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구조와 시선

영화

by 인산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는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이름을 널리 알린 영화다. 이 영화에 이어 후속작으로 2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와 3부 〈올리브 나무 사이로〉가 제작된다. 이 영화는 1987년 로카르노 영화제 최우수작품상 외 5개 부문 수상했으며, 1987년 테헤란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1987년 제40회 칸 영화제에서 국제예술영화협회상을 수상했다.


순환 구조와 대립 구조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구조는 인생이 그러하듯, 순환구조와 대립구조가 적절하게 어우러져 있다. 순환구조는 오프닝 신과 라스트 신이 교실이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주인공인 아마드가 친구 집과 자기 집, 즉 포쉬테와 코케를 왕복한다는 점, 포쉬테로 가는 길의 형태가 직선이 아니라 한 화면 안에 전체가 들어오는 지그재그라는 점, 인물들의 대화와 행동이 계속해서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시간적으로도 명백한 순환구조다. 영화는 대략 24시간 동안 이루어진다. 숙제 검사하는 시간에서 시작하여 다음 날 숙제 검사하는 시간으로 끝을 맺기 때문이다. 즉 처음과 끝이 동일한 반복적이고 순환적인 원의 형상을 지닌다.


대립구조는 주로 아이와 어른의 대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교실에서 숙제 검사를 하는 교사와 학생, 아마드와 엄마, 아마드와 할아버지의 대립 등이 있다. 이들의 대립은 나아가, 공간적으로 아이의 외부와 어른의 내부의 대립으로, 무절제 대 절제 혹은 무질서 대 질서의 대립으로 확대해석이 가능하다.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화면 밖 영역에서 들리면서 문고리가 달린 낡은 문이 클로즈업되는 영화의 도입 장면은 이 대립구조에서 감독이 어느 쪽에 손을 들어줄지 미리 결론을 암시한다. 아이와 어른의 대립은 궁극적으로 나무문과 철제문의 대립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대립, 시골과 도시의 대립으로 발전하는데, 장시간 촬영된 나무문은 결국 대립에서 아이의 손을 들어줄 것을 예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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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영화의 구조는 대단히 잘 짜여 있다. 그것은 최초의 교실 장면에는 아이들이 각각 처한 상황이 무엇인지 영화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를 미리 복선처럼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복선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숙제의 중요성이다. 영화에서 숙제는 어른이 아이를 길들이는 수단이다. 교사나 부모는 항상 아이들에게 숙제의 의무를 강조한다.


둘째, 아마드의 짝인 네마자데에게 공책이 가장 중요한 물건이라는 정보이다. 교사는 숙제는 꼭 공책에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사의 말을 빌리면 공책은 절제와 질서의 상징으로 아이들을 제어하는 물건이다. 특히 네마자데의 경우는 이미 두 번이나 숙제를 공책에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공책의 있고 없음은 매우 중요하다. 교사는 다음에도 공책에 숙제를 하지 않으면 퇴학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어른들의 시선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마드의 공책 돌려주기라는 눈물겨운 행동은 관객의 시각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 된다.


셋째, 포쉬테가 주인공의 동네인 코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장소라는 점이다. 수업이 시작된 후 뒤늦게 교실에 들어오는 학생이 지각한 이유는 포쉬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드 왕복해야 하는 그곳이 꽤 멀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넷째, 아이들이 집에서 노동에 시달린다는 점이다. 한 아이는 아버지를 도와 농장 일을 해야 했으므로 숙제를 해 오지 못했다. 숙제가 제일 우선이라고 강조하는 교사와 일을 도우라는 아버지의 갈등 사이에서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아이의 몫이 된다. 가령 모르테자라는 아이는 허리가 아파 의자에 앉지 못하는데 허리가 아픈 이유는 영화 중간에 밝혀진다. 그는 아버지를 도와 무거운 우유를 날라야 했던 것이다. 이처럼 집안일을 도와야 하는 아이들의 처지는 아마드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 엄마와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다섯째, 네마자데와 헤마티는 사촌간이라는 정보다. 이 정보는 낯선 골목길에서 네마자데의 집을 찾아 헤맬 때 알리 헤마티라는 이름이 어떤 역할을 하리라는 점을 사전에 암시한다.


여섯째, 아마드는 네마자데에게 측은지심이 있다는 점이다. 친구가 선생에게 혼이 나서 울 때 카메라의 잡힌 아마드의 표정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아마드의 심정은 필히 공책을 전달해야 하는 심리적인 근거를 제시한다. 아마드의 측은지심은 학교가 파하고 네마자드가 뛰다가 넘어져 바지를 더럽히자, 그의 바지를 닦아주는 장면과 맞물려 있다. 이 장면에서 바지가 중요한 것은 헤마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바지가 네마자데를 찾기 위한 하나의 정보가 되기 때문이다.


