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 인류 사상 가장 큰 대제국 건설... 목적은 교역이 핵심
잔인한 살육 방식으로 '학살자' 타이틀... 세상 모든 전쟁은 잔혹
몽골족, 세계사의 첫 문을 열다... 정화 원정과 콜럼버스의 세계관 확대
칭기즈칸은 역대급 규모의 대제국을 만들었다. 그가 만들었던 제국의 유지 기간(1206년~1368년)은 비교적 짧았지만, 워낙 컸던 제국의 유물은 해당 지역에 뿌리깊게 남아 제국 멸망 후에도 각 지역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 예로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한탄이 있다. 이 말의 본래 주인은 중국인들의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선 가을이 왔음을 알릴 때마다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천고마비’는 사실은 말이 살찐 가을무렵 때부터 북방의 몽골족들이 중국을 공격했기에 만들어진 문구다. ‘말이 살 쪘으니 이제 곧 몽골족들의 침략이 시작되겠군’이란 공포가 담겨있는 문구다. 말하자면 중국인들이 가졌던 고민이 윤색돼 한국엔 청량한 가을 계절을 가리키는 문구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칭기즈칸은 왜 제국을 만들었나?= 칭기즈칸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세웠다. 금나라 정벌과 호라즘 정벌 등에서 그는 도시에 있는 모든 사람을 처형하는 수백만명의 학살자로도 기록돼 있다. 그러나 그가 제국을 왜 만들었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여러가지 해석들이 있다. 히틀러가 레벤스라움을 기치로 2차세계대전에서 전 유럽을 정복했고, 알렉산더가 지중해 패권 장악을 위해 제국을 만든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 반해, 칭기즈칸이 왜 제국을 건설했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여러가지 설이 있다. 여러가지 설이 있다는 것은 그 제국 건설 목적이 불분명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장 설득력이 있는 설은 ‘경제적 목적’ 때문이란 주장이다.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져 부족간 전쟁을 수세기 동안 이어온 몽골족은 아명 테무친은 부족 연합의 결의로 ‘칭기즈칸(가장위대한 왕)’으로 추대(1206년)됐다. 1215년 칭기즈칸은 금나라를 정벌했다. 칭기즈칸이 가장 관심이컸던 부분은 지속적인 경제적 공물을 받는 것이었다. 유목민들이 쓰고 마시고, 먹는 생활필수품들 가운데엔 초원에서 유목 생활만으로 얻기 어려운 물품들이 많은데, 이를 제대로 수급하기 교역이 필요했다. 그러나 교역은 매우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만 이뤄졌다. 이유는 오랜 기간 약탈을 당했던 중국 변방 도시들로선 적과의 교역이었기 때문이다. 교역이 막히면 약탈이 이뤄진다. 약탈은 다시 교역이 어려워지게 되는 원인이 되고 이같은 악순환이 수세기 동안 중국의 북방 변방 도시들과 북방 몽골족 등이 관계를 맺어온 방식이었다.
그러나 약탈은 위험이 큰 행동이다. 정규군을 만날 가능성도 있다. 국방력이 강한 중국 왕조가 들어설 경우 약탈은 쉽지 않다. 이렇게 되면 유목생활을 통해선 얻을 수 없는 재화를 획득할 방편이 사라진다. 몽골 제국이 실크로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이유다. 이와는 반대로 중국이 실크로드에 관심을 가진 것은 정치적 군사적 목적 때문이었다. 몽골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재화를 마련키 위해 실크로드에 일찍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실제로 몽골 유목민들은 육류나 유제품 이외에 농경 지대에서 생산되는 적지 않은 양의 곡식과 차를 소비했고, 의복도 면이나 비단을 사용했으며 기타 생활에 필요한 여러 도구들은 물론 각종 사치품들도 소유했다. 유목민들의 삶이 자급자족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다. 가장 좋은 생필품 보급은 인근 국가와의 교역이겠으나, 몽골의 주요 교역대상국인 중국은 북방 민족에 아주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교역만을 허가했다. 교역이 불가하니 약탈이 이뤄지고, 약탈은 다시 교역을 멈추는 원인이 됐다. 그래서 중국 본토를 아예 침공, 남송 멸망까지 한걸음에 달린 것이다.
