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파트는 단지라고 부르기보다는 마을이라고 부르는 게 알맞을 정도로 저층의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인데 건물의 지붕도 경사져서 옛날 한옥집에서 보는 눈 쌓인 지붕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둘러싼 야산에도 눈이 쌓여서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평소 같으면 이 경치를 만끽했을 텐데 그러지 못한 이유는, 다음날로 예정된 40년 만의 대학동기들과의 여행 때문이었다. 차를 가지고 가지 않고 KTX를 타고 가기로 한 것은 잘한 결정이었지만, 일단 분당에서 서울역까지 가는 과정이 출근 시간대에 어떨지 걱정이 되어 제대로 눈을 즐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친구들과의 만남에 대한 설렘과, 교통상황 걱정 때문에 잠도 설쳤다.
내가 다니던 학과에는 남학생이 많고 여학생은 6명밖에 없었다. 그중 지금까지 연락하고 가끔씩 만나는 친구는 나를 포함해서 4명이다. 다른 분야에 관심이 많아서 늘 밖을 기웃거리던 나와는 달리, 이 친구들은 계속 전공 공부를 열심히 하였고 지금은 훌륭한 여성 과학자들이 되었다. 직장일과 연구에 바빠서 자주 만나지도 못하다가 이제 퇴직한 친구도 생기고 시간이 여유로워지면서 여행까지 가게 된 것이다. 졸업한 지 40년 만이니 모여서 밤새 이야기를 나눌 생각에 들뜨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어디로 갈지 결정할 때, 우리는 아직 현직에 있는 친구가 일하는 도시로, 그녀가 퇴직하기 전에 가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곳이 바로 순천이다.
그 친구가 학위를 받고부터 시작해서 수십 년간 지낸 도시 순천은, 나도 국가 정원을 비롯해서 습지와 낙안읍성등을 보러 여러 번 갔던 곳이다. 가족들이나 지인들과 함께 갔었기 때문에 친구에게 연락을 못했지만 그곳에 내 친구가 산다는 사실에 늘 고향처럼 친근한 느낌이 들었던 곳이다.
친구는 하얗고 작고 가냘픈 체구지만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공부하고 일하고 가족을 사랑하며 살았다. 그 친구가 사는 도시, 순천은 그녀만큼이나 멋진 곳이다.
눈보라를 뚫고 고속 열차를 타고 도착한 순천역에 친구가 환하게 웃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사는 동네라고 여행 계획, 식당 선정, 운전까지 책임지느라 친구의 어깨가 무거웠을 것이다.
제일 먼저 간 곳은 순천만 습지였다. 꽃이 많은 계절에는 국가정원도 볼거리가 많고 화려하지만, 진정한 감동을 주는 것은 역시 자연이라고 생각한다. 이곳은 유네스코에서 생물권 보호지역으로도 선정한 지역이다.
우리가 처음 마주한 것은 거대한 갈대밭이었다. 이곳에 처음 왔다는 다른 친구는 이렇게 넓은 갈대밭은 처음 보았다고 한다. 바람이 불 때마다 물결처럼 순차적으로 누웠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는 갈대들 사이에 난 긴 트랙을 걸으며 우리는 자연을 만끽할 수 있었다.
또 순천만의 명물인 새들이 넓은 하늘을 떼 지어 날아다니며 그들의 언어로 노래할 때, 인간과 갯벌과(자연) 새와(동물) 갈대가(식물)가 하나로 어우러지는광경을 보며 감탄했다. 그곳에 친구들과 함께 있었던 경험은 오래도록 마음에 새겨질 것 같다.
