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궁! 비행기가 바퀴를 내리자마자 활주로를 빠르게 내닫는다. 엄청난 속력으로 바닥과 마찰해 나는 굉음이 귀를 뚫을 것 같다. 몸이 흔들린다. 이 짧은 시간을 통과하면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출장 덕에 처음으로 홀로 온 제주. 땅에 발을 딛고 공기를 들이마셨다. 청량한 가을이다. 떨린다.
일정은 세 시 반에 마무리됐다. 얼른 다랑쉬 오름을 검색했더니 45분쯤 걸린다. 지금 가면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올 수 있을 것이다. 다랑쉬라는 정겨운이름이분화구가 달처럼 둥글어 붙여졌다는 게 여러 설 가운데 제일 맘에 든다. 네 시 20분, 흘깃거리며 운전석에서 츄리닝으로 갈아입었다. 배낭에 넣어 온 가벼운 운동화를 꺼내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심호흡하고 곧장 오른다. 나무로 된 좁은 계단이 시작되고 멍석이 깔린 산길도 나타난다. 경사가 급한 편이다. 앞에서 걷던 노부부가 먼저 가란다. 아주머니가 힘들어해 천천히 움직일 모양이다. 좀 서둘렀더니 금세 숨이 찬다. 약간 어지럽기도 하다. 물! 물을 안 챙겼다. 차에 두 병이나 있는데. 뒤에 예닐곱 명의 젊은이들이 따라온다. 대학생인 듯한데 웬만한 산행쯤은 끄떡없어 보인다. 나도 비켜 주고 잠깐 쉬었다. 보라색 꽃이 융단처럼 깔렸다. 애플민트 잎이랑 비슷하길래 꽃 검색을 했더니 ‘산박하’로 나왔다. 어려서 박하 잎을 따서 물에 우려먹었던 기억에 맘이 따스해진다. (내려오니 산박하가 아니라 ‘꽃향유’라고 주차장 안내판에 쓰여 있다. 검색 어플도 실수한다.) 쑥부쟁이도 여기저기 지천이다. 꽃잎이 국화보다 작고 가늘다. 저만치서엉겅퀴가 하늘거린다. 피어 있는 가을꽃이 모두 보라색이라 신기하다.
으악! 산비탈을 꺾어 돌아가는데 계단에 널부러져 있는 사람 다리가 보였다. 누가 쓰러졌나 싶었는데 퉁퉁한 중년 아저씨가 계단에 다리를 뻗은 채 누워있다. 그 위에 ‘스마일’이 그려진 회색 커플 티셔츠를 입은, 짝이랑 비슷한 몸매의 아주머니가 기다리고 서 있다. 아이고 아저씨, 많이 힘드셨나 봐요. 오른쪽 옆으로 다랑쉬 오름과 똑같이 생겼다는 아끈(버금) 다랑쉬 오름이 나타났다. 대지에 완만하게사선으로 퍼져 내린 모양새가 사진보다 훨씬 예쁘다. 다시 숨을 헐떡이며 한 발짝 한 발짝 오른다. 드디어 하늘이 보인다. 유홍준 교수가 ‘마지막 능선이 보이면 힘들다고 엄살을 부리던 사람들도 눈깔사탕을 마지막에 우두둑 깨물어 버리는 것처럼 잰걸음으로 달려간다’더니 역시나 저절로 힘이 솟아 걸음이 마냥 가볍다.
드디어 정상이다. 사방으로 시야가 확 트여 눈이 시원해진다. 방향을 바꿔 가며 풍광을 바라보는데 저절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왜 ‘오름의 여왕’이라 불리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드넓은 들판, 여기저기 솟아있는 크고 작은 오름, 멀리 빼꼼히 드러난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가까이엔 마을이 없는 게 가슴 아프다. 바람 따라 억새가 추는 춤이 아름답다. 날씨가 좋으면 한라산도 보인다던데 하늘엔 구름이 잔뜩 끼었다. 멀리 성산 쪽은 다른 세상인 듯 맑다. 성산 일출봉과 우도가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어 신비롭다.
싱그러운 대학생 커플은 갖가지 포즈를 잡고, 외국인 할아버지는 삼각대에 카메라를 고정해 풍경을 담는다. 조선 시대 이름난 효자 홍달한이 숙종임금이 돌아가시자 슬퍼하며 애곡했다는, ‘망곡의 자리’를 표시한 네모난 돌 위에 60대로 보이는 아저씨가 앉아 오이를 먹으며 땀을 식힌다. 모두들 오름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있다. 아래 쪽으로 조금 돌아갔더니 누군가는 뛰어 들어가 눕고 싶다는, 둥글고 오목한 초록 분화구가 하늘을 향해 그림같이 열려 있다. 예전엔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다는데 지금은 위에서만 볼 수 있다.가장자리를따라 억새가 하얗게 반짝이고 분화구 너머로 제주의 들판과 용눈이 오름이 맵시를 드러낸다. 오이 아저씨에게 둘레길을 돌아 내려가면 주차장 입구로 통하는지 물어봤다. 그쪽으로 가면 안 되고 올라온 길로 다시 내려가야 한단다. 본인이 여행 가이드였다며 사진도 찍어 준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도 자연스럽다며 셔터를 누른다. (헉! 잘못된 정보였다. 둘레길로 가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그리로 못 가서 두고두고 아쉽다.)
