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이
어떤 날은 이기지 않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이미 시작된다. 말로는 분명히 할 수 있었고, 조금만 더 밀어붙였다면 상황을 뒤집을 수도 있었던 순간. 하지만 나는 그날, 이기는 쪽이 아니라 지지 않는 쪽을 택했다. 더 큰 소리를 내지 않고, 굳이 결론을 쟁취하지 않고, 상황이 흘러가도록 두는 선택이었다.
이기지 않기로 한 선택은 언제나 오해를 동반한다. 의지가 없는 사람처럼 보이거나, 쉽게 물러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선택은 대체로 무기력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무엇을 지키고 싶은지 분명히 알고 있을 때에만 가능한 선택에 가깝다. 감정이 아니라 관계를, 순간의 승부가 아니라 이후의 장면을 먼저 떠올렸을 때.
지지 않기로 한 날에는 이상하게도 말수가 줄어든다.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게 아니라, 말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상대가 알 것 같아서가 아니라, 설명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 깨달음은 조금 씁쓸하지만, 동시에 마음을 덜 소모하게 만든다.
우리는 흔히 참는 것과 포기하는 것을 같은 말처럼 쓴다. 하지만 둘은 다르다. 참는 것은 감정을 억누르는 일이고, 지지 않기로 한 선택은 감정을 관리하는 일에 가깝다. 더 큰 상처를 만들지 않기 위해, 지금의 감정을 전부 쏟아내지 않는 것. 그 선택에는 생각보다 많은 판단이 들어 있다.
물론 그런 날이 지나고 나면 마음 한편이 불편해진다. 정말 이게 최선이었을까, 조금 더 말해볼 수는 없었을까. 뒤늦은 질문들이 따라온다. 하지만 시간을 조금 두고 나면, 그날의 선택이 무엇을 막아냈는지도 함께 보이기 시작한다. 불필요한 다툼, 돌이키기 어려운 말들, 쉽게 무너질 수 있었던 거리들.
지지 않기로 한 날은 기록으로 남지 않는다. 성과도 없고, 박수도 없다. 대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결과만 남는다. 관계가 그대로 유지되고, 하루가 무사히 지나간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아무 일도 없음’이야말로 그날의 가장 큰 결과다.
나는 점점 그런 날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걸 느낀다. 예전 같았으면 굳이 따졌을 일들, 꼭 결론을 내려야 했을 장면들 앞에서 한 발 물러서게 된다. 이기고 지는 문제로 만들지 않아도 되는 순간들이 분명히 있다는 걸,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어른이 된다는 건, 매번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어떤 싸움은 시작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길 수 있어도 싸우지 않는 선택, 말할 수 있어도 삼키는 태도. 그 선택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든다.
지지 않기로 한 날은 지나고 나서야 의미를 갖는다. 그날 아무 일도 없었던 덕분에, 우리는 다음 날을 평소처럼 맞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선택은 충분히 성실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사이에서 나는 조금씩 배운다. 이기지 않아도 괜찮은 순간들이 있다는 것, 지지 않겠다는 선택이 때로는 가장 단단한 태도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날들이 모여, 생각보다 오래 버틸 수 있는 마음을 만든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