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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역 May 01. 2024

첫 아이와 만남

세상에서 가장 기쁜 만남은 자식과의 만남이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사연은 잘 알지 못한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추운 겨울에 첫닭이 울던 시간에 태어났고 그 밖에 태몽이나 태교니 하는 변두리 사연은 전해 듣지를 못했다.


남녀가 결혼하는 것은 자신의 뿌리를 남기려는 본능도 작용한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변해도 후대를 잇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다.


내가 아내와 결혼해서 큰아이를 얻은 것은 결혼하고 두 해가 지나 서다. 광명시 철산동에 신혼살림을 차리고 나는 김포공항으로 아내는 서울역 근처에 소재한 고등학교로 출퇴근했다.


첫 아이를 만난 순간은 가슴속에 묻어 둔 시간과 이야기가 더 많다. 삶이란 일상의 순간을 매듭짓고 연결하는 과정이다. 그런 매듭을 이어 가는 과정에서 일이 발생하고 역사가 이루어진다.


결혼해서 신혼 기간에 생긴 아이는 생면도 하지 못하고 떠나보냈다. 그때까지 아이는 저절로 태어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자식과의 만남은 정성과 사랑과 보살핌과 끝없는 인내를 요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아이를 두 번 유산하고 나자 임신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생겼다. 남들은 아이를 잘도 났고 잘만 기르는데 왜 우리는 일이 꼬여만 갈까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사람은 마음에 긴장과 두려움이 생기면 하던 일도 제대로 되지 않는 것 같다. 나중에는 아이를 갖는 것도 하늘의 뜻이고 아들이나 딸로 태어나는 것도 하늘의 뜻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 근 일 년이 되어 갈 무렵 지금의 큰아이가 임신이 되었다. 큰아이는 임신 초기부터 유산을 막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고 큰아이를 지키기 위해 아내는 학교에 휴직서까지 제출했다.


남녀가 만나 결혼하는 것도 축복이지만 아이를 얻는 것은 더 큰 축복이다. 게다가 건강한 아이를 얻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복덩어리를 얻는 일이다.


큰아이가 태어날 무렵 우리는 사당동 처가 근처의 단독주택 반지하에서 살았다. 큰아이가 세상에 막 나오려고 한 날은 1991년 5월 7일(양력) 저녁이다. 


그날은 퇴근해서 아내와 저녁을 먹고 있는데 아내가 갑자기 이슬이 비추고 약간의 산통이 온다는 것이다. 저녁을 먹고 옷과 얇은 이불 등을 챙겨 택시를 타고 관악구 신림동에 아내가 다니던 박산부인과를 찾아갔다.


병원에 도착해서 큰아이가 태어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아이는 저절로 나와서 자란다는 생각을 완전히 바꾸었다. 자신과 관련한 일은 스스로 책임지고 맞이해야 하는 운명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간 아이를 낳는 것을 본 적도 없고 아이가 태어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내는 진통이 올 때마다 신음하고 나는 아내를 수시로 들여다보며 병원 복도를 서성였다.


그런 상태에서 아이가 태어나기를 기다리다 새벽녘에 복도의 소파에서 잠깐 엎드려 있다 깜빡 잠이 들었다. 소파에서 선잠을 자고 있는데 아내의 보호자를 찾는 간호사의 긴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파에서 일어나 아내에게 달려가자 간호사가 아내가 곧 출산할 것 같으니 분만실로 부축해서 데려가란다. 아내를 데리고 분만실로 가자 간호사가 보호자는 밖에서 대기하라며 아내와 함께 분만실로 들어갔다.


아내는 분만실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산부인과 원장의 집도하에 아이를 낳았다. 세상에 태어난 큰아이는 아내보다 내가 먼저 유리창을 통해 만났다.


갓 태어난 아이를 간호사가 흰 수건에 싸서 안고 창가에 와서 보여주는데 아이를 바라보며 탄생의 위대함과 신비함을 느꼈다. 손과 발을 버둥거리는 아이는 바라볼수록 귀엽고 앙증맞았다.


큰아이가 태어난 소식을 어머니와 장모님에게 전해드리고 직장에는 특별휴가를 신청해서 아내와 아이와 함께 병원에서 하루를 보냈다. 


