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에 가장 먼저 눈뜬 문명, 너무 일찍 강해진 국가

동양과 서양을 갈라놓은 오래된 구조

by 임찬수

문명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질문 중 하나는 이것이다. “왜 동양과 서양은 전혀 다른 정치와 경제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 답은 의외로 간단하면서도 충격적이다. 동양은 인류 문명 가운데 가장 먼저 폭력의 조직화에 눈을 뜬 지역이었고, 그로 인해 국가가 지나치게 빨리 강해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국가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강해졌는가라는 문제다. 그리고 이 문제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제도주의 발전론, 찰스 틸리의 “전쟁이 국가를 만든다”는 명제, 군사재정국가 이론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핵심 주제다.


동양, 특히 중국은 서양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총력전’을 경험했다. 춘추전국시대의 전쟁은 단순한 영지 간 충돌이 아니라 국가의 존망을 건 총력전이었고, 수십만 병력을 동원하는 행정·조세·병참 체계는 오늘날의 근대국가와 비슷한 규모였다. 그 결과 진(秦)은 기원전 221년에 이미 전국적 법률·세금·도로·군사 체계를 갖춘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를 만들었다. 이는 서양의 근대적 중앙권력 형성보다 1,800년이나 빠른 시기다.


문제는 바로 이 조기 국가화였다. 국가는 폭력·조세·군역·토지를 독점하며 사회를 압도했고, 귀족·종교·상인·도시 같은 중간 집단이 성장할 공간을 미리 차단했다. 동양에서 법은 권력을 제한하는 장치가 아니라, 백성을 통제하는 도구로 발달했다. ‘법치(Rule of Law)’가 아니라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가 정교화된 것이다. 이는 국가가 너무 일찍, 너무 강해졌기 때문에 생긴 구조적 결과였다.


반면 서양은 지리적 파편화와 봉건제 때문에 국가가 약하게 출발했다. 왕은 귀족에게 병력을 의존했고, 교회의 보편적 권위를 인정해야 했으며, 도시와 상인에게 세금을 빌려야 했다. 왕권을 유지하려면 사회적 타협이 필수였다. 여기에 등장한 것이 바로 ‘계약’이다. 마그나 카르타는 왕이 법의 바깥에 있을 수 없다는 첫 선언이었고, 권리와 자유는 국가가 부여한 것이 아니라, 국가로부터 지켜낸 것이었다. 이 분권적 구조는 서양에서 근대적 법치주의와 개인의 권리를 자연스럽게 싹틔웠다.


경제사에서도 이 차이는 그대로 드러난다. 자본주의의 출발점은 기술이나 시장이 아니라 사유재산권의 안정적 보장이다. 동양에서도 송나라의 상업화나 명·청 상인 자본은 세계적 수준이었지만, 국가가 재산을 언제든 빼앗을 수 있는 구조에서는 장기적 투자가 불가능했다. 상인들은 사업 확장보다 땅을 사거나 자식을 과거에 급제시켜 지배계층으로 편입되는 데 집중했다. 자본이 국가 권력의 외부에서 자율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것이다.


반면 서양에서는 왕이 상인에게 전쟁 자금을 빌려야 했고, 그 대가로 재산권을 인정해야 했다. 국가는 사회세력에 의존할수록 그들의 권리를 넓혀야 했고, 그 결과 금융·기업·장기 신용 같은 제도들이 자연스럽게 발달했다. 약한 국가가 자본주의의 조건을 마련한 셈이다.


결국 동양과 서양의 차이는 “누가 옳았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동양은 너무 빨리 강해졌고, 서양은 늦게야 강해졌다. 그 조숙함은 국가의 효율성과 안정성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사회의 자율성과 계약의 성장을 제한했다. 반대로 서양의 장기적 분권은 혼란을 낳았지만, 그 혼란 속에서 권리·계약·법치·자본주의라는 근대 제도가 싹틀 수 있었다.


폭력에 가장 먼저 눈뜬 문명은, 동시에 국가가 가장 빨리 강해진 문명이었다. 그리고 그 조숙함은 동양의 가장 큰 힘이었지만, 근대의 문턱에서는 가장 깊은 제약으로 작용했다. 문명은 한 번 선택한 경로를 오래도록 따라간다.

그 경로의 장구한 그림자를 이해하는 것이, 오늘의 세계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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