감독은 편집의 흔적을 최대한 지우고 롱테이크 중심의 다큐멘터리 기법을 활용하여 아이와 어른의 대립을 직접적인 갈등이 아닌 응시의 방식으로 제시한다. 영화 속 아이들은 어른의 권위에 결코 반항하지 않으며 묵묵히 순종할 뿐이다. 특히 아마드는 자신의 감정을 단 한 번도 밖으로 표출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강요하는 어른들의 모습 뒤에 침묵하는 아마드의 얼굴을 정적인 클로즈업으로 담아낼 뿐이다. 이러한 절제된 다큐 양식은 역설적으로 관객을 더 강력하게 아이의 편에 서도록 한다. 인위적인 감정 강요가 없는 객관적 형식 덕분에 관객은 오히려 아마드가 처한 상황을 생생한 진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결국 관객은 자신이 어른이라는 사실조차 잊은 채, 아마드의 침묵 속에 담긴 고독한 투쟁에 깊이 공감하며 어느새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어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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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아이들과 대립하는 어른들은 권위를 앞세우며 아이들에게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한다. 예컨대 교실의 아이들에게 절대 권력자인 교사는 거역할 수 없는 존재이다.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숙제를 검사하는 위협적인 태도, 신경질적인 목소리, 조용히 하라는 경고 혹은 물어보기 전에는 말하지 말라는 경고는 엄중한 권위의 상징이다. 따라서 네마자데가 공책에 숙제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숙제한 종이를 찢는 행위, 뒤이어 다시 그러면 퇴학시키겠다는 경고는 아이들에게는 허풍이 아닌 절대적인 것으로 자리 잡는다.


예정보다 늦게 교실에 들어선 교사는 우선 창문을 닫는다. 또한 낡아서 제대로 닫히지 않는 출입문을 굳이 닫고 싶어 한다. 문이 닫힌 밀폐된 공간은 어른의 세계이다. 닫힌 공간은 통제가 가능하며 권위가 먹히는 곳이다. 이와 반대로 아이들은 열린 문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 경직된 교실 장면과는 달리 학교가 끝나고 귀가하는 아이들의 무질서한 동작들, 해방된 움직임은 통제받지 않는 바깥세상이 아이들의 공간임을 보여준다.


아이들은 교사에게 철저하게 복종한다. 그러나 이 복종 속에는 아이러니가 숨어있다. 숙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명제 때문에, 오히려 교사는 아마드에게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간다. 영화의 마지막에 교사는 바뀐 공책으로 인해, 아마드가 숙제를 대신한 사실을 눈치를 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교사는 네마자데의 공책을 검사하며 “잘했다”라고 칭찬까지 한다. 아이들의 무저항이 결과적으로 확실한 저항으로 나타난 것이다. 지난 초저녁에 만난 노인이 건네준, 네마자데의 공책에 꼽힌 이름 모를 들꽃은 승리한 아이들을 축하하는 징표이다.


엄마


아마드는 학교에서 집에 돌아온다. 그의 집은 어른 상의의 빨래가 화면 가운데를 가득 메우고 있다. 이 빨래는 삶의 무게를 감당하는 어른을 나아가 엄마를 상징한다. 빨래하는 엄마, 울며 보채는 어린 동생, 숙제하는 아마드의 장면들이 반복해서 제시된다. 그러나 아마드는 숙제에 전념할 수 없다. 우는 동생을 돌봐야 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숙제하라고 하면서도 우유병, 기저귀 등 끊임없이 아이에게 잔심부름을 시킨다. 또 하나 숙제에 전념할 수 없는 것은 어쩌다가 친구 네마자데의 공책을 자신이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에게 매우 중대한 것으로 공책을 필히 되돌려줘야 하는 책임이 있다. 친구의 공책을 갖다주어야 하는 아마드와 이의 중요성을 믿지 못하는 엄마와의 갈등은 점점 고조된다. “갖다 줘야 해/숙제해”의 대립은 급기야 엄마가 심하게 화를 냄으로써 아마드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가 막 포기하려는 찰나, 밖으로 나갈 기회가 생긴다. 엄마가 빵을 사 오라고 심부름을 시킨 것이다. 기회를 포착한 아마드는 빵을 사러 나가면서 친구의 공책을 숨겨 나간다. 그렇다고 아이의 이런 행동을 반항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아마드는 빵을 사는 대신 친구의 집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빵 사 오는 시간에 서둘러서 빵도 사고 친구에게 공책을 전해주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드에게 숙제를 강요하는 엄마는 이중적 인물이다. 숙제하라고 하면서 계속 일을 시키며, 아마드가 똑같은 두 개의 공책을 증거물로 제시함에도 아이의 말을 믿지 않는다. 어른인 엄마는 아들이 생각하고 있는 공책의 중대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순전히 자기의 잣대로 아이를 판단한다. 그러한 엄마는 또한 남자 어른, 시아버지나 남편과 비교해 보면 상대적으로 노동에 시달리는 존재이다. 대체로 영화에서 자주 반복되는 빨래는 여자의 노동의 상징이다. 젖먹이를 돌봐야 하고 빨래도 해야 하고 아들 숙제도 시켜야 하는 엄마의 상황은 빨랫줄에 널려있는 엎어진 어른 상의만큼이나 힘겹다. 반대로 밖에서 게으름을 피우는 할아버지, 집안일에 무관심한 아버지는 지배자의 모습이다. 이 점에서 엄마는 아들 위에 군림하는 동시에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남자의 지배를 받는 이중적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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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의 어른들 - 할아버지와 동네 사람들