서역 정벌의 원인이 된 ‘호라즘 정벌’의 시작 역시 교역이 원인이 됐다. 칭기즈칸이 호라즘 제국에 대규모 사신단을 보낸 것은 교역을 하고 싶다는 의미였다. 말과 선물 사신단을 함께 보내 교역을 요청했으나, 실크로드의 중심을 차지한 신생 호라즘 제국은 칭기즈칸의 사신단을 모두 처형했다. 그것이 서역 정벌의 원인이 됐다. 말하자면 칭기즈칸이 대 제국을 세운 이유는 경제적인 이득을 누리기 위한 교역이 핵심이었던 셈이다. 실크로드를 통한 경제적 교류의 활성화, 그로 인한 중앙아시아 도시들의 부의 증대는 유목국가인 몽골의 수입을 증대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몽골이 세운 제국에서 동서 교역은 활발했다.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칸은 원나라를 세우고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겼으며 동서 무역로를 장악한 결과로 막대한 세수를 거둬들일 수 있었다. 쿠빌라이칸은 고려를 침공한 왕이기도 하다. 쿠빌라이칸 치세 시대가 바로 마르코폴로가 몽골의 칸을 만났던 시기다.
▶칭기즈칸, 동서 교역 빗장을 풀다= 칭기즈칸이 대제국을 건설한 목적이 교역 때문이었다는 것은 그가 칸으로 있을 동안 인류 사상 처음으로 공식 화폐를 지폐(제로통행중통원보교초·중통초)로 지정한 것과 관련이 깊다. 돈을 지폐로 바꿔 사용하게 된 계기는 주조화폐인 동전을 사용하기에는 충분한 양의 구리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종이화폐는 칭기즈칸이 등용한 금나라의 재상 야율초재가 처음으로 제안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이후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칸이 원나라의 모든 화폐를 중통초로 단일화 했다.
몽골 제국 하 국가가 대단한 유연성을 발휘한 것은 기본적으론 중상주의 정책이 기본 국가관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대목이다. 몽골 제국은 상인들 못지 않게 선교사와 종교인들의 여행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몽골은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 힌두교 등 모든 종교에 개방적인 정책을 취했다. 어떤 종교라도 신앙과 포교를 허용했다. 일부 칸은 아예 이슬람으로 개종하기도 했다. 마르코 폴로가 상인의 아들이었고, 그보다 앞서 몽골을 방문했던 플라노 카르피니와 윌리엄 루브룩은 선교사였다.
몽골 제국 당시 동서간의 이동이 얼마나 자유로웠는지는 이븐 바투타의 대여행이 성사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이븐바투타는 1304년 북아프리카인 모로코에서 태어났는데 그는 30년에 걸쳐 12만킬로미터를 여행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의 여행지를 오늘날 국가들로 보면 이집트, 이란,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소말리아, 인도, 러시아, 중국, 케냐 등이다. 육로와 해로가 섞여 있다. 그의 여행은 이후 ‘도시들의 진기함’이라는 저술로도 남겨져 있는데, 내용이 풍부하고 당시 상황에 대한 기록도 소상해 사료로서의 가치도 높다. 관심이 가는 대목은 이븐 바투타가 여행했을 당시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큰 제국은 몽골 제국이었고 그의 여행을 돕는데 역참제가 사용됐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역참제는 몽골 제국이 설치한 네트워크로 30~40킬로미터마다 설치된 간이 숙소이자 말 보관소다.
몽골 시대에 중국은 유럽과 아프리카에 대해서 알게 됐고, 이슬람권에서는 중국의 역사와 의학, 농업 분야의 서적들이 번역됐다. 중국에서 발명된 세계 4대 발명품(화약·나침반·종이·인쇄술) 가운데 인쇄술을 제외한 3대 발명품이 유럽으로 전해진 것 역시 몽골 제국 시대 때다. 유목민 출신이었던 몽골 지배층은 이동에 대해 별다른 제약을 가하지 않았고, 해상을 통한 여행은 언제나 열려있었다. 포르투갈 등 유럽인들이 15세기 대항해 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 역시 몽골 제국 설립으로 인한 세계관의 확장에 힘입은 바 크다. 콜럼버스가 스페인의 이사벨라 국왕으로부터 받아 지참했던 교지의 최종 수신인이 몽골의 ‘그란 칸’이었다는 점도 콜럼버스 항해록에 기록돼 있다.
이 때 치세를 ‘팍스 몽골리카’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사가 시작된 것 역시 몽골제국이 유라시아의 광대한 땅을 지배했던 시기라는 관점이다. 동아시아와 서아시아, 그리고 유럽의 수준 높은 문명들의 교류와 융합이 이뤄졌던 시기가 몽골제국이었다는 설명이다.
