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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경심전 Feb 08. 2023

건강 수명의 적금

산책하기

한 여름을 제외하곤 집 주변의 자연을 둘러보면서 계절의 변화를 감상하고 몸에 일정한 긴장을 부여하고 활력을 얻고자 했다. 미르마을 주변에는 산과 들과 시냇가에 산책로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떠났던 길로 되돌아오지 않고 마을 주변을 한 바퀴 돌아 반대편 길로 돌아올 수 있어 지루함도 없다. 산책로 곳곳에는 체육 시설과 휴식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을 피부로 느낄 때다. 지방자치 단체가 주민들의 복지 시설 확충에 경쟁적으로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김 전 대통령께서 지방자치제의 주춧돌을 확실하게 놓으셨기 때문이다. 

야산 걷기
 
미르마을 주변에는 고도 160미터가 넘지 않는 야산들이 이어져 있다. 이 산에는 예외 없이 산책로들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다. 완만하게 굴곡진 능선을 따라 걷기를 즐겼다. 곳곳에 용인시에서 벤치를 마련해 두어 쉬엄쉬엄 걷기 좋다. 야산에는 참나무와 소나무가 주류를 이루어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다. 땅과 햇빛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경쟁에서 도태된 나무들이 고사한 모습이 곳곳에 보인다. 여기 또한 인간 세상과 다를 바 없다. 나만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참나무가 참으로 정겹다. 어렸을 적 집 뒤 산이 참나무 산이었다. 가을이면 어린 힘으로 떡메질을 해가며 도토리를 열심히 주워 모았다. 보통 일 년에 한 가마니 정도를 수확했고 할머니와 어머니가 도토리 묵을 쑤어 가족이 겨울 내내 즐겨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찬물에 간장과 김치를 송송 썰어 넣어 만든 묵 국을 자주 만들어 주셨는데 도토리묵의 쌉쌀한 맛과 부드러운 식감을 좋아했었다. 대전으로 유학을 떠난 후 도토리 줍기도 뜸해졌고 표고버섯 재배용으로 참나무 숲을 통 채로 매각한 후에는 더 이상 도토리 줍기는 없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가을 산행에서는 유심히 도토리에 눈을 주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주워 모아도 묵을 쑬 형편도 되지 않기 때문에 때깔 좋은 갈색 도토리 하나 정도는 주워서 산행의 동반자로 삼아 추억을 같이 반추하던 한다. 최근에는 야생 동물들을 위하여 도토리 채취가 금지되어 언감생심 모을 생각을 않는다. 유기농을 취급하는 가게에서 국산 묵을 사고 멸치와 다시마로 육수를 우려내 어렸을 적 식감을 되새겨 보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 될 뿐이다.


  숲 속을 걷다 보면 예상치 못한 풍경과 사람들을 마주한다. 한 산책로에는 ㄴ자와 ㄱ자를 합쳐 놓은 모습을 하고 있는 참나무가 있다. 허리 굽은 할머니 모습을 닮았다. 여기를 지날 때마다 마음속으로 인사를 건네고 몸통을 한 번 쓰다듬어 준다. 몸통만 남은 고사목도 만났다. 껍질은 모두 벗겨져 흰색의 몸통을 드러내고 있어 눈에 잘 띈다. 가까이 가보니 벌레 구멍이 족히 수 천 개는 되는 듯했다. 이 애벌레를 노리고 딱따구리들의 입이 닫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식량이 부족한 겨울을 풍족하게 낫을 듯했다. 아래를 보니 나무 조각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옳거니! 옳거니! 옳거니! 야산에서 산책을 할 때 앞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무슨 소리지? 80세는 되어 보이는 노인이 불편한 발걸음을 힘겹게 옮기고 있었다. 뇌졸중의 후유증이라고 보이는 증세 속에서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칭찬과 격려였다. 잘하고 있어, 잘하고 있어, 계속 이렇게 조금씩 전진하자. 조금 지나 반들반들하게 다져진 산책길이 눈에 들어왔다. 앞서 지나간 몸이 불편한 어르신이 걷던 모습이 환영처럼 보였다. 아하. 이 길이 시민들의 건강을 지켜주고 회복시켜 준 봉사의 흔적이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시냇가 산책
 