할 일 없이 밖에서 노닥거리는 할아버지는 남자 어른의 전형이다. 담배를 가지고 있음에도 마음이 급한 아마드에게 억지로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할아버지는 친구에게 두 가지 것을 말한다. 하나는 자신의 성장기에 아버지에게 매일 매질을 당했다는 것이다. 뭐든 트집 잡아 잊지 않고 해 대는 매질 덕분에 자신이 제대로 자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게으른 놈은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든가 “절제를 배우려면 아비에게 복종하는 법을 배워야 된다”는 식의 설명은 절제와 교육을 통해 규제된 사회와 권력에 대한 복종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려는 어른들의 견해를 대변한다. ‘절제’라는 말은 교사의 입에서도 나온 말로 교사와 할아버지는 동일한 이념을 상징한다. 또 다른 것은 도로공사에 대한 언급이다. 할아버지는 마을의 도로공사가 지지부진한 것을 비판하며 사물을 규격화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공정의 원리를 아이들의 교육 문제로 치환한다. “한 번에 모든 게 이루어지도록(규격화) 교육해야 한다”든가 “옛날에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말을 들었다”는 식의 불평은, 도로를 닦듯 아이들의 정신도 어른의 설계대로 단단히 다져야 한다는 강박을 드러낸다. 이는 효율과 복종의 미덕을 강조하는 기성 사회의 완고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철제문을 제작하는 아저씨는 “어른 말을 들어야지”의 논리로 무지막지하게 공책에서 종이 한 장을 찢어내기도 하고 아이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공책을 빼앗기도 한다. 이 어른은 할아버지의 이론을 실천한 인물이면서 동시에 철제문의 대리인으로 나무문과의 대립을 통해 어른과 아이의 대립 나아가 도시와 시골, 문명과 반문명의 대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포쉬테 마을을 알지 못하는 아마드에게 거미줄처럼 뚫려있는 미로에서 네마자데의 집을 찾기란 너무나 어렵다. 더구나 그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도 없다. 그가 만나는 어른들은 어린 왕자가 만나는 어른들처럼 두꺼운 벽으로 둘러싸여 자기 세계에 빠져 있거나, 힘겨운 삶을 지탱하느라 아이에게 관심을 가질 틈이 없다. 지게에 나뭇짐을 가뜩 지고 가는 아저씨, 빨래를 너는 아줌마, 병들어 있는 할머니, 이들은 한결같이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모습이다.


제 삼의 인물, 노인 - 창문 혹은 문의 의미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 어른은 아이에게 무관심하며, 진정으로 아이를 이해해 주려는 어른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어스름한 저녁에 만나는 네마자데의 할아버지는 예외이다. 이 인물은 아이와 대립되는 어른의 개념이 아니라 아마드를 인도하는 상징적인 존재로 볼 수 있다. 그는 처음으로 아마드에게 “가르쳐주마”라고 말한 인물이며, 항상 아마드를 좇던 카메라가 잠시 각도를 바꾸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여준 인물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젊어서 문이나 창문을 만들었던 이 노인은 도시를 싫어하며 아름다운 나무문들이 철제문으로 바뀌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자신이 만든 나무창들을 그는 아마드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싶어 한다. 영화에서 아마드와 노인의 여정은 한 편의 시를 연상시킨다. 죽은 나무, 사과 장수, 세수하는 노인, 꽃을 꺾어주는 노인, 갑자기 세게 부는 바람, 먼저 가는 아마드, 어둠 속의 개 짖는 소리, 다시 만나는 두 사람 그리고 노인의 마지막 말 “이제 너 혼자 가라. 하나님이 돌봐 주실 거다”라는 말이 그러하다.