몽골이 유라시아에 세웠던 제국의 원동력은 기마능력에서 비롯됐지만, 보다 근원적인 속성은 사실은 유목 즉 여러 곳에 대한 탐험 정신에 있었다. 이를 뒷받침 하는 것이 바로 해상 세력으로서의 몽골 제국의 힘이다. 몽골 제국은 한족이 주류 세력이었던 중국의 송나라-명나라 왕조들과는 달리 해외 무역에 적극적·개방적이었다. 몽골 지배층은 인도양을 통한 해상활동을 적극 후원했고 그 결과 서아시아와 인도의 선박들이 중국의 동남 해안에 자주 입항했다. 중국의 항국를 떠난 배들이 말라카 해협을 지나 인도양으로 진출하는 일도 잦았다.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들어선 명나라의 정화가 1405년부터 1433년까지 7차례에 걸쳐 대원정을 감행한 것 역시 몽골 제국 때 갖춰둔 해상 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화의 선단은 매번 출항때마다 2만7000명의 승선 인원을 기록했고, 대형함선은 60여척, 중소형 선박은 100여척 등 모두 200여척에 이른다. 대형함선(보선)은 가장 큰 것이 151미터에 이르렀고 적재량은 2500톤규모였다. 콜럼버스가 첫 항해 때 사용했던 산타마리아 호의 길이가 불과 20미터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하면 정화 함대의 규모가 어마어마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정화의 원정이나 콜럼버의 항해는 모두 몽골 제국 시대에 이뤄진 세계관의 확대 덕분에 가능했다.
▶살육자에서 관리자로= 몽골 제국에 대해선 평가가 엇갈린다. 특히 칭기즈칸 재위 시절 과도한 살육을 문제 삼는 시각이 많다. 칭기즈칸이 태어날 때 그의 손에 핏덩어리를 쥐고 있었다는 점에 착안 칭기즈칸을 ‘학살자’로 묘사하는 경우도 있다.
몽골군이 서아시아를 정벌할 당시를 본 아랍의 역사가 이븐 알 아티르(Ibn al-Athir·1160~1233년)는 “이 사건은 모든 인류에게 덮쳤던 가장 거대한 재난이자 가장 무시무시한 재앙이었다. 적그리스도라 할지라도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은 파괴시켜도 추종자들의 목숨은 살려두겠지만, 이 타타르인들은 아무도 남겨두지 않았다. 남자와 여자와 어린아이를 학살하고 임신한 여자의 배를 갈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죽였다”고 썼다. 그가 쓴 역사적 사건은 호라즘 정벌 당시였는데 칭기즈칸이 이끄는 당시 몽골군은 저항하는 도시의 모든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다. 호라즘 정벌 당시 죽은 사람의 숫자는 130만명을 헤아린다.
몽골의 금나라 정벌 당시에도 유사한 파괴적 살육 사건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몽골군은 1213년~1214년 겨울 모두 90여개 마을을 파괴했다. 몽골군은 성 밖으로 끌려 나온 사람들을 모두 줄로 묶어 차례차례 죽였다. 수십만명을 죽였다. 금나라는 아예 수도를 더 남쪽으로 옮겨버렸고 수도가 옮겨지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금나라 사람들은 죄다 몽골군에 의해 도륙당했다. 당시 기록을 통계상 살펴보면 몽골군의 침략을 받은 지역(하북3성·섬서·하남)의 인구는 침략전 768만호에서 침략후 100여만호로 줄었다. 말 그대로 지역 전체가 도륙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전쟁의 속성만을 따져봤을 때 그 언제고 한번이라도 전쟁이 인도주의적으로 펼쳐진 때는 없었다. 스페인이 잉카를 정복할 당시 사망자 숫자는 840만명을 넘어서고, 일본이 일으킨 임진왜란의 희생자 수도 100만명을 넘는다. 근대에 들어 나폴레옹이 일으킨 전쟁(1803년~1915년)에서의 사망자 수는 700만명을 넘어서고, 2차세계대전에서의 사망자 수는 최대 8500만명, 한국전쟁에서의 사망자 수도 450만명에 이른다. 전쟁 은 그 자체로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전제로 한다. 잔인한 처형은 때론 이후 치러야 할 전쟁의 수를 줄일 수도 있다. 실제로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군의 잔인한 살육 양태가 알려지면서 먼저 성문을 열고 항복한 경우도 적지 않다. 잔인함 자체가 전략일 수 있는 비정함이 전쟁 자체의 속성에 묻어 있는 셈이다.
몽골인의 살육도 인간이 저지르는 전쟁의 양상이 모두 그렇듯 야만적이고 파괴적이며 잔혹하다. 그러나 특별히 더 몽골군이기에 잔혹했다고 말하는 것은 부당한 편견이다.
