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의 메모장에서 발견한 것
아내가 최신형 아이패드 11을 샀다. 덕분에 연애시절 내가 큰 맘먹고 선물했던 아이패드7은 내 차지가 됐다. 이제 본격적으로 내가 써야 하니 계정도 내 걸로 다시 로그인하고 케이스도 새로 샀다. 늘 그렇지만, 애플 제품은 뜯을 때는 엄청 설레고 새로울 것 같다가도, 막상 전원이 들어오면 그냥 내가 아는 애플이다. 그냥 늘 보던 UI에 늘 보던 어플들, 사실 새롭게 사용할 기능들이 특별히 있지도 않다. 이번에도 그랬다. 물론 아이패드7도 벌써 몇 년 전에 나온 거니 새로울 게 있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새로울 것 없는 아이패드에서 새로운 것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여기저기 뒤적거리다가 메모장을 열었다. 당연히 이미 내 아이폰에도 남아있는 메모들인데도, 괜히 뭔가 새로운 것인 듯 보다가 그만 추억여행에 빠지고 말았다.
8년 전쯤, 나는 독일에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왔다. 당시 교수님들이 하도 독일이 공부하기 좋다고 강의 때마다 말씀하셔서, 그냥 독일에 한번 가보기로 결심하고 휴학을 했다. 휴학하고 1년, 잡지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독일어학원에 다녔고, 워홀을 떠날 준비를 했다. 독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애가 실제로 독일 땅에 발을 디디고 살게 되기까지 딱 1년이 걸렸다. 꽤 많이 준비하고 갔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독일 땅에 도착해서는 참 많이 고생했었다. 처음 임시로 들어간 집에서 그냥 쭉 살고 싶으면 살아도 된다고 했었고, 그러고 싶었는데 같이 간 친구와 다른 플렛메이트와의 불화로 집에서 쫓겨나게 되면서 참 많이 힘들었었다. 그래도 그 고생을 해가며 우여곡절 넘긴 끝에 결국 집도 구했고, 일자리도 구했고, 친구들도 생겼다. 지금 베를린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건, 정말 지독하게 우울하고 외로웠던 한 때와 심장이 터져 나올 만큼 행복했던 순간들이다.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전부 다 치열했다.
내가 메모장에서 발견했던 건 그 치열함의 기록들이었다. 그때는 그냥 별달리 쓸 곳이 없어 핸드폰 메모장에 끄적였던 것들. 나중의 내가 보리라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외계어처럼 기록해둔 메모들. 너무 평범하고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 기록들이, 8년이 지난 오늘의 나에게는 너무나 특별하고 그리웠다. 눈물 날 만큼. 그렇게 점점 그리움으로 절절한 감정이 되어가며 메모장을 스크롤하는데, 이런 메모가 있었다.
[2015년 7월 18일 오전 8:00]
과거를 추억하는 게 늘 좋은 기분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살고 있는 현재를 자꾸
잊으려고 하는 나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현재가 행복함을
자꾸 잊어버리고 불행하다고 단정 짓는 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딱히 오늘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읽은 것은 아니었는데, 이 메모를 읽는 순간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마치 8년 전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과거회상에 젖는 것은 좋고, 추억하는 것도 좋지만 오늘의 소중함을 잊지 말라'라고 말이다.
8년. 그 시간 동안 내 삶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대학원에 진학했고, 의도치 않게 사람들과 손절하는 경험도 했으며, 생각과는 다르게 일하면서 사람들로부터 상처도 많이 받았다. 그동안 나는 많이 약해졌고 세상이 두려워졌다. 그래서 은연중에 나 자신의 삶에 대해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8년 전 그때의 내가 불행하다고, 행복하다고 썼던 모든 기록들이 오늘에 와서는 너무 빛나는 순간 같아 보이는 것처럼, 오늘 나의 불행과 행복이 모두 빛나는 보석이 되겠지. 언젠가 이 순간 또한 돌아가지 못해 절절히 그리운 추억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울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 어떤 순간도 마냥 불행하기만 하지도, 행복하기만 하지도 않다. 오늘의 내게도 불행이 있지만, 즐겁고 행복한 순간들도 있다. 비록 그게 너무 일상적이고 평범해 아무 의미 없어 보일지라도, 시간이 흐르고 바라보면 그땐 알 수 없었던 새로운 의미들이 보석이 되어 다가온다. 마치 내 아이패드7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계속 아이패드7을 쓰려고 한다. 새로울 것 하나 없어 보여도, 시간이 만들어 준 소중한 보물이기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