한편, 문은 닫힌 공간과 열린 공간을 연결해 준다. 철제문의 방향이 열림에서 닫힘으로 나아간다면 나무문은 반대 방향으로 아이의 경향과 일맥상통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무문은 교실 문, 철제문 아저씨, 나무문 노인 등을 통해 나무문을 은밀하면서도 집요하게 강조하고 싶어 하는 감독의 심중을 대변한다.


다시 화면이 바뀌면 아마드는 집에 돌아와 있다. 공책 전달에 실패한 채 골방에서 숙제를 하던 아마드에게 강한 바람이 불어 닥친다. 이 바람은 친구를 돕지 못했다는 부채감으로 가득 찬 아마드의 복잡한 심경을 대변하는 동시에, 나무문 노인이 보내온 전령처럼 느껴진다.


바람에 문이 활짝 열리고 공책 책장이 넘어가며, 마당의 하얀 빨래들이 뒹구는 역동적인 풍경 속에서 아마드는 마침내 어떤 영감을 얻는다. 그것은 어른들의 완고한 질서를 넘어 친구를 구원할 아이만의 방식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런 맥락에서, 밤길을 함께 걸으며 죽은 나무를 지나 아마드를 인도했던 노인은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 속 인물 고도(Godot)의 현신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외면했던 아이의 진실을 유일하게 알아봐 주고 길을 밝혀준 노인은, 기다림 끝에 마침내 찾아온 구원의 상징과도 같기 때문이다. 아이와 어른의 대립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아이-자연-과거-비문명-시골-비절제-비규칙-나무문-열린공간

어른-사회-현재 - 문명 -도시 - 절제 - 규칙- 철제문-닫힌공간


다른 방식으로 풀어나가는 동일한 영화적 글쓰기, 인생의 우연성


로드 무비 영화인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안갯속의 풍경>과 유사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매우 다르다. 두 영화의 유사성은 아이를 주인공으로 카메라는 이들을 따라가며 이들과 대면하는 세상을 바라본다는 점, 결론에서 피안의 나무와 공책 갈피의 들꽃은 인생에 대한 감독의 긍정적인 사고를 반영한다는 점 등이 있다. 그러나 두 영화의 색채는 대조적이다. <안개>가 멀고 먼 길을 떠나 불확실한 아버지를 찾아야 하는 어둡고 우수에 찬 여정이라면 <내 친구...>는 언덕을 넘어 하찮은 공책 때문에 친구의 집을 찾아야 하는 경쾌하고 유쾌한 터치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색채의 차이에도 두 영화는 결국 인생의 우연성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아마드가 친구의 집을 찾으려 할 때, 친구의 이름과 그가 사는 마을의 이름 그리고 그의 사촌이 헤마티라는 정보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런 정보들은 별로 쓸모가 없음이 금방 드러난다. 친구가 사는 포쉬테는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있어, 포쉬테라는 이름만으로 친구의 집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 또한 네마자데라는 이름 역시 매우 많아서 아마드는 나귀를 뒤쫓아야 하는 힘든 상황이 벌어진다. 또한 헤마티는 코케로 가 버렸으므로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가 없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곳에서 아마드는 제법 유익한 정보를 얻는다. 우연히 허리가 아픈 같은 반 친구 모르테자를 만나 친구의 사촌인 헤마티가 포쉬테의 카네바에 살고 있으며 파이프 옆 파란 대문 집이 바로 헤마티의 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헤마티를 만나면 네마자데를 만난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나귀를 타고 온 네마자데 아저씨의 아들로부터 모하메드 레자 네마자데의 집을 알아낸다. 대장간을 지나면 네마자데의 집 앞에 죽은 나무가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유익하리라는 믿음을 주었던 정보가 쓸모없는 반면 우연히 얻은 정보가 오히려 유익하다. 이러한 우연적 장치는 감독의 인생에 대한 시선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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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드와 네마자데의 공책은 똑같다. 영화는 이 점에서 출발하여 줄거리를 이어나간다. 이 같음의 우연성은 바로 인생은 우연이라는 감독의 시각을 보여주는 것 같다. 공책의 같음으로 아마드는 두 번 실수하는데, 빵을 사러 가면서 공책을 가지고 가는 장면과 마지막 신에서 교사가 숙제를 검사할 때 공책이 바뀌는 장면이 그것이다. 이처럼 언 듯 스쳐 가는 우연적 설정은, 우연으로 한 편의 영화의 줄거리를 구성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인생의 우연성을 경쾌하게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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