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1
내 이름으로 된 책을 처음 낸 것이 2000년, 꼭 20년 전이다. 내가 ‘글집’을 짓기 시작한 것이 20년 전이란 말도 된다. 그 집은 결국 미완으로 남을 테지만. 인생이 미완이듯이. 그럼에도 참 줄기차게 글을 써왔다. 첫 책은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손바느질로 옷을 짓듯 호주이민의 나날을 촘촘히 기록했다.
이민생활은 고단했다. 자연은 더 없이 아름답고 시내버스만 타도 세계적 관광지가 눈앞에 펼쳐졌지만 영어는 익히기 어려웠고, 무엇보다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남편 것에 두 아이들, 유학 와 있던 조카들까지 십수 년 간 날마다 네다섯 개의 도시락을 싸야 했고 집 청소에만도 하루 세 시간이 걸렸다. 온종일 고부라져 잔디의 잡초를 뽑고, 10여 그루 아름드리나무의 가지 치기를 직접 했다. 가지 하나가 나무만 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그랬으니 내가 지금 코딱지만 한 방에 살게 된 것은 신의 축복이 아니고 뭔가. 3분이면 청소 끝!
교민신문 기자를 관두고 밥장사를 할 때는 주방에서 12시간 이상을 보냈다. 나머지 시간에도 장을 보러가거나 서류 정리를 해야 했으니 하도 일이 고되서 항문이 빠지고 수시로 응급실에 실려가고 발가락 감각이 완전히 마비될 정도였다.
그 무렵 미용실에서 “손님 어디 아팠더랬어요? 머리카락이 많이 상했네요.” 란 소릴 들었을 땐 좀 서글펐지만 한 마디로 ‘억척 아지매’였다. 그때 하나 딱 좋았던 점은 먹고 싶은대로 실컷 먹어도 살이 안 찌고 되레 빠진다는 거였다. 그 모든 시간을 남편에게 간간이 두들겨 맞으며, 시어머니를 모시며, 아이들의 가출(결과적으로는 출가였지만)을 견뎌냈지만 가정은 끝내 붕괴되었고 고생 끝에 낙이 아니라 결국 혼자가 되었다. 그것도 완전히 빈손으로.
2020년 9월, 『좋아지지도 놓아지지도 않는』이란 제목으로 2000년 첫 책 출간 이후 10번째 책을 냈다. 돌이켜 보면 ‘내가 살려고’ 끊임없이 글을 썼던 것 같다. 나는 아팠던 것이다. 행복한 사람은 글을 쓰지 않는다지만, 아프지 않은 사람도 글을 쓰지 않는다. 글쓰기는 내게 까스활명수(올해 가장 많이 팔린 약이라네)였고 게보린이었다. 근원적인 처방은 아니었지만. 아니, 나는 내가 아픈 줄도 몰랐다. 이제야 겨우 알아간다.
내 글은 내용으로나 분량으로나 아침에 화장실 볼 일을 보면서 읽기에 딱 좋다는 말을 듣는다. 어떤 분은 너무 짧다고도 하지만(아마 변비인 듯^^). 그렇게 변기에 앉아 ‘선데이 서울’ 류의 연재물 뒤적이듯 대해 주신다면 고맙겠다.
‘집으로’, 호주에 살 때는 한국이 원래 내 집 같더니, 이제는 호주가 돌아갈 집 같다. 30에서 50살까지 인생의 몸통을 그곳에서 보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지난 7년이 유배지의 경험과도 같아, 해배(解配)를 앞두고는 어디든 ‘집으로’가 될 밖에.
왜 하필 귀양살이에 비유하냐면 내 성장의 풍토 탓이다. 무기수 사상범 선친의 20년 20일 간의 옥살이로 인해 우리 가족에게는 감방 용어와 그와 관련된 것들이 체화되어 있다. 여북하면 아버지의 수인 번호를 친정 아파트 문 비밀번호로 썼으랴. 3295번. 대구였는지, 전주였는지 교도소 면회 때 스피커에서 호명되던 그 번호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3295번 신00, 7호실로!”