▶별명이 ‘뻥쟁이’… 마르코 폴로= 마르코 폴로는 17년 동안 쿠빌라이 칸이 세운 원나라에서 녹봉을 받으며 근무했던 사람이다. 그가 원나라에 머문 시기는 1269년~1295년 사이다. 마르코 폴로는 베네치아로 돌아와 감옥에 갇혔는데 그 때 그가 구술하고 피사의 작가 루스티첼로가 받아 쓴 책이 ‘동방견문록’이다. 이 책은 당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릴 정도로 대단한 베스트 셀러였는데 다만 여전히 마르코 폴로가 구술했던 내용이 모두 자신이 본 내용인지, 과장인지 등은 논란의 대상이 된다. 심지어 그가 참수되기 전 그의 친구들이 마르코 폴로 앞에서 ‘거짓말을 회개하라’고 했을 정도라고 한다. 동방견문록의 최초 저술의 이름은 ‘일 밀리오네’인데, 이는 마르코 폴로의 별명이기도 했다. 마르코 폴로는 요새 말로 하면 허풍이 좀 센 사람으로 분류되는데, 마르코 폴로가 입만 열었다하면 ‘백만~ 백만~’이라고 했기에 붙여진 별명이기도 했다. 뻥쟁이였단 얘기다. 다만 그의 얘기에 과장된 부분이 있고, 모든 것을 직접 보지 않고 남이 얘기해 준 것을 들어 집대성 했다는 점에서 그의 노력의 결실인 ‘동방견문록’의 가치가 훼손 되지는 않는다는 반론도 여전하다.
워낙 베스트셀러가 되다보니 그의 저술은 수대에 걸쳐 여러 논란에 휩싸였다. 예컨대 19세기 독일의 휠만은 마르코 폴로가 실제로는 중앙아시아정도밖에 가지 못했고 거기서 중국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적었다고 주장했다. 또 인도와 페르시아, 에티오피아 등에 관해서는 아랍인들의 저작을 인용해 마치 자신이 쓴 것 처럼 활용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프랑케(H. Franke), 해거(J. w. Haeger), 클루나스(c. Clunas) 등에 의해서도 경험의 진위 여부가 도마에 올랐다.
논란의 주요 쟁점들을 묶어 보면 실제로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갔었다면 어떻게 한자, 차, 인쇄술, 만리장성, 전족 등에 관한 언급이 저술에서 빠질 수가 있었냐는 것이다. 또 양양이라는 도시가 함락된 뒤에 중국에 간 그가 어떻게 양양 함락에 사용된 ‘투석기’를 자신이 만들었다고 주장할 수 있느냐 등이다. 또 마르코 폴로의 주장대로 그 자신이 쿠빌라이칸의 신임을 받으며 관리로 지냈다면 기록이 있어야 하지만, 그 어떤 관련 기록도 없다. 그는 또 자신이 페르시아(일한국)로 시집가는 공주를 호송하는 호송단에 참가했다고 주장하는데, 중국 측 기록에는 호송에 관한 내용만 나오지 마르코 폴로의 이름은 없다.
최근엔 마르코 폴로의 저술이 풍문을 주워 들은 것이고, ‘과도한 허풍’ 때문에 그의 저술이 쓸모가 없다는 류의 혹독한 평가는 잦아드는 추세다. 원나라가 남송을 정벌한 다음 성벽을 허물었다는 설명과 쿠빌라이칸이 도로에 나무를 심으라고 했다는 기록은 서양 기록 가운데 동방견문록에만 나오는 서술이다. 물론 이 역시 다른 사람의 말을 전해들은 다음 구술로 옮겼을 가능성은 열려 있으나, 역사학자가 아닌 17세의 소년이었던 그에게 과도하게 엄정한 학문적 진위 여부를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는 반박이 좀 더 득세한다.
▶이븐 바투타(1304년~1368년) 여행기 중 일부 (그가 말한 중국은 몽골이 세운 원나라를 가리킨다)
"여행자에게는 중국 지방이 가장 안전하고 가장 좋은 고장이다. 한 사람이 단신으로 거금을 소지하고 9개월간이나 돌아다녀도 걱정할 것 없는 곳이다. 그들의 여행 질서를 보면 전국의 모든 역참에는 여인숙이 있는데, 관리자가 몇몇 기병과 보병을 데리고 상주하고 있다. 해가 진 후나 저녁이 되면 관리자가 자신의 서기와 함께 여인숙에 와서 전체 투숙객의 이름을 등록하고는 일일이 도장을 찍은 다음 여인숙 문을 잠근다"
▶참고문헌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김호동·돌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