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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렌 May 18. 2022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드디어!!!! 이 책을 끝냈다!!!!! 라는 감상으로 글을 시작하고 싶다.

당연하다. 종이책으로 700p, 전자책 내 자/행간 기준으로 1,200 (물론 200p 정도는 주석이지만.)p에 달하는 대장정이었기때문에...


책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엄마는 책을 읽는 것도 일종의 노동이며, 각 문단마다 분투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나는 그런 식으로 어려운 책을 흡수하는 법을 배웠다. <랩 걸> 호프 자렌

지침이 되어 주던 호프 자렌의 이 구절 때문이었다. 


나는 비문학보다 문학을 선호한다. 비문학을 선택하는 이유는 순전히 너무 소설을 많이 읽어서. 에세이를 많이 읽어서. 조금 더 어려운 책을 읽어 보고 싶어서. (각 장르에 대한 선망 등 평가 의도는 일절 없이) 그러다 보니... 책을 놓았다 읽게 될 땐 반드시 소설을 찾게 됐고... 이 책을 고르게 된 경위도 그렇게 연이어 내게 편한 책만 읽었던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자 호프 자렌을 떠올린 덕이었다. 


거기에 "롤랑 바르트"라면 <저자의 죽음>으로 너무나 유명한 사람이었고. 이 저자의 <신화론>에 개인적인 이유로 각별한 관심이 있어 선택하게 됐다.




어쨌든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롤랑 바르트의 강의를 옮겨 적은 강의록이다. 강의의 제목은 기억에 따르면 "어떻게 소설을 쓰는가." 책의 첫 몇 문장을 보고, 그리고 앞서 설명한 이유에 따라 책을 덜컥 (그것도 이만큼이나 두꺼운) 샀다가, 이 대목을 보고 '아 책을 잘못 샀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점점 책을 읽을수록 그런 생각은 사라졌고 이 저자의 책과 글에 대한 각별한 애정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하지만 강의록의 모음집인만큼, 감상도 그만큼 파편화 되어있고 논리의 순서없이 책에 등장한 내용들을 엮어 쓸 예정이다.


사실 바르트는 이 책에서 '어떻게 글을 쓰는가'보다는 글을 쓰는 '저자'들에 대해 주로 이야기 한다. 바르트가 근대에 탐독했던 것이 <저자의 죽음>이라서 일까. 허나 다시 돌아온 그의 생각이 <저자의 회귀>여서 일까. 어쨌든 바르트는 본인의 강의에서 <저자>를 말하는데 한 순간도 게으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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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의 자아가 원하는 방향으로 글을 쓰는 건 나르시시즘적 글쓰기고 (자아를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 이 나르시즘을 남에게 납득시키지 못하면 무슨 소용인가. 라는 뉘앙스의 말을 한다. 더불어 남(=타인)을 등장시켜 그 타인에게 나를 납득시키는 일종의 나르시즘, 그러나 공감에 가까운 이야기가 소설이라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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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엔 누구나 망설임이 있다고 한다. 그게 없는 경우를 영감이라 정의하며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기적적으로 망설임이 없는 경우를 일컫는 특징적인 명사는 영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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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재를 선택하는, 더 국지적으론 '반드시 이 이야기여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정말 낭만적인 설명을 한다.

논리적 개념으로 말하자면, 세계는 무관한 또는 부적합한 관계에 의해 연결되어 있는 '사항들'을 내게 보여줍니다. 포괄적입니다. 하지만 작품은 창작된 것이기 때문에, 배타적 관계, 배타적 분리, 즉 현실의 분리를 내게 부과해야 합니다. 그 이야기가 내 눈에 필요한 것이 되려면 알레고리적 조밀함을 지녀야만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저자는 주저할 수 없었고, 또 그런 일은 그로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작품의 필연성이란 그 작품이 세계 어딘가에서 한 명의 독자의 필요에 응답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책의 매력은 이런 점에 있는 것 같다. 읽을 수록 '그래서 이걸 듣고 좋은 글을 쓸 수 있단 거야?' 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 강의를 들었다면 혹은 지금 나처럼 읽는다면 이 사람의 깊은 생각과 지식에서 나오는 유려한 말에 홀릴 수 밖에 없단 점. 내가 은연 중에 했을 지도 모르는 생각을 정갈한 언어로 만든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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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초고'에 대해서도 이렇게 정의한다. 작가들이 흔히 처음에 쏟아내는 에너지들은 (플로베르의 말에 의하면) 작가의 자기 자신의 크기를 모르는, 스스로에 대한 가장 큰 위협에 가까우며 이것이 <초고>라는 형태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에너지 낭비가 없을 '숙련성'이란 관리된 빈곤화라는 이야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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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대해선 어떤 규칙적이 삶이 필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많은 작가들의 TMI를 방출하는데, 다시 강조하는게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예외의 중단 상황을 의연히 받아 들이고 "다시 시작하기"'가 누구에게나 어려웠단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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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슬럼프라고들 표현하겠지만 바르트는 "권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다. 생각할수록 이 강의는 정말로 글을 쓰는 방법보다는 글을 쓰는 저자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어쨌든 권태는 일종의 글쓰기를 방해하는 병이자 또 글쓰기를 진행하고자 하는 (예술은 반-권태이므로)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을 들며 작가들의 권태에 대한 훌륭한 문장 들을 든다. (플로베르, 말라르메)


종종 <책>에 대한 이야기도 한다. 