집 주변에는 경안천이 흐르고 있는데 서울 안양천이나 지방 여타 하천처럼 이곳에도 산책로 및 자전거 전용도로가 조성되어 있다. 산책로는 걷는데 무리가 가지 않도록 적당한 쿠션이 있는 재료로 포장되어 있다. 
 흐르는 물을 보고 걷다 보면 내 사고도 알 수 없는 곳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무심히 흘러가는 시내 물, 그 위에서 살기 위해 열심히 물속으로 부리를 넣어 대는 오리 떼, 그 오리들을 그냥 무시해 버리는 큰 잉어 무리들을 보면서 ‘저 동물들이 왜 저렇게 열심히 사는지’ 하는 의문이 든다. 그 의미를 알 수 없으며 내 생의 의미조차 알 수 없다. 저들과 내가 다름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다. 

나무에 물이 오르기 시작하는 초봄에 새끼손가락보다 약간 가는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든다. 한 손으로 가지를 잡고 다른 손의 엄지와 검지를 사용해서 조심스럽게 비틀면 속심과 껍질이 분리된다.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어 본다. 시냇가 갈댓잎을 꺾어 배를 접어 물에 띄워도 본다. 어릴 적 방과 후에 친구들과 집에 가면서 놀았던 초봄의 풍경이다. 옛날과 다름없는 버들피리 소리가 추억을 소환해 주었지만 같이 놀던 친구들은 나이가 들어가고 점점 더 만나기가 어렵다. 


 찻길과 산책길 
 2018년 포곡읍에는 제2순환도로 건설이 시작되었다. 내가 자주 다니던 경안천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생기고 산책로 주변의 야산이 포클레인의 난폭함에 민낯을 드러내고 망가져 갔다. 토목회사 다니는 친구의 말에 따르면 정부는 토지 보상의 문제를 회피하기 위하여 되도록이면 국유지 산들을 연결하여 길을 낸다고 한다. 토목 기술이 발달하여 산을 깎고 터널을 뚫는 일은 사용 중인 토지를 보상하는 비용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거기에다 보상 협상 기간이 필요 없다는 큰 장점이 있다. 사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걸었던 산책로가 차들을 위한 검은 도로로 변화되어 가는 것을 보며 또 그 도로 주변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는 상업 시설을 보며 미르마을도 조만간 전원주택 단지로서의 매력을 상실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었다. 


산책은 몸의 건강 돌보는 일과 더불어 정신적인 정화과정을 거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 잡다한 세상일로부터 떨어져 걷다 보면 뇌 스스로 버릴 것은 지워버리고 보관이 필요한 것은 저장하고 정리가 필요한 사항은 다시 생각해 본다. 나 스스로도 회사일로부터 발생한 번잡스러움을 정리하는 시간이 되며, 생의 본질 및 의미를 생각하고 정립하는 소중한 시간으로 활용한다. 걸으면서 만나게 되는 변화되는 풍경과 벌레 소리와 물소리, 바람소리 등은 새로운 자극이 되기도 하고 스트레스를 날려준다. 피로해진 신체와 맑아진 정신은 그날 밤 꿀잠을 보장해 준다. 푹 자고 일어나면 잡념들이 살아지고 하루를 살아 낼 에너지가 생성되어 있다. 게으름을 떨쳐버리고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는 행위는 그날 밤의 숙면과 내일의 에너지를 얻기 위한 보약이 된다. 산책은 미래의 생물학적 수명 연장을 위하여 행하지 않는다. 건강 수명을 늘리기 위한 적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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