아내는 진통을 참아가며 아이를 낳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했다. 아내의 산통과 해산을 지켜보며 자식을 얻는 것은 사람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의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큰아이는 병원에서 며칠 후 퇴원하려는데 원장이 아이가 황달기가 있으니 큰 병원에 가서 자외선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안고 앰뷸런스를 타고 서울 중구에 소재한 을지병원으로 이동했다.


그날 큰아이를 가슴에 안고 앰뷸런스를 타고 간 시간은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큰아이는 경광등 불빛이 번쩍이는 차 안에서 연신 고개를 돌려가며 밖을 바라보았다.


큰아이를 을지병원에 입원시켜 놓고 자외선 치료를 받는 동안 아내와 교대로 면회를 갔다. 큰아이는 을지병원에서 보름간 자외선 치료를 받고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낮에는 잠을 자고 밤이 되면 잠을 자지 않고 울었다. 아이가 밤마다 울어서 아내가 병원에 전화해 보니 간호사들이 아이가 귀여워서 밤마다 교대로 안아주며 다른 아이를 돌보았다고 한다.


우리도 간호사가 했던 것처럼 밤마다 교대로 아이를 품에 안고 돌보며 밤을 새웠다. 한 달 보름간 아이의 잠버릇을 해결할 수 없어 시골에 계신 어머니에게 아이 돌보는 문제를 상의드렸다.


그러자 어머니는 이튿날 동네에 사는 법사(무당) 아주머니와 함께 올라오셨다. 어머니와 아주머니는 오후에 오셨는데 그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날이 어둑해지자 법사 아주머니는 주문을 외워가며 방과 부엌 등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뿌려가며 주문하는 의식을 치렀다.


일종의 귀신을 쫓는 행위 같았다. 어머니에게 큰아이 돌보는 일에 지쳤으니 아이나 좀 봐달라고 한 건데 아주머니가 하는 것을 바라보며 무슨 효과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만 들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머니가 내려가신 이튿날부터 아이의 잠버릇이 바뀌었다. 근 사십여 일을 아이는 밤과 낮이 바뀌어 힘들게 했는데 아이는 아주머니의 의식행위 이후 낮과 밤이 바뀌었다.


세상에 귀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어야 할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이가 때가 되어 낮과 밤이 바뀐 것인지 아니면 아주머니 주문에 따라 집안의 귀신이 물러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날 이후 아이는 저녁을 먹고 잠잘 시간이 되면 울지 않고 잠을 잤다. 밤에도 아이는 잠을 자다가 배가 고파 깨는 것 말고는 아침까지 잠을 잤다.


큰아이가 밤에 잘 자는 것이 귀여워서 퇴근 후 저녁을 먹은 후 아이를 안고 사당동 집 주변을 한 바퀴씩 돌았다. 아이를 안고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있으면 아이가 스르륵 잠이 들었다.


사당동 살던 시절 큰아이를 처음 돌봐주신 분은 장모님이다. 장모님은 일 년간 외손녀를 보아주고는 친손녀도 아닌데 내가 왜 보아주느냐며 더는 돌보아 줄 수 없다며 손을 떼셨다.


그때부터 아이의 보모를 구하고 바꾸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장모님에 이어 두 번째로 아이를 돌보아주신 분은 사당동 처가에 놀러 오시던 봉천동 할머니다. 할머니는 우리 집에 입주해서 근 일 년을 보아주셨다.


그리고 그다음은 연변족 아주머니가 입주해서 일 년 정도 보아주셨다. 맞벌이 부부가 아이를 키우는 것은 허울만 좋을 뿐 돈은 돈대로 나가고 마음은 마음대로 상처를 입는다.


맞벌이는 겉으로 경제적 여유가 는 것 같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속 빈 강정이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부모나 외가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하루하루를 전쟁처럼 보낼 각오를 하고 아이를 키워야 한다.


지금도 큰아이를 품에 안고 사당동 주택가를 돌며 거닐던 기억이 떠오른다. 내 가정사의 역사는 큰 아이와 함께 성장하고 완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큰 아이를 기르면서 마주한 것은 모두가 생애 최초이자 처음이었다. 그로 인해 큰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다. 엄마와 아빠 노릇을 제대로 해주지 못한 것이 가슴에 커다란 앙금이 되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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