바르트는 책을 세 종류로 분류하는데


원서 (Ur-Libre)

:  성경과 같이 어떤 문화에 있어 하나의 기원이 될 수 있는 책

안내서 (Libre-guide)

: 안내서는 주체의 삶을 인도하는 책(이건 개인적인게 될듯)

열쇠책 (Libre-clef)

: 하나를 이해하도록 문을 열어주는 책 (말라르메의 표현에 의하면 책중의 책) 

ex) 셰익스피어: 햄릿, 이탈리아: 신곡, 그리스: 오딧세이 (웃긴 TMI. 바르트는 프랑스 문학엔 그런 책이 없다고 함. 마르셀 프루스트를 그렇게 사랑함에도...)


또한 <완전한 책>과 <총록>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책은 최상의 개념에서는(단테, 말라르메, 프루스트) 우주의 재현입니다. 책은 이 세계에 상응합니다. '건축적이고 계획된' 책을 원한다는 것은 구조화되고 계층화된 하나뿐인 어떤 세계를 구상하고 원하는 것입니다.
총록은 계층화되지 않고 세분된, 하나가 아닌 세계를 재현하는데, 우발적인 사건들의 순수한 조직이고 초월성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말라르메의 총록 혐오를 이해하나, 사실은 책이 총록이고 총록이 책이라는 (우리는 책의 발췌들을 가끔 엮어간다는 얘기를 하면서) 변증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 대표적인 예로는 파스칼의 <팡세>가 있다.)



그 외엔 주로 저명한 저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물론 제 모국인 프랑스 문학과 프랑스 저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하는데, 그래도 거진 들어본 이름들이라 이런 TMI들이 정말 즐거워 여기에도 나열해본다.


"

프루스트는 일기 쓰기를 싫어했다.

카프카는 메모 남기기를 싫어했다.

프루스트는 말년에 장수를 위해 절식하며 약간의 카페오레만 마셨다. (기엔 하루에 17잔의 커피를 마셨다고 함;)

프루스트는 한 여름에 양모 이불을 덮고 화로까지 켠 채로 침대에 누워 집필을 했다.

발레리는 평생 매일 아침 5시에 커피, 전등과 함께 수첩을 폈다.

(의외의 사실) 랭보는 젊은 나이에 어떤 시를 기점으로 절필 했고 (그것이 본인 문학의 완결이라 생각했다고 함.) 어쨌든 시를 쓰던 시절엔 굉장히 규칙적인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랭보의 메모? 편지에 남겨진 이야기인데 그의 시처럼 낭만적인 줄글임)

지금은 내가 작업하는 밤이네. 자정부터 아침 5시까지. 지난달, 무슈르프랭스 가의 내 방은 생루이 고등학교의 정원으로 나 있었어. 아침 3시 촛불이 창백해지고 모든 새들이 한꺼번에 나무에서 소리를 지르면 더 이상 작업하지 않아. 내게는 그때가 포도주 집에서 취하게 마실 시간이고, 나는 밥을 먹으러 집으로 돌아와 아침 7시에 누웠네. 해가 기와 아래 죽치고 사는 사람들을 밖으로 나오게 할 시간에 말이야. 여름에는 이른 아침 그리고 12월의 밤. 바로 이것이 항상 여기서 나를 황홀하게 했던 것들이야."

스탕달은 52일간 <파르마 수도원>의 500쪽을 불렀고, 비서가 이를 속기했다. 

프루스트와 드뷔시는 동시대 인물인데, 드뷔시는 프루스트를 "그 무리는 장황하고, 꾸며 대고, 감퇴적이고, 약간 발정적입니다."라고 평가했고 반대로 드뷔시의 음악을 너무 사랑했던 프루스트의 초대에 대해 완곡히 거절을 했다고 한다. 

"


결론적으로 나에겐 제법 좋은 책이었다. 저자의 말이 어려워 고군분투하며 (호프 자렌 식으로) 읽기도 했고, 실제로 글을 전투적으로 쓰지 않을 나에겐 '어떻게 글을 쓰는가'보다 프루스트가 알고 있던 다양한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좋았다. 게다가 바르트의 언어로 정리된 생각들 (을 읽으며 나는 그가 철학자라는데 동의했다.) 은 또 얼마나 유려한지. 그리고 마르셀 프루스트에 조금 영업당한 것 같기도 하다. 무려 열 두권으로 이루어진 대서사시이기 때문에. 읽기에도 시작하기에도 벅찬 책이지만. 그래도 바르트는 분류하지 않았으나 그의 분류에 따르면 적어도 내게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프랑스의 <열쇠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언젠가 읽어볼 기회가 있다면... 1권이라도 읽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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