거기서는 인간이 아니라 새들이 주인공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전세계에서 희귀종이라는 흑두루미 떼가 울며 날아다니는데 그들은 큰 날개를 펼치고 글라이더처럼 날개를 거의 움직이지 않으며 우아하게 비행한다. 이보다 날갯짓을 많이 하고 몸집이 작은 새들은 기러기이고, 더 자주 날갯짓을 하는 새들은 오리이다. 흑두루미 들은 우아하기도 하지만 모여 다니는 무리가 작았는데 해설사님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가족끼리만 모여 다닌다고 하니 고고해 보이기까지 하다. 탐조 여행으로 간 것은 아니었지만 우연히 새들이 많이 오는 계절이었고, 마침 밀물 때여서 생태 체험선을 타고 나가서 새들의 서식지와 그들의 생활도 가까이 볼 수 있었다. 습지를 보호하니 새들도 돌아오고 그 감동을 인간들도 함께 느낄수 있어서 너무 좋다.
마지막으로 갈대밭에 연결된 다리 위에서 석양을 보았다. 친구들과 나란히 서서 지는 해를 바라보니 열정이 가득했던 청년 시절에 만나 퇴직을 앞둔 나이가 되어 함께 여행을 하는 것이 감격스럽다. 우리는 함께나이 들어가는 친구들인 것이다.
다음날에는 선암사에 갔다.
순천에서 유명한 사찰은 송광사와 선암사가 있는데, 송광사는 예전에 이미 보기도 했고 친구도 선암사를 개인적으로 더 좋아한다고 해서 선암사를 선택했다. 여기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라고 한다.
오후 늦게 도착하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친구가 우산을 4개나 미리 준비해 놓아서 하나씩 쓰고 입구부터 걷기 시작했다. 왼쪽의 계곡을 끼고 나무가 많은 숲길을 30분 정도 걸어야 대웅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중에 친구가 자연 암반의아치로 만든유명한 다리 ‘승선교’에 우리를 세우고 사진을 찍어준다.
주차장에서 내리자마자 대웅전이 드러나는 사찰은 감동이 없다. 산 아래부터 다리품을 팔아 걸어 올라와서 드리는기도가 간절한 것처럼, 숲길을 길게 걸어 올라와서 만나는 절의 안마당이라야 기대를 가지고 보게 된다. 많은 사찰여행을 해보았지만 선암사는 규모가 아담하고 대웅전 앞마당의 삼층 석탑과 예쁜 나무들의 조화가 뛰어나 손에 꼽을 만큼 아름다운 사찰이었다. 대웅전의 단청은 낡은 무채색이다. 보수해서 색을 덧칠한 단청이 화려하기는 하지만, 덧칠을 하지 않아 시간이 느껴지는 바랜 나무의 색은 깊은 감동을 준다.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들은 함부로 덧칠을 할 수 없다하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무로 둘러싸인 건물 사이사이를 산책하며, 이곳은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오는 도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암사 대웅전과 삼층석탑
몇백 살씩 되는 수령의 나무들이 많았는데 이곳에 많이와봤다는 친구의 말로는 봄에 매화가 필 때 정말 아름답다고 한다. 꼬불꼬불한 가지를 가진 매화나무 수십 그루가 담장을 따라 있었는데 꽃이 필 때를 상상해 보니 꼭 다시 와서 매화향을 맡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선암사 하면 유명한 해우소-뒷간-도 자세히 보았다. 도저히 화장실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환기 구조가 훌륭하고 발효물질을 섞어 냄새도 안 나는 과학적이면서 건축적으로도 멋진 건물이다.
친구는 조금 산을 더 올라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상을 보여주고 싶어 했고 매일 저녁 6시에 스님이 북을 치는데 아주 멋지니 보고 가자고 했지만,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고 어두운 밤길을 또 30분을 내려가야 해서 이번엔 포기하고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이틀 밤 동안 숙소에서 나눈 대화는 40년의 시간을 뛰어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친구들이가진 중심은그대로였고 총기는 여전히 반짝거렸다.
그들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사랑한다.
이제 나이 들어 시간의 여유가 생긴 반면, 인생에서 함께 할 시간은 많이남아있지 않아서 더 애틋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