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결석의 반
'결석 없는 반'
6학년 아이들과 1년을 시작하는 첫날, 나는 호기롭게 애들에게 선언했다.
"얘들아, 우리 반을 1년 동안 결석 없는 반으로 만들어 보자."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국민학교 6년 개근과 중학교, 고등학교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한결같이 등교했다. 그리고 대학에서도 단 하루도 결석한 적이 없는 그야말로 무결점의 '개근녀'였다.
재주는 없지만 근면, 성실한 태도는 교사로서 등교하는 직업인으로서도 아낌없이 발휘되었다.
이 모든 것이 '개근상'이라는 꽃봉오리로 피어났다.
어찌 보면 굳건하고 확신에 찬 '개근'에 대한 나의 신념은 신앙에 가까웠다.
왜 그런 생각이 나의 정신을 지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절에는 대체로 '우등상'보다는 '개근상'에 더 가치를 두고 칭찬하던 분위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등생이 되지 못한 아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격려하고 자부심을 심어 주고자 하는 어른들의 고도의 전략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방침은 인생을 살아가는 기름진 거름이 됨은 부인할 수 없는 진리였다.
45년 전, 시골 학교의 6학년 어린이는 집안의 일꾼이었다.
검게 그은 피부만큼이나 근육도 발달했고 힘도 세며 건강미가 넘쳐흘렀다.
그래서 잘 아프지 않았기에 결석생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나의 정서가 비슷한 부모님들의 협조 덕분에 출석률은 아주 좋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1년 동안 '무결석의 반'을 달성하려는 야무진 포부를 갖게 된 것이다.
3월, 4월, 5월, 6월, 7월, 드디어 1학기 종업식을 하는 날을 맞이했다.
매일 아침, 약간의 긴장 속에 맞이하지만 오늘도 역시 전원 출석을 확인하며 흐뭇한 날들을 보냈다.
1학기 동안 단 한 명의 결석도 없이 순항 중이었다.
아이들의 정신도 약이 바짝 오른 고추처럼 매웠기에 가끔 아픈 몸을 끌고 학교에 와서 양호실에서 몇 시간 누워 있는 아이는 있었지만 결석은 하지 않았다.
'결석 없는 반의 위업은 가뿐하게 달성하겠는데?'
나 홀로 샴페인을 몇 병째 터뜨리는 중이었다.
2학기도 거의 마무리되어 가던 12월,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그때의 추위는 지금의 추위와 비길 바가 아니었다.
난방 시설이나 겨울 옷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체감 온도는 더 낮았다.
교실을 나서면 허허벌판 논 밖에 없던 농촌이었기에 바람을 막아 줄 것이 없었으니 사나운 북풍을 온몸으로 받아 내야만 했다. 뼛 속까지 시리다는 말이 딱 맞는 추위였다.
아무리 자연에서 만들어진 야생의 아이들이라고 하지만 고뿔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수업 시작종이 울리고 10분이 지나도 순범이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나보다 아이들이 더 긴장하며 순범이를 기다렸다.
집집마다 전화가 없었기에 학교로 전화해 줄 부모님은 없었다.
기어이 1교시 마치는 종이 울렸다.
아이들이 술렁거렸다.
"야, 순범이 데리러 가자."
제일 먼저 이렇게 외친 아이는 반장인 창수였다.
창수는 공부를 잘해서 반장이 된 아이가 아니었다. 축구왕이었고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봉사정신도 있어서 담임의 신망과 함께 아이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던 사나이 중의 사나이였다.
"그래, 그러자."
내가 미처 말릴 사이도 없이 남자아이들 서너 명이 우르르 교실 문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복도로 뛰어 나가며 내가 외쳤다.
"얘들아, 길 건널 때 조심하고 안전하게 돌아와."
마침 순범이의 집은 교문을 건너서 1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못 이긴 척 아이들의 열성 어린 행동에 눈을 감았다.
2교시가 시작되고 10분이 지났을 때 복도에서 왁자한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이 동시에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아, 이런...
복도 끝에서 창수와 다른 친구 한 명이 순범이의 양팔을 걸고 질질 끌며 오고 있었다.
순범이의 몸은 축 늘어져 있었고 머리는 수세미가 되어 있었다.
순범이의 가방과 신발주머니를 들고 따라오는 아이들의 얼굴은 자랑스러움과 결연함으로 한껏 달아 있었다.
"순범아!"
나는 아이들을 교실로 몰아넣으며 순범이에게 달려갔다.
순범이는 파리한 얼굴로 하얀 이빨이 다 드러나게 웃었다.
"선생님, 죄송해요."
"아니야, 아니야. 순범아 많이 아프구나. 선생님이 도리어 미안해."
진짜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신파극 한 편을 뚝딱 찍었다.
순범이를 부축하느라 이 한 추위에 땀이 펄펄 나서 김이 모락모락 나던 창수와 아이들의 모습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아이들이 교실로 입장하자 남은 아이들의 우레와 같은 고함소리와 함께 터져 나오는 박수 소리는 교실 천장 뚜껑을 열기에 충분했다. 지나가던 철새도 화들짝 놀랐다.
마침 내가 양호 업무도 봤기에 양호실에서 가져온 해열제를 먹고 열이 내린 순범이는 하교할 때는 혼자의 힘으로 당당히 걸어서 교실을 나섰다.
이렇게 큰 고비를 넘기며 우리 반은 1년, 진짜 길고 긴 사계절을 지나 '결석 없는 반'을 이루었다.
6년 동안 형설지공의 종착역인 졸업식.
요즘 아이들과는 사뭇 다른 그 시절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폭풍 오열은 깔고 있었지만, 생사고락을 함께 한 끈끈한 동지애로 부둥켜안고 거의 기절 직전까지 울었다.
기껏 '개근상'이라는 상장 쪼가리가 다였지만 우리의 가슴은 어느 누구도 가져갈 수 없는 훈장을 가슴에 달고 정든 교정을 떠났다.
그 아이들의 일생을 지배할 근면과 성실의 초석이 되길 소망하며 무모한 도전을 시작한 나도 참 대책 없는 영정덩어리였다.
그 후유증으로 나의 딸에게도 근본 없이 무모한 개근에 대한 지론으로 '죽더라도 학교 가서 죽으라'는 망언을 거침없이 내뱉어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엄마에게 상처받았며 항의를 한다. 에휴.
그때 그 시절, 우리가 마음을 모아 이룩하고자 했던 것을 지금도 가슴 한 구석에서 별처럼 반짝이길 감히 바라본다.
"얘들아, 미안하고 고마워. 초짜 선생의 무모한 열정에 니들도 고생했다. 하지만 선생님의 마음 잘 알지?
삶은 개근해야 하는 일상을 지키는 일이니 너희들의 날들도 행복으로 출석하고 보람으로 마무리했기를 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