 그래서 부담이 가중되었고 부유한 농민에게 할당했지만 원성이 컸다.
방전균세법은 농민의 토지를 등록하게 하는 제도였는데 측량의 어려움이 있었다. 측량과정에서 관리들의 부정이 개입할 소지도 있었고 과거 세금을 내지 않던 농지가 대거 등록됨에 따라 조세저항도 커졌다.
6.5. 황제의 사치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
신법을 통해서 재정 부족 문제는 해결되었다. 송사 ‘식화지’에 의하면 수도에 32곳의 창고가 가득차서 20개의 창고를 추가로 건설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종 이후 황제들은 신법으로 재정이 여유롭게 되니까 이 제도를 계속 유지하게 되었다. 문제는 수입만을 생각하고 애민정신을 잊은데 있었다. 특히 신종, 철종을 이은 휘종 대에 와서는 신법은 황제의 사치를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휘종은 소설 수호지 시대의 황제로 사치와 향락이 극에 달하였다. 환관 동관과 당시 재상이던 채경은 신법을 활용하여 백성들을 쥐어짰다. 신법이 당초 목표로 했던 국방력 강화의 방편으로 쓰이지 못하고 사치와 향락의 수단으로 이용되다보니 신법의 의의를 떨어뜨렸다.
휘종은 친정(親政)을 하게 되자 신법을 적극적으로 시행했다. 애민의 마음은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가 등용한 인물은 그다지 향기롭지 못한 사람들 뿐이었다. 휘종 때 재상은 채경(蔡京)으로 왕안석의 사위였던 채변(蔡卞)의 형이었다. 구법파의 영수 사마광이 재상이 되었을 때 채경은 전력을 다해 면역법을 매우 짧은 기간에 폐지시켰다. 그 때문에 사마광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철종의 친정 후 다시 신법파의 시대가 되자 면역법의 부활에 진력하였다. 짧은 시간 내에 제도를 폐지하고 부활하는 걸 보면 대단한 행정수완가임을 알 수 있으나 지나치게 정치적 시류에 편승했다. 신념이나 소신은 없었다.
휘종은 사치를 하고 싶어 자금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신법을 채택했던 것 같다. 채경은 신법에 대한 정신적 공감은 없었으나 황제의 뜻에만 영합하였다. 채경은 백성으로부터 가능한한 많은 세금을 확보하는게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고, 그가 유능했기에 백성에게는 재난이었다. 방전균세법을 악용한 공전법을 도입했는데 측량시 약 8% 짧은 척도를 적용하여 나머지 토지는 공전으로 몰수했다. 매매계약서를 재조사하여 소유권이 명확하지 않은 토지도 공전화하였다. 영세농민의 경우 구두약속만으로 소유권을 이전하는 예가 많아서 그 피해가 컸다. 공전법은 천부당 만부당한 것으로 이런 상황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방납의난과 송강의난이 일어났고 수호지의 소재가 되었다
6.6. 한꺼번에 너무 많은 개혁추진
왕안석은 거의 매년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냈다.
정책에는 반드시 이익을 보는 사람도 있고 손해를 보는 집단도 있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하더라도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오히려 이익을 보는 집단은 그 혜택이 장기적으로 나타나고 이를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손해를 보는 계층은 이때까지 향유하던 것을 잃게 되므로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왕안석의 신법은 모두 반대파인 부유층에 불리한 정책이었다. 이를 한꺼번에 쏟아내다 보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적으로 돌아섰다. 부유층은 교육받은 사람들이고 여론형성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막강한 반대자를 막무가내로 몰아세워서는 정책이 성공할 수 없다. 면역법이나 방전균세법같은 법만이라도 제대로 시행했으면 백성과 국가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7. 역사적 평가
20세기 이전만 해도 왕안석은 악인으로 치부되었다. 고집쟁이 재상이라는 악평과 함께 나라를 멸망시킨 사람으로 평가되었다. 당쟁과 가렴주구가 그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인식에서이다. 반면, 사마광은 지난 8백년간 대단히 훌륭한 인물로 여겨져 왔다. 구법당에는 뛰어난 문인들이 많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쓴 글이 많았을 것이다. 신법 시행후 5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북송이 멸망한 것도 왕안석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들이 신법을 권력 장악의 수단으로 악용하고 황제의 사치를 위한 가렴주구 수단으로 발전시킨 것도 그의 평판에 치명적 타격을 가했다. 왕안석이 제창한 왕학이 도학의 확립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 주희선생이 마지막 확인사살을 했다.
하지만 왕안석에 대한 비판은 그의 정책보다도 성격이나 겉모습에 치우친 느낌이다. 소순의 ‘변간론’이 대표적이며 ‘그가 얼굴도 잘 씻지 않고 옷도 아무렇게 입는다든지’ 하는 지엽적인 것을 중심으로 비판했으며 검소한 생활은 위선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그 후 왕안석에 대해 호의적인 오초려선생(원 시대 주자학자))이나 육상산선생(주희와 동시대 유학자)도 그의 성격이나 정치적 행위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오초려선생은 왕안석의 학문․식견․재능․문장을 격찬하면서도 ‘공맹의 도에 관해서는 부족한 점이 있었고 이윤이나 주공단과 같은 재능을 바랄 수는 없었다’ 고 했다. 육상산 선생도 안석이 지나치게 자신감이 강했기 때문에 군자들이 떠나고 소인들만 남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인간적인 결점으로 지적했다.
20C 이후 중국이 서구열강에 침탈되고 주자학적 세계관이 무너짐에 따라 왕안석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며 그의 애민정신과 시대를 앞선 개혁입법을 높이 사게 되었다. 신법이 제대로 실시되었다면 획기적인 진전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법과 제도를 만들 때 이를 추진할 기술적, 관행적인 문제를 대단히 소홀히 생각했던 것 같다. 예컨대 청묘법은 반드시 필요한 사람에게만 돈을 빌려 줘야하는데, 하부관청에서는 중앙정부의 명령에만 급급하여 돈을 강제로 꾸어가게 하고 돈을 빌려주지도 않고 이자를 징수하는 편법과 부정을 저질렀다.
또한 여러 가지 제도를 시행했지만 이를 추진해나갈 인재집단을 육성하거나 포섭하지 못했고 사회도 이러한 제도를 수용할 만큼 성숙되지 못한 상태였다. 은행 업무는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사고방식과 제도 하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관리와 민간인 간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 이를 조정할 수 있는 독립된 사법기관이 존재하지 않았고 사유재산제도 명확하게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비난받아야 할 것은 그가 반대파를 수용하지 못한 점이다. 역사에 가정을 해봐야 쓸데없는 일이지만 그가 정적 사마광을 용인하고 협력했다면 신법이 그렇게 실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조나라의 인상여는 정치적 경쟁자 염파장군을 마음으로 감화시켜 두 사람 간에 刎頸之交라는 두터운 우정을 쌓았다. 이로 인해 적국 진나라는 인상여가 살아 있을 때는 감히 조나라를 침공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인상여같은 넓은 마음과 멀리 내다보는 혜안을 왕안석이 가졌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왕안석은 훌륭한 정치가가 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