내게도 굳이 수인번호를 붙인다면 109번. 내 방 번호인데, 공교롭게도 2007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도리스 레싱의 단편소설 『19호실로 가다』를 연상시킨다. 『19호실로 가다』는 결혼의 굴레에 매여 가정이라는 감옥에서 서서히 자유를 잃어가는 기혼 여성의 자아상실과 절망을 담고 있다. 주인공 스잔은 혼자만의 시간, 혼자만의 공간을 갈망하며 낯설고 누추한 한 모텔을 정기적으로 찾아간다. 그 방이 19호실, 스잔은 그곳에서 잃어버린 자신을 찾을 가능성을 모색하지만, 그 공간마저도 그를 거부하며 꿈을 짓밟고 만다.
스잔을 대신하여 나는 109호실에서 그 꿈을 매만진다.
‘있는 사람들이 더 무섭다니까!’
신림동 고시촌 4.5평, 실질 공간 2.5평 방을 보증금 100만원, 월세 36만원에 얻었다. 원래는 37만원에 나와 있던 방이었는데, 사정사정해서 만원을 깎았더니 복덕방 여자가 마지못해 그러라고 하면서 혼자 한 말이다. 그런데 다 들린다. 호주에서 왔다고 졸지에 '있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그렇다고 무서울 것까지야.
2013년 8월 1일, 서울에 도착하기 무섭게 나는 그 다음날부터 신림동 일대의 일명 고시촌 언덕배기를 뻔질나게 오르내렸다. 물을 끼얹은 듯 땀이 흘러 셔츠가 등짝에 들러붙고 얼굴은 고구마 색으로 달아올랐지만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 쉴 새 없이 나를 몰아댔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워 8월의 폭염은 하루도 빠짐없이 세상을 찌고 달궜다. 내 일생에 그렇게 더운 여름이 있었을까. 또한 그렇게 추운 겨울이 있었을까. 북반구와 남반구, 계절이 정반대인 한겨울의 호주와 한여름의 한국을 통과하며 절박하고, 지치고, 처량하고, 비참했던 2013년 8월.
"그 방에서 되도록 오래 잘 살아요. 그 돈에 창문도 있고 좀 좋아. 반쯤 지하층이라 창을 열면 눈앞이 바로 공동 화단이요. 봄에 꽃도 볼 수 있고, 여름이면 풀포기도 드문드문 있고. 보통 고시방은 창도 없고, 있다고 해도 열어봤자 숨이 턱 막히는 콘크리트 벽인 거 알죠?"
보증금과 한 달 치 방세, 복비를 치르고 나자 계약서를 챙겨주며 복덕방 여자가 이렇게 말했다. 듣기 좋은 덕담이었다. 나도 웃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빼곡한 원룸이 마치 하모니카를 세워 놓은 것 같은 고시촌 언덕을 비로소 느긋한 마음으로 올라갔다. 일주일 만에 방을 얻은 것을 자축하며 복덕방 옆 헌책방에서 ‘거금’ 만원을 주고 산 소설책 두 권을 옆구리에 끼고 양 손엔 옷가방을 거러쥐고.
『19호실로 가다』의 스잔과는 달리 나는 결혼이라는 계약을 스스로 파기했으니 차라리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주인공과 닮았고, 한편으로는 버지니아 울프를 닮은 듯도 했다. 여자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방과 돈이 있어야 한다고 했던. 물론 나는 방만 있지 돈은 없었지만.
이렇게 저렇게 비유해봤자 내게 109호실은 상처 입은 자아의 도피처이자 세상과의 고립을 예고하는 암울한 장소일 뿐이었다. 나는 두려웠다.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글을 쓰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거라는 본능이 감지되면서 그때부터,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모르스 부호를 찍듯 강박적으로 세상을 향해 쉼 없이 타전을 하고 있다. 인간 사회로부터 완전 고립되어 혼자 갇히지 않기 위해서는 ‘글만이 절망을 막아주는 방파제’라고 했던 헬렌 켈러처럼. <2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