억새밭에 앉아 제주를 조망하며 친구들에게 사진을 보냈다. 다들 감탄한다. 자랑하는 것 같아 주저했지만, 이 감동을 혼자만 느끼기엔 아깝잖아. 이런. 배터리가 다 되어 휴대폰이 꺼졌다. 30분쯤 더 지나니 곧 어둑해질 것 같다. 일러준 대로 올라왔던 길로 내려갔다. 스마일 커플티의 중년 남녀를 다시 만났다. 그들이 오던 방향으로 가는데 밑동에서 줄기가 여러 갈래로 나뉜 키가 자그마한 나무들의 터널이 나타났다. 나무 표지판에 소사나무라고 쓰여 있다. 부드럽게 구부러진 자태에 경탄하며 한참을 가도 끝이 안 보인다. 가만, 올라올 때 이 길을 걸었던가? 촤아아아! 파도 소리가 들린다. 바다는 저 멀리에 있는데? 오묘하고 으스스하다. 사람이 안 보인다. 깊은 산속에 홀로 갇힌 느낌이다. 걸음이 빨라진다. 꺼진 휴대폰을 만져 본다. 여기서 길을 잃으면 나는 발견될까? 미로 같은 어두운 산을 헤매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문득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주인공이 밤새 눈보라에 갇혀 친구 집을 찾아 고군분투하던 장면이랑 겹친다. 빽빽한 소사나무의 가지 사이로 내다보니 분화구가 언뜻언뜻 보인다. 아, 안심이다. 여기가 둘레길인가 보다. 더 깊이 들어가고 싶은 기분을 누르고 되돌아섰다. 아까 그들을 만났던 곳에 이르니 이제야 아래로 가는 나무 계단이 보인다. 여기서 잘못 들어섰구나. 안 그랬으면 근사한 소사나무 터널도 못 만났을 테니, 어쩌면 인생도 여행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더 낫다.
내려가는 건 금방이다. 아끈 다랑쉬가 다시 왼편에 나타난다. 언제 또 여길 와 볼 것인가. 오솔길 아래에 2단으로 된 넓적한 나무 쉼터가 하나 있다. 많이들 앉았다 갔는지 반질반질하다. 초록, 노랑이 섞인 연두, 갈색이 찍힌 진한 녹색의 들판과 어우러진 검은 밭담을 눈에 새기다가 아쉬워 아예 누워 버렸다. 나무의 우듬지 사이사이로 하늘과 구름이 담긴다. 다시 파도 소리가 귀를 찢는다. 바람이 내는 음이라기엔 너무 소란스럽다. 저 아래 도로에 자동차 바퀴가 구르는 소린가? 혼란스럽다. 나뭇잎이 쉴 새 없이 흔들린다. 몇 발자국 앞에서 푸드덕 꿩이 날아오른다. 세차던 바람이 잦아든다. 흔들리던 나뭇잎이 고요해진다. 파도 소리도 멈춘다. 비로소 인정한다. 바람이었구나. 육지에서는 들어 보지 못한 아우성이었구나. 잎들이 움직인다. 다시 소리가 퍼진다. 나무를, 갈대를, 새들을, 벌레를, 나를 흔든다.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롭고 따뜻하면서도 시원한 감촉이 온몸을 휘감는다.오래전 이곳에 불었던 바람의 입자가 돌고 돌아 지금 누워 있는 나를 어루만지는 것일 수도 있겠지. 작가 한강이 ‘70년 전 학교 운동장에서 수백 명의 아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의 얼굴이 눈에 덮여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중략) 그 물방울들과 부스러지는 결정들과 피 어린 살얼음들이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법이, 지금 몸에 떨어지는 눈이 그것들이 아니란 법이 없다.’고 그의 소설에 쓴 것처럼.
잃어버린 다랑쉬 마을 터인 탐방로 주차장에 서 있어선지, 중간쯤에 책갈피가 끼워진 한강의 소설이 배낭에 담겨선지, 제주의 바람이 유난히 살갗을 파고든다.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벅찬 소식에도, 증인과 증거가 넘치는 역사적 고증에도, 왜곡된 5.18과 4.3사건을 다뤘다고 주장하며 흔들어 대는 소음이 들린다. 모든 걸 묵묵히 품고 있을 다랑쉬 오름 앞에 미안하고 분노한다.
어두운 거리의 식당에서 해물 뚝배기를 후후 불어가며 먹고 숙소에 누웠다. 책갈피를 꺼내고 고통에 직면하는 섬세하고 감각적인 문장을 읽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